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1. '봐주기 수사' 낌새 땐 가차 없이 탄핵
  • 이덕일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08.20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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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권은 사헌부의 독점물 아냐…기소권까지 한 손에 쥔 지금의 검찰과 달라

시사저널은 이번 호부터 ‘이덕일의 칼날 위의 역사’를 새롭게 연재한다. 필자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탁월한 주제 발굴과 문장력으로 국내 역사물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꼽히며, 이 시대 가장 도전적인 역사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누가 조선 왕을 죽였는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사도세자의 고백> <조선 왕 독살 사건> 등 여러 베스트셀러를 썼다. 새 연재 ‘이덕일의 칼날 위의 역사’는 이 소장의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병폐들을 짚어보고, 탄탄한 관련 사료를 통해 역사에서 그 해답을 구해보고자 한다.

 

세월호 사건 진상 규명을 둘러싼 논란이 급기야 수사권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유족을 비롯한 시민사회세력은 ‘세월호 진상조사위’에 수사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당에서는 국가의 사법 체계 근간을 흔드는 일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할 때 그 해법은 역사 속에서 찾는 것이 좋다.

이 논란에는 현 검찰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 수사권은 물론 기소권까지 독점하고 있는 현재의 검찰이 그 막강한 권한에 맞게 중요한 사건들을 명쾌하게 수사해왔더라면 이런 논란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 민초들에게는 추상같이 엄하면서도 권력 앞에서는 양같이 순했던 것이 검찰의 이미지였기 때문에 이런 수모를 겪는 것이다.

KBS 드라마 에서 정도전이 사헌부를 앞세워 진법훈련에 태만한 지휘관 290명을 문초하고 있다.
“감찰이 왔다는 소리만 들려도 무서워했다”

조선 시대의 검찰 조직에 해당하는 기관이 사헌부(司憲府)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사헌부에 대해 ‘백관(百官)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고 협잡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맡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사헌부는 사간원(司諫院)과 함께 양사(兩司) 또는 대간(臺諫)이라고 불렸는데, 두 기관은 백관에 대한 탄핵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헌부에는 여기에 더해 수사권까지 있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은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大司憲)을 종2품,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을 정3품으로 규정하고 있다. 정1품 영의정과 좌·우의정, 종1품 좌·우찬성을 포함해 1품 관리만 다섯 명이 포진한 의정부에 비하면 직급이 크게 낮은 기관이었다. 그러나 대간의 위세는 대신들도 길에서 사헌부 관리들을 보면 피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당당했다.

조선 후기 사학자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의 ‘관직전고(官職典故)’에서 사헌부 관원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한다고 전하고 있다. 사헌부의 이런 권위는 국가에서 부여한 권한에 사헌부 관료들의 철저한 자기 관리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경국대전> ‘예전(禮典)’에는 5품 하관이 3품 상관에게 절을 해도 상관은 맞절을 하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 그러나 ‘당상관이라도 사헌부·사간원 관리는 우대해서 답례한다’는 예외 조항이 있다. 그만큼 대간을 우대한 것이다.

대간의 자기 처신도 이에 못지않았다. 조정 회의 때 사헌부 관료들은 다른 관료들보다 먼저 들어갔다가 회의가 끝나면 다른 관료들이 모두 나간 후에 따로 나가는 것이 전통이었다. 다른 관료들과 뒤섞여서 회의에 들어오고 나가는 동안 청탁을 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관직전고’는 사헌부 관료에 대해 “편복(便服·평상시에 입는 사복)으로 거리에 나서지 못했고, 친구가 초상이 나서 반혼(返魂·장례 후 신주를 집으로 모심)할 때 장막을 교외에 쳤어도 감히 나가서 곡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친구의 장례식 참석도 꺼릴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사헌부의 내부 기강은 엄격했다. 하루라도 먼저 부임한 선배가 출퇴근할 때는 후배들이 모두 일어서서 예를 표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내부 기강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식의 온정주의나 ‘부처 이기주의’와는 완전히 달랐다. 만약 사헌부 고위 관료가 비리에 연루되면 사헌부 내에서 즉각 탄핵했다. 중종 2년(1507년) 2월2일 사헌부는 새로 대사헌이 된 이점(李)이 과거 경상감사 시절 흰 꿩을 연산군에게 바쳤다면서 “어찌 아첨하여 꿩을 헌납한 자를 풍헌(風憲·사헌부)의 장관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갈기를 청합니다”라고 요청해서 갈아치웠다.

명종 16년(1561년)에는 대사헌 송기수(宋麒壽)가 상소에서 논의된 장본인을 지적해 탄핵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파직시켜야 한다고 요청했다. 송기수의 파직을 요청한 기관이 바로 사헌부였다. 내부 기강은 엄격하지만 비리에 연루되거나 수사를 대충 하면 바로 갈아치워야 한다고 들고일어섰던 것이다. 이렇게 체직된 송기수는 명종 즉위년(1545년)에 발생한 을사사화에 가담해 보익(保翼)공신으로 덕은군(德恩君)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는데도 사헌부는 거침없이 탄핵했던 것이다. 자기 기관의 수장도 거침없이 탄핵하는 사헌부가 다른 기관장의 비리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을 것인가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서 사헌부 감찰(監察)은 정6품에 불과하지만 성현(成俔)이 ‘감찰청벽기(監察廳壁記)’에서 “감찰이 왔다는 소리만 들려도 사람들이 다 몸을 움츠리고 무서워했다”고 전할 정도로 불법에는 추상같았다.

가난한 벼슬 생활 숙명으로 받아들여

예나 지금이나 추상같은 권력은 가난과 동의어다. 사헌부와 사간원은 모두 가난한 기관이었다. <연려실기술> ‘관직전고’는 사헌부에 대해 “심히 맑아서 물력(物力)이 없다”고 말하고 있고, 사간원에 대해서는 “제일 청한(淸寒·맑고 가난함)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간원표피(司諫院豹皮)가 바로 사간원의 청한을 설명해준다. 사간원은 표피 한 장을 여러 아문에 돌려가면서 꾸어주어서 그 돈으로 기관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표피 한 장 값으로 자기네 기관을 운영했으니 얼마나 가난했겠는가. 조선 중기의 문신 이행(李荇)은 ‘사간원계회도(司諫院契會圖)’라는 시에서 “관사가 차다고 표피를 못 빌려주랴/…/세한에도 변치 않길 서로 기약하네(官冷何妨質豹皮/…/歲寒心事要相期)”라고 읊었다. 사간원은 추운 겨울에도 표피를 빌려주어야 겨우 운영되는 기관이지만 세한(겨울)에도 변치 말자는 다짐을 시로 읊은 것이다. 기관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청한한 것이 전통이었다. 이수광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사헌부 감찰에 대해 “남루한 옷에 좋지 않은 말과 찢어진 안장, 짧은 사모에 해진 띠를 착용했다”면서 “비록 귀족이나 명사(名士)일지라도 사헌부의 이런 구규(舊規·관례)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부유한 집안 출신도 사헌부 관료가 되면 가난한 벼슬 생활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전통이 유지되었다는 뜻이다.

이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피혐(避嫌)과 상피(相避)를 엄격하게 적용했다. 본인에게 털끝만 한 하자라도 있을 경우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피혐이다. 성호 이익(李瀷)은 ‘대간을 논하다’에서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관직과 녹봉을 사양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지만 대간만은 한번 사단이 일어나면 죽기를 무릅쓰고 물러난다”라고 대간의 피혐 전통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친족이 유관 부처에 배치되면 둘 중 한 사람이 사직하는 것이 상피였다. 성종 10년(1479년) 대사헌 어세겸(魚世謙)은 동생 어세공(魚世恭)이 병조판서가 되자 “사헌부는 병조의 분경(奔競·벼슬자리 청탁 운동)을 살피고 정사(政事·인사권)의 잘못을 탄핵해야 한다”면서 자신의 면직을 요청했다. 동생이 판서로 있는데 자신이 대사헌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헌부에도 한계가 있었다. 고소가 있어야 수사할 수 있다는 한계였다. 성종 때 공신들이 백성들의 전지(田地)를 빼앗거나 제멋대로 전세(田稅)를 거두어서 말썽이 일었다. 그래서 성종 6년(1475년) 고소가 없어도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자는 의논이 제기되었다. 전지를 빼앗기거나 전세를 더 수탈당한 백성들이 서울까지 올라와서 사헌부에 고소하기는 어려우니 사헌부에서 먼저 인지해 수사할 수 있게 하자는 방안이었다. 공신들 덕분에 왕이 된 성종은 공신들의 의견을 물었고 원상(院相)인 한명회와 정창손은 “앞으로도 전부(佃夫·경작자)로 하여금 사헌부에 고발하게 하여 그 전지를 빼앗고 무거운 벌로 다스리도록 하소서”라고 무제한 수사권에 반대했다. 고소가 있을 경우에만 사헌부가 수사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지금 검찰은 고소가 없어도 수사할 수 있는 무제한 수사권이 법으로 보장되어 있음에도 권력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니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것이 일상이 된 것이다.

사헌부는 어떤 사건이건 철저하게 수사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수사권은 사헌부의 독점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헌부 외에 왕명 사건을 수사하는 의금부(義禁府)가 있었고, 지금의 경찰 격인 포도청(捕盜廳)과 서울시에 해당하는 한성부(漢城府)에도 수사권이 있었고, 법무부인 형조(刑曹)에도 수사권이 있었다. 수사권을 여러 기관으로 나눈 것은 현재 검찰이 보여주고 있는 ‘봐주기 수사’ 같은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사헌부에서 이런저런 사유로 ‘봐주기 수사’를 하는 낌새가 보이면 곧바로 사간원에서 탄핵했다. 그러면 의금부나 형조가 재수사에 나섰다. 그러니 구조적으로 ‘봐주기 수사’ 따위를 할 수 없는 구조였다.

지난 2월24일 대검찰청에서 열린 전국 공안부장검사 회의에서 김진태 검찰총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검찰 수사권 독점은 일제의 잘못된 관행

그러나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견제받지 않으려는 속성을 갖고 있다. 대신들의 자리에서 보면 사헌부·사간원, 즉 대간의 인사권을 장악하려고 할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대간을 살아 있는 권력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다른 문관에 대한 인사권은 이조(吏曹)에 있었다. 그러나 이조의 장관인 이조판서가 대간의 인사권을 장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간의 인사권만은 이조판서나 이조참판이 아니라 국장 격인 이조전랑(吏曹銓郞)에게 주었다. 이 경우 정승이나 이조판서는 이조전랑 자리를 장악하려고 할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이조전랑만큼은 자천제(自薦制)를 실시했다. 이조전랑이 다른 자리로 옮길 때 후임 이조전랑을 천거하는 제도였다. 이때 가장 유력한 천거 기준은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여론이었다. 만약 권력에 빌붙는 비루한 인물을 천거했을 경우 ‘사론에 저촉되어’ 선비사회에서 매장당했다. 말하자면 선비들의 명예를 국가의 청렴을 유지하는 핵심 동력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기 위해 대간에게는 백관에 대한 탄핵권과 수사권을 주면서 대간에 대한 인사권은 이조전랑에게 속하게 했다. 이조전랑 인사권은 떠나는 이조전랑이 행사해서 권력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독립시켰던 것이다. 조선이 숱한 문제점에도 500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권력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또한 권력기관을 서로 견제시켰던 이런 국가 운용의 지혜에 있었던 것이다.

현재의 수사권 독점은 모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만들어진 잘못된 관행으로, 우리 선조들이 나라를 운영하던 철학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율곡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백성들의 신망을 받은 이유에 대해 “대사헌 조광조가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해서 매양 저자에 나가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말 앞에 엎드려, ‘우리 상전(上典·주인) 오셨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지금 수사권과 기소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검찰은 국민들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검찰도 잘못이지만 검찰을 운용하는 정권 자체의 잘못도 그 못지않다. 우리 선조들의 국정 운영 방식을 현재에 되살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검찰이 지금처럼 처신하는 한 수사권 독점은 성역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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