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4. 새정치연합 분열, 조선 당파 싸움 빼닮아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09.17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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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온파 대립, ‘청남’과 ‘탁남’ 갈린 남인의 당쟁 복사판

요즘 제1야당이라고 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지리멸렬을 두고 말이 많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는 억울한 점도 있겠지만, 필자의 눈에 지금 새정치연합의 행태는 조선 후기 숙종 때의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의 분열을 떠올리게 한다. 청남과 탁남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 당파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조금 복잡하지만 조선의 당쟁사를 일견(一見)해보자.

조선의 사색당파를 대략 개관하면, 선조 8년(1575년) 이조전랑(吏曹銓郞)에 대한 인사권 문제로 사림(士林)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지는 데서 시작한다. 동인은 선조 24년(1591년)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둘러싸고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진다. 서인은 계속 한 울타리 속에서 지내다가 숙종 9년(1683년)에 이르러 남인에 대한 정치 보복을 찬성하는 ‘노론(老論)’과 이에 반대하는 ‘소론(少論)’으로 갈라진다. 그래서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이란 사색당파가 형성된다.

조선 숙종 때 서인과 남인의 당쟁은 극에 달했다. 사진은 숙종 때의 당쟁을 다룬 SBS 드라마 의 한 장면.
조선 후기 당쟁은 서인 대 남인의 대결

조선 후기 내내 집권당의 지위를 차지했던 것은 광해군 15년(1623년) 인조반정을 일으켰던 서인이다. 서인은 쿠데타를 통해 임금이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 때 집권당이던 북인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때 북인의 씨를 말릴 정도로 가혹한 정치 보복이 이어졌다. 그러나 인조반정에 대한 세간의 반응이 싸늘하자, 동인의 또 다른 축인 남인들은 체제 내 야당으로 남겨뒀다. 그래서 조선 후기 당쟁 구도는 서인(노론)과 남인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체제 내 야당이었던 남인들이 ‘예송(禮訟) 논쟁’을 계기로 정국의 주체로 나서면서 당쟁이 치열해졌다. 예송 논쟁은 두 차례 전개되었다. 효종(孝宗·재위 1649~1659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생존해 있던 인조(仁祖·효종의 아버지)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1724~1688년) 조씨가 상복을 얼마 동안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제1차 예송 논쟁이다. 기해년에 발생했다 해서 ‘기해예송’이라고도 한다. 15년 후인 현종 15년(1674년), 효종의 부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도 시어머니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논쟁이 발생했다. 이것이 제2차 예송 논쟁인데, 갑인년에 발생했다고 해서 ‘갑인예송’이라고 부른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상복 착용 기간을 두고 조정대신들이 싸운 것을 두고 폄하하기도 했지만, 이는 조선의 전통을 비하하기 위한 비난에 불과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7세기 때 사이메이(齊明) 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세자가 여왕의 상(喪)을 받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에서 예송 논쟁이 발생한 지 80여 년 후인 1736년 일본에서도 부모나 조부모의 상에는 50일의 기(忌)와 13개월의 복(服)을 입게 하는 등 6단계에 걸친 복제와 상복 착용 기간을 규정한 복기령(服忌令)을 제정했다.

예송 논쟁은 복잡한 이론 구조를 갖고 있어 여기에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간단하게 분류하면, 서인들은 조선 왕가에 박한 상례를 주장한 반면, 남인들은 후한 상례를 주장했다. 1차 예송 논쟁 때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들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1년복인 기년복(朞年服)으로 하자고 주장한 반면, 허목과 윤휴를 필두로 한 남인들은 3년복인 참최복(斬衰服)을 주장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서인들이 조선 왕실에 박한 상례를 고집한 이유는 극도의 친명(親明)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서인들은 조선을 명나라 황제의 제후국으로 스스로 낮춰 여겼다. 그러다 보니 왕가의 예법이 아니라 사가(私家)의 예법을 적용해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는 이유로 1년복을 주장한 것이었다. 윤휴와 가까웠던 취규(就規) 이류가 송시열 등이 주장하는 1년복에 대해 “그것은 사서가(士庶家)의 예법”이라고 비판하고, 남인 윤선도도 상소를 올려 “사가에서도 조종(祖宗)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으면 참최 3년복을 입는데 하물며 국가는 말할 것도 없다”(<현종실록> 1년 4월18일)라고 비판한 것은 당연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집권당인 서인들의 집중 공격에 의해 윤선도는 하마터면 사형에 처해질 뻔하다 겨우 귀양으로 낙찰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15년 후인 현종 15년(1674년)에 발생한 2차 예송 논쟁 때도 송시열 등 서인들은 남인들의 1년복 주장을 일축하고 자의대비가 9개월복인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그러나 만 일흔 살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대구에서부터 걸어와 9개월복의 문제점을 강하게 반박하는 상소를 올리자 크게 깨달은 현종은 정권을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남인 허적을 영의정으로 발탁하는 등 정권 교체를 단행하던 현종이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열세 살 된 어린 숙종이 즉위할 수밖에 없었다.

남인 중에 개혁·강경파는 ‘청남’으로 불려

어린 숙종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부왕의 유지를 계승해 정권 교체를 단행하고자 했다. 만 쉰여덟의 남인 강경파 윤휴를 조정에 출사시켰던 것이다. 윤휴가 늦은 나이에 출사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벌(北伐)이었고, 또 하나는 극심했던 신분제와 빈부 격차를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들 남인 강경파를 ‘청남(淸南)’이라고 불렀다. 윤휴를 비롯한 청남의 북벌 주장은 허황된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 남방에서 오삼계(吳三桂)를 필두로 한 삼번(三藩)의 난이 일어나 양자강 이남이 쑥대밭이 되었기 때문이다. 윤휴 등은 이때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올라가면 병자년의 치욕을 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노론에서 작성한 <숙종실록> 사관이 “윤휴가 겉으로 오랑캐를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사했기 때문에 이런 고담(高談)을 강하게 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가리는 것이지 참된 말이 아니다”라고 비난한 것은 그간 말로만 북벌을 외쳐왔던 서인들의 쓰린 속내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오른쪽 두 번째)를 비롯한 지도부가 9월5일 서울 용산역에서 시민들에게 홍보물을 배포하며 귀향 인사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규윤성
나아가 청남은 실제로 북벌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 내부에서 대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 백성의 힘을 모아 북벌에 나서기 위해서는 조선 내부의 모순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양반들로부터 극도의 차별을 받는 서자(庶子)·상민(常民)·천인들이 즐거이 전쟁에 나설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윤휴는 대대적인 개혁을 주창하고 나섰는데 이를 대변통(大變通)이라고 한다. 윤휴로 대표되는 청남은 양반 사대부만이 응시할 수 있었던 무과(武科) 응시 자격을 철폐해서 누구나 응시할 수 있는 만인과(萬人科)를 실시했다. 또한 신분에 따라 상아나 뿔, 나무로 만든 신분증을 차는 차별적인 호패법(號牌法) 대신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가 다 종이로 만든 신분증을 지니는 지패법(紙牌法)을 시행했다. 더구나 그동안 병역 의무에서 면제되었던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했다. 조선은 중종 이후 1년에 2필씩 군포(軍布)를 납부하는 것이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는데, 상대적으로 재산이 많은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고 가난한 상민들만 납부해왔다. 호포제는 이런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걷겠다는 것이었다.

서인 정권에 참여한 남인은 ‘탁남’ 분류

그러자 양반 사대부의 계급 이익을 수호하려는 서인들이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문제는 남인들 중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남인이 분열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청남’과 ‘탁남’(濁南)의 분열이었다. 탁남은 몸은 남인에 속해 있었지만 정신은 서인과 마찬가지였다. 남인의 분열은 강경파 윤휴의 대변통 강행 그 이전으로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실록> 사관은 남인의 분당에 대해 “윤휴 등도, ‘선조(先朝·현종) 때에 청현직(淸顯職·중요한 요직)을 지낸 자들은 비록 동색(同色·같은 당파)이라도 다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숙종실록> 1년 4월14일)고 전하고 있다. 남인이 본격적으로 나뉘는 것은 윤휴 등이 사회의 여러 현안에 대해 대변통을 주창했을 때지만 이미 15~16년 전의 제1차 예송 논쟁 때 분열의 싹이 텄다는 것이다. 조선 왕통을 부인하는 1년복 시행을 주장하는 서인 정권에 참여한 남인들의 의리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는 뜻이다. <숙종실록> 사관은 또 “윤휴 등은 스스로 청남(淸南)으로 일컬었고, 허적과 권대운 등의 무리는 선조(先朝·현종) 때 높은 벼슬을 한 자가 많았다 하여 탁남(濁南)이라 일렀다”(<숙종실록> 1년 6월4일)라고 말하고 있다. 현종 때 높은 벼슬을 한 남인들을 오염된 인물이란 뜻에서 탁남이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현종은 즉위 당시 만 열여덟 살에 불과했던 반면, 윤휴는 만 마흔둘의 중년 선비였다. 현종 때 출사하지 않겠다는 뜻은 살아생전 출사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때가 되면 나아가서 도(道·정치)를 펼치고 때가 아니면 돌아와서 학문을 닦는 선비들의 출사관(出仕觀)을 실천하려 한 셈이다. 숙종 즉위 직후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윤휴는 강한 대개혁의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러자 서인은 물론 남인 내 탁남에서도 반대의 목소리가 비등했다. 모든 백성이 신분에 관계없이 종이로 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하자는 지패법에 대해 탁남의 영수 허적은 “지패는 거리끼는 일이 있으니 사대부가 상한(常漢·상놈)의 거느림 아래 들어가게 되어 일이 매우 불편합니다”(<숙종실록> 3년 3월1일)라며 서인의 반대 주장에 가세했다. 다섯 집안에서 한 명씩의 통수(統首)를 선발해서 지패 위에 쓰고 그 아래 본인의 이름을 쓰게 되어 있는데, 만약 양반이 아닌 상민이 통수가 되면 양반 이름이 상민 아래 들어갈 수도 있다는 반발이었다.

탁남은 사실상 서인과 같은 정견을 갖고 있었다. 비록 김수홍 등 서인 일부에서 청남을 지지하고 나섰지만, 사대부들 사이에서 청남은 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숙종 6년(1680년) 삼번의 난이 오삼계의 패배로 끝나가자 숙종은 북벌을 주장하던 당파 남인을 내치고, 다시 서인에게 정권을 주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단행했다. 서인들은 곧바로 정치 보복에 나서 아무 죄도 없는 윤휴를 죽였다. 그리고 탁남의 영수 허적도 아들 허견이 역모를 꾸몄다고 정치공작을 해 사형시키고 말았다. 서인들은 청남은 물론 탁남도 모두 제거했다.

현재 새정치연합의 가장 큰 문제는 남인인지 서인인지 스스로 헷갈려 하고, 하나의 남인으로서 힘을 합쳐야 함에도 청남이니 탁남이니 하며 분열을 조장하고 패거리 문화를 일삼는 계파 분열이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여당에 맞서는 축을 형성하지 못하고 늘 지리멸렬하는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우고 대의를 위해 힘을 합치는 것이 집권의 첫걸음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지금의 새정치연합에는 통하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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