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등골 휘는 주부들 “독일 엄마들 부러워”
  • 강성운│독일 통신원 ()
  • 승인 2014.09.0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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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주부 ‘번아웃’ 해법으로 등장한 ‘어머니 요양원’

대체휴일제 시행으로 올해 추석 연휴는 총 5일로 늘었다. 꿀맛 같은 황금연휴가 죽을 맛인 사람이 있다. 연휴 내내 허리 한 번 펼 새 없는 주부들이다. 이들에게 5일간의 추석 연휴는 5일 내내 이어지는 ‘명절 특근’과 다름없다. 그렇게 일해도 월급은 고사하고 고생했다는 소리 한 번 듣기 어렵다. 한숨을 쉬며 남은 제사 음식을 냉동실에 포개 넣던 주부들은 문득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진다. 그러나 남편과 아이를 두고 먼 길을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돈도 돈이지만 여자 혼자 갈 곳도 마땅치 않다. 결국 그들은 여행 트렁크 대신 목욕 가방을 챙겨 동네 찜질방으로 향한다.

이런 한국의 어머니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곳이 있다.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은 얼마 전 ‘어머니 요양원’을 소개했다. 라인 강 지역에 거주하는 안체 베커(가명)는 얼마 전 남편과 두 아이를 두고 집을 떠났다. 알프스 산자락에 위치한 베르타크로 3주간 혼자 요양을 갔다. 베커는 지난 몇 년간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 8세·5세인 두 아이를 키우느라 정신없이 바빠 자신을 돌볼 새가 없었다. 몸에도 이상 신호가 왔다. 신경성 장염이 생기더니 온몸의 진이 빠지고 만성피로가 몰려왔다. 사소한 일에도 벌컥 화를 냈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는 지역 상담소 문을 두드렸고 이곳 요양원으로 오게 됐다. 이곳에서 그는 주 2회 운동치료와 심리치료를 받으며 조용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되돌아봤다. 예정돼 있던 남편과 아이들의 방문은 취소했다. 일단은 거리를 두는 게 자신에게 더 좋다는 판단을 내려서다. 그는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고 내가 요구하는 게 뭔지 다시 알게 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독일 MGW가 운영하는 ‘어머니 요양소’에서 요양자들이 노르딕 워킹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 Muttergenesungswerk
“자존감 회복하고 고립감 떨치는 게 목표”

‘어머니 회복 운동(Muttergenesungswerk· MGW)’은 1950년, 당시 서독의 대통령 부인이던 엘리 호이스-크납이 주창한 사회 운동이다. 이 운동의 목적은 어머니들의 건강 회복을 도모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어머니 요양소가 생겼다. 처음엔 세 군데뿐이었지만 현재는 북해의 암룸에서부터 남부의 알고이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 77곳 중 요양자가 원하는 곳을 선택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아이를 동반할 수 있는 ‘어머니-자녀 요양’ 제도도 도입됐다.

추석 연휴를 열흘 앞둔 8월26일, 시사저널은 페트라 게어스트캄프 MGW 부대표와 인터뷰를 가졌다. “어머니들은 누구나 이런 문제를 겪는다”고 말문을 연 그녀는 “지친 상태가 이어질 때, 주어진 일 전부를 해내지는 못하겠다는 두려움이 생길 때, 뒷목과 허리가 뻣뻣하게 느껴질 때 등 번아웃(소진 증후군)의 징조가 있다면 요양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작 그 정도로 요양까지 가느냐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어머니 요양은 재활이 아닌 예방 차원에서 이뤄진다. 치료보다 예방이 더 경제적이기 때문에 보험사들도 어머니 요양을 지원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번아웃’은 말 그대로 일에 지쳐 심신의 기운이 마치 다 타버린 듯 없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심리학 용어다. 만성피로와 의욕상실 등 심리적 문제뿐 아니라 불면증, 성기능 저하, 심장·소화기관 이상이나 두통, 체중 변화 등 몸의 이상을 초래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번아웃은 격무에 시달리고 회식 자리에 끌려 다니는 등 고문에 가까운 회사생활을 하는 직장인들만의 문제로 여겨진다. 반면 전업주부의 고통은 가볍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가사와 양육 노동의 가치를 저평가하는 통념 탓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최근 몇 년간 번아웃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실적 압박을 받는 샐러리맨은 물론 취업 준비생과 학생, 전업주부도 번아웃을 겪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실제로 2012년 어머니 요양 참가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복수 응답 가능)를 실시했는데 ‘번아웃, 두려움, 불면증, 우울증세, 급성 스트레스 장애 등 심리 장애와 행동 장애’로 요양을 결심한 사람의 비율은 82%로 2위인 ‘근골계 및 관절 질환’(40%)을 압도했다. 요양 프로그램 참가자 중 24%가 전업주부였다.

게어스트캄프 부대표는 어머니 요양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어머니들의 회복을 돕기 위한 통합적인 치료’를 꼽았다. 몸의 이상뿐 아니라 자녀와의 갈등 등 어머니들이 겪는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요양 기간 동안 의사와 전문 치료사들은 심리치료와 운동치료 등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회복지사들은 자녀 양육 문제에 대해 조언한다. 체중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영양사의 도움을 받아 건강한 식단을 제공받을 수 있다. 개인의 필요를 반영한 요양 프로그램은 각 영역 전문가들이 협의해 구성한다.

자존감을 회복하고 고립감을 떨치는 것 역시 어머니 요양의 중요한 목표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요양객은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그림 그리기나 만들기 등 창조적인 활동을 한다. “만남을 통해 ‘나만 이런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 손으로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경험을 통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게 게어스트캄프 부대표의 설명이다. 이렇게 엄마들은 요양원에서 온전히 ‘나’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보낸다. 그가 부드러우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많은 참가자들이 요양을 통해 인생을 재정립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머니 요양에는 1인당 평균 2500~3000유로(350만~420만원)가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적 형편 때문에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여성은 없다. 하루 10유로(약 1만4000원)의 자기 부담금만 내면 나머지는 보험회사가 부담한다. 형편이 곤란할 경우에는 MGW가 조성한 기부금에서 지원받을 수 있다. 보험사가 승인을 거부하면 지역 사무소가 이의신청을 하도록 적극 돕는다. 이 덕분에 지난 한 해에만 4만9000명의 주부가 어머니 요양과 어머니-자녀 요양 혜택을 누렸다.

‘아버지-자녀’ 요양까지 범위 확대

지난해부터 MGW는 ‘아버지-자녀’까지 요양 범위를 확대했다. 몇 년 전부터 수요가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 남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과 가정 문제 해결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첫해 참가자는 1100명으로 여성에 비해 45분의 1 수준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아버지-자녀 요양에 대한 수요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모두가 탈진하는 ‘번아웃 시대’에 독일이 내놓은 해법은 허탈하리만치 간단하지만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가사 노동과 자녀 양육도 노동이고, 힘들면 충분히 쉬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아내-엄마, 남편-아빠라는 역할에서 잠시 벗어나 ‘나’를 찾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올 추석 연휴 중 단 하루라도 각자를 찾는 시간을 보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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