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산케이 ‘저질 도발’ 싹을 키웠다
  • 이승욱·조해수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4.08.20 11:1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근혜 대통령 7시간 행적 보도 논란 진실 공방 속 의혹 증폭

2012년 8월10일 오전 9시, 코드명 ‘해맞이’의 타임 카운트가 시작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회색 바지와 청색 재킷 차림으로 청와대를 나섰다. 오전 10시 서울공항, 국내용 대통령 전용기 K2를 타고 이 대통령이 향한 곳은 강릉공항이었다. 강릉공항에서 이 대통령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헬기에 몸을 실었다. 그를 태운 헬기의 목적지는 독도의 모항(母港)인 울릉도. 오후 2시, 이 대통령은 한반도의 최동단 독도에 발을 디뎠다. 현직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이었다.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해온 일본 정부와 극우 보수단체의 반발이 거세진 것은 물론, 국내에서도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일본의 독도 분쟁화 전략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문제는 뜻밖의 곳에서 크게 불거졌다.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 소식을 처음 타전한 곳은 국내 언론이 아닌 일본 언론이었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있기 하루 전인 8월9일 밤 10시30분, 독도 방문 소식은 일본 현지 방송을 통해 보도됐고, 다음 날 일본의 조간신문은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대서특필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관례상 국가원수의 안위와 밀접한 대통령의 일정은 사전 엠바고(보도 시점 유예)를 지켜야 하지만, 일본 언론이 이를 깨고 국내 언론에 앞서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 사실을 보도한 것이다. 일본 언론의 ‘위험한 보도’는 국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이 우방 대통령의 안위에는 아랑곳없이 사전 보도를 한 것을 두고 일종의 도발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의 일상’ 마음껏 조롱한 산케이

그로부터 정확히 2년 만에 청와대와 일본 언론이 다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월호 참사 당일인 4월16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다룬 일본 산케이신문(산케이)의 보도가 도화선이 됐다. 박 대통령의 7시간 미스터리는 세월호 참사 당일 오전 10시15분 국가안보실을 통한 대통령의 지시를 마지막으로 같은 날 오후 5시15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현장 방문 때까지의 행적을 말한다. 그동안 야당과 세월호 참사 관련 단체들은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당시 참사와 관련해 이 7시간 동안 적절한 대응을 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의혹을 제기했다.

산케이는 8월3일 가토 다쓰야 서울지국장이 작성한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누구와 만났나’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추적 서울발’이라는 부제를 단 이 기사에서 산케이는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40%로 폭락했다”며 “서서히 레임덕이 일기 시작하는 대통령 등 현 정권의 권력 중심에 대한 진위를 알 수 없는 소문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언뜻 산케이가 내세운 보도의 취지는 박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의 배경을 다룬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사의 맥락을 꼼꼼히 살펴보면 기사의 표적이 박 대통령의 ‘스캔들 의혹’ 쪽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케이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이 소문은 저속한 것”이라면서 현 정권의 숨은 실세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한 인사의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산케이가 보도한 기사는 ‘풍문’을 다룬 국내 한 일간지의 칼럼과 증권가 정보지(찌라시)를 인용했을 뿐 그 이상의 정확한 근거나 자료를 제시하지 못했다. 결국 우방의 국가원수에게 도덕적인 치명타를 안길 수 있는 스캔들 의혹을 교묘한 수법으로 이것저것 짜깁기해 보도한 것을 보면 산케이가 무엇을 노리고 기사를 썼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극우 성향으로 반한(反韓) 기사를 꾸준히 써온 산케이가 박근혜 대통령을 흥밋거리로 전락시킴으로써 한·일 간의 극한 대치를 한국 탓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일본 신문 시장에서 입지가 좁아 경영난을 겪고 있는 산케이가 존재감을 키운 것은 망외 소득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2012년 12월 집권에 성공했지만, 집권 이후 20개월 동안 양자회담 형식으로 만난 적이 없다. 양국의 갈등은 얼음판을 걸어가는 듯 위태로운 상황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4월 일본 의회에서 “(침략과 식민 지배를)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계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앞서 2012년 12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지난 7월1일에는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 용인 각의 결정을 내리면서 우리 정부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양국이 급속한 냉각기에 빠져들면서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지난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조우했을 뿐, 양자 간 대화는 갖지 않았다. 아베 총리의 만남 제의를 박 대통령이 냉랭하게 뿌리치는 모양새가 계속됐다. 그 사이 한국은 중국과, 일본은 북한과 관계 개선을 시도하며 상대방을 자극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양상이다. 아베의 극우주의를 비판하는 국내 언론의 논조가 계속되자, 일본 언론에서도 박 대통령을 향해 ‘아줌마 외교’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공격했다. 양국 간 첨예한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의 극우 매체 산케이의 보도가 터져 나온 것이다. 

청와대는 산케이의 보도가 나온 지 나흘 만인 8월7일, 강경 입장으로 선회했다. 황우여 교육부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에서 산케이 보도 문제가 제기되면서부터다. 인사청문회 당일 윤두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기자들에게 “(산케이가)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것을 기사로 썼다. 민·형사상 책임을 끝까지 묻겠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산케이신문 서울지국. ⓒ 청와대 제공
대응 수위 조절에 나선 청와대

하지만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나 반응도 아닌 외신 보도에 대해 강경 대응한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특히 산케이의 보도보다 보름 정도 앞서 게재된 7월18일자 조선일보의 칼럼(‘대통령을 둘러싼 풍문’)에서도 박 대통령을 둘러싼 유사한 루머가 소개된 점을 감안하면, 청와대가 특히 산케이 보도에 격분한 배경을 두고 여러 해석이 뒤따르기도 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야당과 세월호 참사 유가족 등이 집요하게 의혹을 제기하면서 궁지에 몰린 청와대의 정국 반전용 카드가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광복절을 앞두고, 우리 국가원수에 대한 일본 언론의 도발 등 불순한 의도를 부각시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는 2년 전 8·15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전격적으로 감행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 배경에 ‘반일 감정을 이용해 정권 말기 레임덕을 상쇄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는 해석과 궤를 같이하는 분석이다.

이러한 의혹은 청와대가 이후 강경 대응 입장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모습을 보이면서 더욱 짙어졌다. 청와대 측의 강경 대응 발언이 있은 지 사흘 만인 8월10일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기자실을 찾아 “제3자 고발 사건이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대응 수위를 낮췄다. 불과 사흘 전 윤두현 홍보수석이 “소송은 제3자 고발로 이미 시작됐지만 소송 주체에 따라 법적 의미가 많이 달라진다. 우리는 엄정하게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말한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톤이 낮아진 것이다.

산케이 보도에 대한 청와대의 초기 강경 대응 천명은 오히려 박 대통령을 둘러싼 7시간 미스터리를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청와대는 8월13일 뒤늦게 국회 세월호 국조특위 여당 간사인 조원진 의원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보고 및 대통령의 조치 사항’을 공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당일인 4월16일 하루 종일 청와대 경내에 머무르면서 20~30분 간격으로 총 21회(국가안보실 10회, 비서실 11회)에 걸쳐 세월호 보고를 받았고, 필요한 지시를 했다(19면 표 참조). 조 의원은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었다, 없었다는 문제는 (이제) 분명히 밝혀진 것”이라며 “더 이상 논란의 여지를 없애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박 대통령의 동선 등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청와대는 적의 공격이 예상되는 중요한 국가안보 시설이어서 경호 필요상 역대 어느 정부에서도 대통령의 위치와 동선을 공개한 적이 없다”며 밝히길 거부했다. 

청와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7시간’에 대한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우선 박 대통령이 7시간 동안 경내에 있었다면서도 박 대통령에 대한 청와대 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등의 대면 보고가 없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이 핵심 참모들이 상주하는 경내에 있으면서 대면 보고를 한 차례도 받지 못했다면, 이는 합리적인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ㄱ씨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대통령에게 대면 보고를 할지, 아니면 유선이나 서면으로 할지 보고 형식을 결정한다”며 “그런데 수백 명이 실종된 세월호 참사라는 대형 사고가 터졌고, 대통령이 경내에 머무르고 있는 상황에서 대면 보고가 일절 없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행정관을 지낸 ㄴ씨도 “(만약 박 대통령이 경내에 있었다는 청와대의 해명이 맞다면) 정확하고도 신속하게 대통령에게 현황을 보고해야 하는 (청와대 비서실 등의) 상황 판단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 연합뉴스
“대면 보고 일절 없었다는 것 납득 어려워”

꼼꼼하고 완벽한 업무 처리로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는 김기춘 비서실장이 박 대통령의 그날 행적에 대해 “모른다”고 말한 것도 여전히 의문이 제기된다. 통상적으로 대통령이 청와대 경내에 머무르고 있을 경우, 특별한 공식 일정이 없으면 동선은 청와대 본관 집무실과 관저, 산책을 하는 녹지원 등이 대부분이다.

또 청와대 비서실은 대형 사고가 터졌을 경우 대통령의 위치와 동선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최우선 순서라는 점을 감안하면, 김 비서실장의 답변에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다. ㄱ 전 비서관은 “김 실장이 박 대통령의 동선을 몰랐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ㄴ 전 행정관은 “서면 보고는 수석과 비서관 등이 직접 부속실을 통해 보내거나 전자우편 등을 통해 전달하면 부속실이 대통령에게 보고한다”고 말했다. 이는 최소한 부속실 관계자들은 박 대통령의 동선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김 실장이 사전 또는 사후에라도 부속실을 통해 박 대통령의 동선을 파악했을 개연성이 크다는 점을 암시한다.  

청와대 경내에 있었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청와대가 박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계속 함구하는 것을 두고 논란은 더욱 커지고 있다. ㄱ 전 비서관은 “대통령이 머무를 수 있는 청와대 경내라고 하면 집무실과 관저, 녹지원 정도로 이미 익히 알려진 사항인데,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는 것은 의혹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대목”이라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7시간 미스터리’가 국회에서 공식 제기된 때로부터 40여 일이 지나고 있다. 청와대가 “대통령 동선을 공개한 전례가 없다” “경호상 문제로 보안이 필요하다” 등의 이유를 들며 논란을 비껴가려는 행보를 보이는 틈을 타고, 대한민국 국가원수에 대한 일본 극우 매체의 저질 도발이 감행됐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자존심도 뭉개졌다. 이는 산케이의 수준 이하의 낯부끄러운 보도가 직접 원인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7시간을 명쾌하게 밝히지 못하는 청와대가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