백성은 수군을, 수군은 이순신을 믿었다
  • 윤영수│방송작가·<불패의 리더 이순신> 저자 ()
  • 승인 2014.08.1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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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에 나타난 리더십의 핵심은 ‘신뢰’

“새벽에 송희립 등을 당포산으로 보내 사슴을 잡아오게 했다.”(<난중일기> 1593년 9월8일)

“…칡을 60동 캐었더니 그제야 원균이 왔다.”(<난중일기> 1594년 8월19일)

 

전란 다음 해인 1593년 여름, 이순신은 진을 한산도로 옮겼다. 여수에 본영을 두고 있던 전라좌수영을 경상도 해역 한산도로 옮긴 것이다. 때는 2차 진주성 싸움이 조선의 참혹한 패배로 끝난 직후. 이순신의 위기였다. 이제 일본 육군이 전라도로 진출할 교두보가 마련된 것이다. 이순신의 선택은 한산도였다. 일본 육군의 공격에서 자유롭고 거제 안팎으로 오는 적을 한꺼번에 막을 수 있는 요충지가 바로 한산도였다. 뒤이어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됐다. 명실상부하게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할 수 있게 됐다.

영화 ⓒ CJ 엔터테인먼트
왜적보다 무서운 적 ‘민생’ 해결

그러나 한산도의 이순신 앞에는 또 다른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민생’이었다. 부하들이 사냥을 하고 이순신이 직접 참가한 가운데 칡 캐기가 이뤄졌다. 부족한 군량미 때문이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진을 치자 수많은 백성이 몰려들었다. 이순신 옆에만 가면 적어도 죽지는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좁은 한산도에서 몰려든 백성들을 먹여 살릴 방도가 없었다. 당장은 군량미도 부족했다.

 

“(군사가) 무려 1만7000명입니다. 한 명당 아침저녁 5홉씩 나눠준다면 하루 100여 석입니다.”(1594년 3월10일 장계)

 

백성과 군사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이순신 앞에 놓였다. 사냥과 낚시와 칡 캐기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백성들에게 소금을 굽게 하고 고기를 잡게 했지만 역시 부족했다. 이순신은 장계를 올렸다. 요점은 간단했다.

첫째, 남해의 섬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게 해달라. 둘째, 연안 고을의 군량과 군사 조달권을 수군에 넘겨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바닷가 백성들은 육군 지휘관, 각 도 관찰사, 각 지역 수사(水使) 등으로부터 각각 명령을 받고 있었다. 서로 군량권을 확보하고 병력 징발권을 행사하는 바람에 백성은 백성대로 어려웠고 이순신 역시 수군 확보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군량권과 징병권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남해안의 섬을 개간하겠다는 이순신의 요구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200여 년간 조선이 견지해온 이른바 공도(空島) 정책, 왜구를 피해 섬에 주민이 살지 못하도록 했던 국가 정책을 바꾸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피난민과 백성에게 직접 농사를 짓게 하고 절반은 군량미로 받겠다는 것이었다. 조정이 미적거리자 몇 차례 장계를 올렸다. 자칫 왕의 오해를 살 수 있는 요구였다. 결국 이순신의 집요함에 임금과 조정도 손을 들었다. 많은 섬에 농토가 생겨났고, 이 물적 토대는 조선과 조선 수군이 끝까지 견디는 힘이 됐다. 왜적보다 더 무서운 적인 민생을 해결한 이순신, 그는 싸워서 이기는 장수를 뛰어넘는 리더였던 것이다.

 

“녹도만호 송여종이 도망친 군사 8명을 붙잡아 왔으므로 괴수 3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곤장으로 다스렸다.”(<난중일기> 1594년 7월26일)

“당포만호를 잡아서 현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때렸다.”(난중일기 1595년 7월19일)

 

이순신의 <난중일기>. 전쟁이 나던 해 1월1일부터 그가 전사하기 이틀 전까지 2539일간의 기록이다. 한자 수만 무려 13만여 자로 엄청난 분량의 기록물이다. 지금은 국보로 지정된 그의 일기, 수백 년이 지나 그의 후손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기록을 들여다볼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일기는 그의 이른바 ‘쌩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도 그대로 담겨 있다. 술을 마셨다는 기록, 활을 쏘았다는 기록,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막내아들 면에 대한 절절한 감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부하에 대한 처벌과 처형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부하의 목을 벴다는 기록도 서른 건이 넘는다. 처벌 기록과 대상도 다양하다. 하급 군관뿐만 아니라 만호도 군령을 어길 시에는 어김없이 매를 때렸다. 만호는 종4품으로 영관급 장교였다. 이들도 이순신에게 걸리면 방법이 없었다. 일벌백계.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다

그런데 이렇게 무섭고 엄격한 리더는 적잖은 위험성이 있다. 특히 전쟁 중에는 탈영병이 속출할 우려가 있다. 실제로 많은 탈영병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이순신 부대는 전투를 치르면 치를수록 더 강한 군대가 돼나간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당초 약속할 때 비록 적의 머리를 베지 못해도 죽기를 각오하고 힘껏 싸운 자를 1등으로 한다고 약속하였으므로 신이 직접 등급을 결정해 1등으로 기록했습니다.”(1592년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당포파왜병장(唐浦破倭兵狀)’)

“박녹수·김희수가 와서 적의 정황을 말해주므로 각각 무명 한 필을 주어 보냈다.”(<난중일기> 1595년 9월23일)

 

이순신은 공을 세운 부하 장수와 군사에게는 그에 적합한 상을 주었다. 심지어 적의 정보를 갖고 온 백성에게도 상을 주었다. 부하 장수가 합당한 상을 받지 못할 경우 따로 장계를 올려 포상해달라고 했다.

부하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평소 엄격하고 무섭기 그지없던 최고 지휘관 이순신 덕분에 왕으로부터 상을 받게 된다면 그 부하는 왕을 믿을까, 아니면 자신을 알아준 이순신을 믿고 따를까.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장계에 부상자와 전사자도 낱낱이 보고하고 있다. 비록 그가 노비 출신이라 하더라도 ‘아무개 집 종 누구’ 이런 식으로 보고를 했다. 또한 전사자는 그 가족이 가까이 살고 있으면 비록 부족하지만 먹고살 방도를 취해주었다. 군사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장으로 나가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순신이 신뢰를 획득하는 방법이었다. 이순신 리더십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신뢰였다. 조선 백성은 조선 수군을 믿었다. 우리 수군은 지지 않는다. 그래서 백성은 군량미를 바쳤고 힘든 노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이순신을 믿었다. 장군과 함께라면 지지 않을뿐더러 올린 전과와 전공을 꼬박꼬박 챙겨준다. 바로 이 신뢰가 조선 수군의 힘이었다.

요즘 세월호 참사, 윤 일병 사건 등 국가 기본 시스템을 근본부터 흔드는 사건이 빈발하고 그때마다 ‘일벌백계’ ‘신상필벌’이란 말이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420여 년 전 이순신과 비교해보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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