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3. 국왕의 근무 시간에 사생활은 없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09.0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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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행적 공개되고 기록으로 남아…대통령 ‘7시간’ 논란에 교훈

조선 국왕의 일상이 후궁이나 궁녀들과 희롱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드라마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극히 드문 경우다. 조선 국왕의 하루는 파루(罷漏)와 함께 시작한다. 파루란 도성 내의 통행금지 해제를 알리기 위해 종각(鐘閣)의 종을 33번 치는 것인데, 이때가 새벽 4시쯤인 오경삼점(五更三點)이다. 33번 치는 것은 제석천(帝釋天)을 이끄는 하늘의 33천(天)에게 하루 동안 나라가 편안하기를 빈 것이었다. 조선이 비록 유교 국가지만, 나라만 편안하다면야 공자면 어떻고 석가면 어떠냐는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밤 10시쯤 통행금지를 알리는 종을 치는 것을 인정(人定)이라고 하는데, 28번 치는 것은 28수(宿)의 별에 밤의 안녕을 비는 의미였다.

세자 시절 혹독한 수업으로 ‘준비된 임금’

기침 후 간단한 죽 등으로 요기를 한 국왕이 가장 먼저 시작하는 일과는 대비전에 문안을 드리는 것이었다. 군주는 나라 안 모든 사람의 스승이자 모범이어야 했으므로 효(孝)에서도 모범을 보여야 했다. ‘효자 집안에서 충신이 난다’는 말처럼 부모에게 효도를 권장하는 것은 나라에 충성을 권장하는 길이기도 했다. 대비전 문안 후 아침 식사를 마치면 조강(朝講)을 해야 했다. 경연(經筵)의 일종인 조강은 학문에 밝은 유신(儒臣)들과 학문·시사를 논하는 자리로서 학술토론회 겸 정책토론회 자리였다. 아침에 하는 조강, 점심때의 주강(晝講), 저녁때의 석강(夕講)에, 때로는 밤중에 하는 야강(夜講)도 있었다. 경연은 대략 1시간 정도 걸리지만 더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조선 12대 임금 인종(仁宗·재위 1544~1545년)의 묘지문에는 “하루에 세 번 경연에 나아갔으며 또 야강이 있었는데, 비록 매서운 추위나 맹렬한 더위에도 종일토록 바로 앉아 배운 것을 익히고 또 익혔으며, 아침이 되면 또 한두 번 읽고 나가는 것을 일과로 삼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정조 같은 경우는 사강(射講)도 했는데, 사강이란 문무관들과 함께 활쏘기를 하는 것이었다. 문약(文弱)을 극복하고 상무(尙武) 정신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의 왕은 아침마다 관료들과 조정에서 만나는 조회에 참석했다. 상참은 왕의 일과에서 첫 번째 공식 일정이다. 사진은 영화 의 한 장면.
조강이 끝나면 아침 10시쯤부터 조회(朝會)를 하는데, 조참(朝參)과 상참(常參)이 있었다. 조참은 한 달에 네 번 정전(正殿)에서 열리는 정식 조회고, 상참은 매일 열리는 약식 조회다. 상참이 끝나면 윤대(輪對)를 하는데 각 부서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임금에게 직접 현안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는 것이었다. 임금은 정승이나 판서 같은 고위직만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은 ‘동반(東班:문관) 6품 이상과 서반(西班:무관) 4품 이상은 각각 관아의 차례에 따라 매일 윤대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으니 지금으로 치면 각 부서의 과장 정도나 그 이하 직급의 실무자들이었다. 윤대는 상당히 세밀한 내용을 다루기 때문에 국왕의 건강을 우려해서 매일 보고하는 인원은 5명 이하로 제한했다. 실무자들과도 매일 만나니 국정의 모든 현안에 대해 손바닥 보듯이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점심 식사를 마치면 다시 주강에 나가는데, 재미있는 것은 세종·성종·정조 등 경연에 열심이었던 임금들이 대부분 성공한 임금이란 점이다. 그만큼 성공한 국왕의 필수 조건이 지식경영이라는 방증이다. 성종은 대비와 공신들 덕분에 친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왕이 되었으므로, 부족한 자신의 정통성을 경연으로 메우려 했다. 성종 재위 1년(1470년) 6월5일의 일이다. 날이 매우 무덥자 원상(院相) 김질이 “때가 마침 혹독하게 더운데 하루에 세 번이나 경연에 나가는 것은 성체(聖體)가 피로할까 염려되니 주강은 정지하시고, 또 석강은 편복(便服·일상복)으로 하시라”고 제안했다. 성종은 “내가 촌음(寸陰)도 아까워하는데 어찌 주강을 정지하겠는가? 또 조신(朝臣)을 어찌 편복을 입고 접견하겠는가?”라고 거절했다. 이때 성종의 나이 겨우 만 열세 살이었다.

주강 이후에는 다시 관료들을 접견하는 자리가 이어진다. 지방으로 가는 관원들과 중앙으로 올라오는 지방관을 만나 해당 지방의 현안을 묻거나 지방 사정을 들었다. 이처럼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업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준비란 세자 시절부터 익히는 것이었다. 정조는 세자 시절의 일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춘궁(春宮·동궁)에 있을 적에 교유했던 빈료(賓僚·시강원 관료) 중에는 경학(經學)으로 이름난 선비가 많았다. 매번 선왕의 침수(寢睡·잠자리)를 여쭙고 수라상을 살피는 틈틈이 이들과 아침저녁으로 만나서 토론했다. 또 방 하나를 깨끗이 청소한 다음 차분히 궁리격물(窮理格物)의 학문을 공부했는데, 어떤 때는 종일토록 꿇어앉아 공부했다. 그 때문에 입고 있던 바지가 닳아 헐기까지 했는데 이 일이 지금까지 궁중에 전해져오고 있다. 내가 처음에 기대했던 바는 반드시 요순(堯舜)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었다.”(<홍재전서>, 163권 ‘일득록(日得錄)’)

왕도를 익히는 이유는 최고의 성군으로 추앙받는 요순 같은 임금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 정도로 노력해야 ‘준비된 임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요즘 아무에게나 ‘준비된 대통령’ 따위의 말들을 붙이는 것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조선시대 경연이 벌어졌던 사정전. ⓒ 연합뉴스
정조, 조회 늦을까 봐 침실 근처에 닭 길러

신료 접견이 끝나고 나면 군사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궐내에서 숙직하는 신료들의 명단과 대궐을 호위하는 군관들의 명단을 확인하는 일이다. 매일의 암호는 국왕이 직접 결정했다. 언적(言的) 또는 군호(軍號)라고도 하는 암호는 군사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암호는 매일 신시(申時·오후 3~5시)에 입직한 병조(兵曹)의 참의(參議)나 참지(參知)가 석 자 이내로 밀봉(密封)해서 올리면 임금이 가부 여부를 결정했다. 숙종 10년(1684년) 10월24일 병조에서 군호를 올렸는데, 숙종은 필체가 예전과 다르다고 느꼈는지 병조 참의가 직접 쓴 것인지 물었다. 참의가 늙고 병들어서 승정원에서 대서(代書)했다고 보고하자 숙종이 화를 냈다. “군중(軍中)의 모든 일은 엄중하게 비밀을 지키는 데 힘써야 하므로 군호 두 글자는 기성(騎省·병조) 당상(堂上)이 반드시 직접 쓰고, 후사(喉司, 승정원)에서도 떼어 보지 못하게 했는데, 이는 간사함을 막기 위한 것이다.”

숙종은 병조 참의 유거(柳)가 군호를 대서시킨 것은 사태가 심히 해괴하다면서 파직하고 군호를 다시 써서 올리라고 명했다. 이렇게 그날 밤의 암호까지 결정하고 나면 대략 오후 5시 정도가 되는데 이때가 새벽에 출근한 승지들의 퇴근 시간이기도 하다. 정조는 “승지들이 새벽에 출근해 신시(申時)에 퇴근하는 것도 힘든 노고지만 나와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숙직하는 입직(入直) 승지를 제외한 나머지 승지들은 퇴근길에 주막에 들러 한잔할 수도 있지만 국왕에게는 또 다른 일정이 있었다. 바로 석강이었다. 석강이 끝나면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한 번 대비전에 나가서 잠자리 문안 인사를 드려야 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때부터 을람(乙覽)을 했다. 국왕의 독서를 을람이라고 하는데, 을야(乙夜·밤 9~11시)에야 제왕에게 독서할 시간이 난다는 뜻이다.

정조 때의 문신 윤행임(尹行恁)이 ‘임금께서는 행여라도 조회에 늦으실까 봐/ 침실 동쪽에 장닭을 기르시네(宸心或恐朝儀晏 燕寢東頭養報鷄)’라는 춘첩(春帖)을 지어 올렸듯이 정조는 침실 근처에 횃대를 설치하고 닭을 길렀다. 조회에 늦을 것을 염려해서다. 정조는 이 시를 보고 “나는 촛불 아래에서 상소나 장계, 혹은 옛사람의 글을 읽다가 밤늦게 자리에 들어 날이 새는지를 모를 때가 있으므로 횃대를 설치해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니 그대 말이 사실이다.”(<홍재전서> 162권, ‘일득록(日得錄)’)라고 시인하면서도 “근래 시종신(侍從臣·측근 신하)들이 옛사람처럼 붓을 들어 규간(規諫·간쟁)하지는 못할지언정 도리어 아첨하는 뜻이 있으니 내 어찌 이를 좋아하겠는가”라고 훈계했다. 시종신이라면 쓴소리를 해야지 왜 아첨하는 뜻을 보이느냐는 말이었다. 정조는 쓴소리가 국정 운영에 좋은 약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쓴소리를 국정의 동력으로 삼을 줄 아는 국왕이나 대통령에게 ‘성공한’이란 수식어가 붙는 것이다.

이처럼 초인적 의지로 국정을 수행하던 정조가 정작 강조한 것은 자기반성이었다.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편찬한 국왕의 일기가 <일성록(日省錄)>이다. 정조는 <일성록>을 편찬하는 이유에 대해 “증자(曾子)가 매일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했다는 교훈은 학자의 실천 공부에 가장 긴요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교훈을 가슴에 담아왔다”(‘일득록’)라고 말했다. 공자의 제자 증자의 ‘일일삼성(一日三省)’은 “남을 위해서 일하는 데 정성을 다했는가? 벗들과 사귀는 데 신의를 다했는가? 배운 가르침을 실천했는가?(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여기에 더해 “밤에는 하루의 일을 점검하고, 한 달이 끝날 때면 한 달 동안 한 일을 점검하고, 한 해가 끝날 때면 한 해 동안 한 일을 점검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실천하니 정령(政令)과 일 처리 과정에서 잘한 것과 잘못한 것, 편리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마음속에 깨닫게 된다. 이 역시 날마다 반성하는 한 가지 방도다”(<홍재전서> 161권 ‘일득록’)라고 말했다.

가토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8월18일 한국 검찰에 출석하고 있다. 그는 ‘세월호 침몰 당일 7시간가량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내용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사생활 의혹을 제기해 국내 한 시민단체로부터 고발당했다. ⓒ 시사저널 규윤성
국왕 일상은 늘 승지·사관이 함께해

중요한 것은 이런 국왕의 일과가 모두 공개된다는 점이다. 국왕의 일상에는 늘 승지와 사관이 함께했다. 정조는 “옛날 임금들은 외조(外朝)에는 국사(國史)를 두고 내조(內朝)에는 여사(女史)를 두었고, 거동은 좌사(左史)가 쓰고 말은 우사(右史)가 썼는데, 임금은 숨기는 것이 없음을 보이고 모범과 감계를 밝히려는 이유에서였다”(<홍재전서> 182권, ‘군서표기(群書標記)’)라고 말했다. 국왕의 모든 행적은 공개되고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세월호 사고 발생 당일 대통령의 알려지지 않은 7시간의 행적이 세간의 주목거리다. 조선 국왕에게 사생활이 없었듯이 대통령에게도 근무 시간에는 사생활이 없어야 한다. 정조는 임금의 역할에 대해 하늘의 일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戰時)보다 그 중요성이 조금도 덜하지 않았던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국민은 알 권리가 있다. 조선 같으면 이런 논란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다. 국왕의 동정은 공개가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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