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연예인에게 ‘된장’ 냄새가 난다
  • 정덕현│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4.08.2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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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저리 머무르다 중심인물로…한국 문화 이해 높아져

JTBC <비정상회담>에서 터키 대표로 출연하는 에네스 카야는 인간관계를 주제로 나누는 토론에서 ‘거미줄의 비유’를 사용했다. “거미가 본인을 중심에 놓고 주변에 거미줄을 치듯이” 가깝고 먼 거리를 잘 만들면서 인간관계를 해야 한다는 것. 그가 이야기할 때 게스트로 출연한 조세호는 ‘중심에 놓고’라는 표현에 감탄사를 던졌다. 어찌 보면 쉬워 보이는 표현이지만 외국인의 입에서 나오기 어려운 말이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거미줄 비유’를 그대로 가져와 에네스 카야의 이야기를 반박한 미국 대표 타일러 러쉬의 말이다. “거미가 거미줄을 치는 걸 보신 줄은 잘 모르겠는데 중심부터 치는 건 아니거든요. 거미줄을 칠 때 돌아가면서 언저리부터 하는 거예요.” 즉 “중심이 있는 건 주변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며 주변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 게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그가 ‘언저리’라는 표현을 썼을 때 MC들인 전현무·유세윤·성시경은 모두 찬사를 보냈다.

JTBC 예능 제작발표회에서 한국인 MC와 외국인 패널들이 사진 촬영을 하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프로게이머 기욤 패트리, 방송인 타일러 라쉬, 방송인 전현무, 개그맨 유세윤, 가수 성시경, 방송인 에네스 카야, 방송인 샘 오취리. ⓒ 뉴시스
이는 외국인이 출연해 하나의 안건을 놓고 일종의 토론을 벌이는  <비정상회담>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흔한’ 장면이다. 한참 보다 보면 이들이 과연 외국인인가 한국인인가 헷갈릴 정도로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토론에서도 지적인 느낌을 준다. 이들의 직업을 보면 방송인(샘 오취리), 프로게이머(기욤 패트리), 연기파 배우(에네스 카야), 베이징TV 아나운서(장위안), 유명 자동차회사 딜러(알베르토 몬디), 모델(줄리안, 다니엘), 컨설팅회사 마케팅매니저(다니엘 린데만), 비보이(로빈 데이아나), 아이돌(테라다 타쿠야), 서울대 대학원 석사이자 웹진 편집장(타이러 라쉬) 등 엘리트가 대다수다.

한국 문화의 스펙트럼 다양하게 해 

과거 우리가 흔히 생각했던,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 노동자 하면 영어강사 아니면 단순 저임금 노동자를 먼저 떠올렸지만 지금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선망할 정도로 화려한 직업을 가지고 있다. 출연자의 면면이 이러니 이들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시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은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얻고 있다. 특히 영화 <초능력자>로 익숙해진 터키 대표 에네스 카야나 이미 예능 프로그램에서 자주 얼굴을 보인 샘 오취리는 준연예인급이다.

물론 외국인이 방송에 나오는 것은 그리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로버트 하일이나 이다도시는 특유의 캐릭터(경상도 사투리 쓰는 외국인, 수다 아줌마 외국인)로 한 세대의 인기를 구가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방송 프로그램들이 일제히 외국인을 한 명씩 끼워넣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처럼 되고 있는 건 독특한 현상이다. 이를 촉발시킨 인물은 샘 해밍턴이다. MBC <진짜 사나이>에 출연해 군대 체험을 통해 한국식 ‘구멍병사’의 진면목을 보여주며 ‘외국인 출연자’가 아닌 ‘한국 방송인’으로 거듭났다.

샘 해밍턴 후임으로 <진짜 사나이>에 들어온 헨리는 중국계 캐나다인으로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이다. 그를 보면 지금 현재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글로벌하게 변모했는가를 알 수 있다. 중국계 캐나다인이 SM엔터테인먼트에 소속돼 한국말로 노래 부르며 K팝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다. 또 <진짜 사나이>처럼 그가 결코 할 필요가 없는 군 체험에도 들어가 있다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그저 잠깐 지나가다 머무르는 존재가 더는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그들은 이른바 ‘정주형 외국인’으로 우리 문화의 한 구성원이 되어 있고, 또 한국 문화의 스펙트럼을 더 다양하게, 더 강하게 만드는 요소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이 한국 문화를 배우고, 나아가 그 문화에 빠져드는 모습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SBS <백년손님-자기야>처럼 사위의 강제 처가살이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에 마크 테일러 같은 외국인 사위가 나오게 된 건 우리 사회가 얼마나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는지를 말해준다. 장인이 가르쳐주는 붓글씨로 힘겹지만 한 자 한 자 자기 이름을 우리말로 적어나가는 마크 테일러의 모습이나, 덩치 큰 사위를 마치 친엄마처럼 다독이고 꼭 안아주는 장모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아무런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 외국인이 아니라 그저 사위의 한 사람으로 바라보자 진짜 가족이 되는 모습을 <백년손님-자기야>는 거창한 설명 없이도 시청자에게 공감시킨다.

외국인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우리 문화를 되새겨보게 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 MBC <나 혼자 산다>의 파비앙은 우리보다 더 한국인 같은 캐릭터로 시청자를 사로잡는다. 그가 친구인 줄리안(<비정상회담>에 출연하는 벨기에 대표)의 셰어하우스를 방문해 저녁 장을 본 돈을 더치페이로 나누려 하자 “난 손님인데?”하고 묻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우리 문화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줄리안이 손님 따윈 없다며 우린 다 식구라고 더치페이를 강요하자, 파비앙은 또 “네가 형이잖아”라고 말하기도 한다. 즉 손님을 챙기고 연장자가 밥을 사는 한국 문화를 파비앙이라는 외국인을 통해 바라본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이렇게 된 것은 외국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과거에 우리는 외국인을 훨씬 더 계층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에서 온 외국인에게는 과도하게 친절한 반면, 우리보다 못사는 동남아 등지에서 온 외국인에게는 심지어 천대와 멸시를 할 정도로 낮은 시선을 보냈던 것. 그 양 극점에는 경제적인 잣대에 따른 서열로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우리말을 하는 게 당연시되고 있고, 경제적인 차이가 아닌 문화적인 차이로 외국인을 바라보려는 시선이 생겨나고 있다.

엑소의 중국인 멤버 루한과 미스에이의 중국인 멤버 페이. ⓒ 연합뉴스
K팝 스타는 아시아의 별…기회의 땅 한국 

이는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외국인들에게도 한국이 ‘기회의 나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K팝으로 대변되는 한류가 글로벌해지면서 우리나라의 기획사가 다국적 아이돌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은 가수의 꿈을 가진 외국인에게는 가슴 설레는 일이다. <슈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점점 글로벌 오디션으로 바뀌고 있고, 그래서 미국·일본·유럽 등지에서까지 참가자를 끌어모으고 있는 것 등은 외국인이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말해준다. 결국 할리우드가 전 세계의 배우를 끌어모으고 그 문화까지 섭렵할 수 있는 이유는 그곳이 돈을 벌고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대중문화는 바로 그 글로벌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 한국에서 성공한 인물이나 콘텐츠는 세계에서도 성공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국 내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의 세계화가 경제적인 관점에서 우리 상품을 글로벌하게 해외에 파는 측면에서 이뤄졌다면,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한국 내의 세계화’는 문화적인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 정도 되면 ‘코리아 스탠더드’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다. 모든 분야에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정 분야에서만큼은 우리의 기준이나 문화가 세계적인 어떤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 외국인이 방송에 속속 들어오고 또 맹활약하고 있는 것은 ‘한국 내의 세계화’가 대중문화 저변에서도 이뤄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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