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무대에서 왕초 되는 게 낫겠지
  • 이은선│매거진M 기자 ()
  • 승인 2014.09.24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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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성 영화 선정되려 진땀 입소문 마케팅에서 유리

올해 영화계의 두드러진 경향 중 하나는 다양성 영화의 선전이다. 지난해에 비해 시장 규모가 눈에 띄게 커졌다. 2013년 다양성 영화 흥행 순위 상위 10편의 관객 수는 총 112만명이었다. 올해는 이미 400만명을 훌쩍 넘겼다. 중심에는 음악영화 <비긴 어게인>이 있다. 이 영화는 9월 중순까지 2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며 올해 다양성 영화 흥행 순위 1위에 올라 있다. 올해 초 다양성 영화 시장의 최고 화제작으로 부상하며 ‘아트버스터’(예술영화와 블록버스터의 합성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시킨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호텔>(77만명)을 단숨에 2위로 끌어내렸다.

1500만명 이상이 본 <명량> 같은 영화도 있는데 200만 관객을 모은 것이 뭐 대수냐고? 전년도 상황과 비교하면 이것이 얼마나 ‘사건’에 가까운 수치인지 뚜렷하게 가늠할 수 있다. 2013년 다양성 영화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했던 우디 앨런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는 관객 18만명을 모으는 데 그쳤다. 심지어 <비긴 어게인>은 인기에 힘입어 ‘순위 역주행’ 중이다. 9월17일에는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서 예매율 20.9%를 기록하며 <타짜-신의 손> 등 쟁쟁한 신작을 제치고 예매 순위 1위로 올라섰다. <비긴 어게인>이 예매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은 개봉(8월13일) 이후 처음이다.

영화 ⓒ 판씨네마㈜
사실 <비긴 어게인> 흥행 이유는 단순하다. 잘 만든 음악영화이기 때문이다. <원스>(2006년)를 연출한 존 카니 감독 신작으로, 싱어송라이터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와 그의 능력을 알아본 음반 프로듀서 댄(마크 러팔로)의 이야기다. 실연과 커리어 실패의 상처를 안고 있던 그레타와 댄은 의기투합해 음반을 제작하고 그 과정에서 음악은 이들의 훌륭한 소통 도구가 된다. 그레타와 댄이 만든 음악은 그들 자신과 주변까지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존 카니 감독은 <원스>와 마찬가지로 좋은 음악에 어렵지 않은 스토리를 엮어 감성적으로 소구할 만한 작품을 내놓았다. OST(오리지널 사운드 트랙)는 굳이 영화와 연관 짓지 않더라도 음악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대표곡인 <로스트 스타즈(Lost Stars)>는 개봉 직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음원 다운로드 사이트 실시간 순위 상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관객의 호감을 살 구석이 충분한 만큼 개봉 직후 금세 입소문이 퍼진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다양성 영화로 포장된 <비긴 어게인>

이 영화를 둘러싸고 지금 상황에서 가질 수 있는 의문이라면 차라리 다음과 같은 것들이 적당하다. 왜 이 영화는 ‘다양성 영화’라 불리는 걸까. 상업영화와 굳이 범주를 다르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전에, ‘다양성 영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쉽게 말해 다양성 영화란 일반 상업영화와 구분되는 비주류 영화를 아우르는 용어다. 2007년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여러 관련 사업에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공식화됐다. 영진위는 심사를 통해 다양성 영화를 선정한다. 미학적 가치가 뛰어난 작가영화, 소재와 주제 등에서 기존 영화와는 다른 특색을 보이는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 국내에서 거의 상영된 적 없는 개인·집단·사회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문화 다양성의 확대에 기여하는 작품, 예술·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가치가 있는 재개봉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 개봉 규모도 중요하다. 개봉 당시 200개 이상의 상영관에 걸리는 영화는 다양성 영화로 인정받을 수 없다. 결국 종합하면, 다양성 영화란 ‘상영 규모가 작고 다양한 주제와 형식을 가진 영화가 관객과 만날 기회를 넓히는 취지에서 출발한 개념’인 것이다. 이른바 ‘종(種) 다양성’에 뿌리를 둔 개념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영진위가 영화진흥공사 시절이던 1997년 독립영화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좋은 영화 지원제도’ 같은 정책과도 맥이 닿는다고 볼 수 있다.

인기 배우가 출연한다고 해서 다양성 영화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을 맡은 <비긴 어게인>이 대표적인 사례다. 케이트 블란쳇이 출연한 <블루 재스민>

(2013년)이나 장쯔이가 출연한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2013년) 역시 다양성 영화였다. 영화의 국적도 크게 관계없다. 최근에 이야기되는 다양성 영화가 주로 외화였을 뿐 한국 영화 역시 다양성 영화로 분류될 수 있다. 올해 다양성 영화 관객 수 상위 10편에는 한국 영화 3편이 포함돼 있다. <신이 보낸 사람>(42만명), <한공주>(22만명), <도희야>(10만명)가 그것이다. 심지어 역대 다양성 영화 흥행 순위 1위가 한국 영화다. 2009년 개봉한 <워낭소리>가 세운 293만명의 기록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다양성 영화라는 구분은 왜 필요할까. 다양성 영화로 인정받으면 예술영화전용관 상영에 유리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연간 상영 일수의 60%는 의무적으로 다양성 영화를 상영하는 곳으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다. 서울아트시네마, 시네코드선재, 아트하우스 모모 등 극장이 이에 해당한다. 예술영화를 소비하는 ‘헤비 유저’ 관객이 선호하는 극장인 만큼 예술영화전용관에서 상영하면 관객의 입소문 역시 빠르다. 영화계 수입 관계자들은 “어차피 광고와 상영관 규모 면에서 엄청난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블록버스터와는 경쟁을 펼칠 수 없기 때문에 다양성 영화로 인정받아 입소문을 타는 게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박스오피스 문제도 이와 직결된다. 한 영화 수입 관계자는 “전체 박스오피스 순위로 경쟁하면 30위권 밖으로 훌쩍 밀려날 영화도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내에서는 2~3위에 든다.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고 알리는 편이 마케팅 면에서 훨씬 수월한 셈”이라고 말했다.

영화 ⓒ 무비꼴라쥬
다양성 영화 선정 기준에 회의적 시각도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양성 영화 시장 안에서도 상영관 확보 경쟁이 치열하다. 최근에는 리마스터링 재개봉 작품과 IPTV 흥행을 노린 저예산 영화까지 다양성 영화 시장에 뛰어들면서 상영관 자리다툼이 더욱 치열해졌다. 인지도가 높은 배우가 출연하는 다양성 영화가 더욱 수월하게 상영관을 확보하는 식이다.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양극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다양성 영화로 인정받아 개봉관을 확보한다 해도 상영 시간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전국에서 딱 한 곳의 상영관에, 그것도 오전 시간에 단 한 차례 상영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비긴 어게인>의 경우 북미에서 독립영화(Independent Film)로 구분됐고 배급을 맡은 와인스타인 컴퍼니는 5개의 상영관에서 출발해 관객 반응을 보고 개봉 3주 차에 900개 이상의 상영관으로 확대하는 방식을 썼다. 엄밀히 국내에서 다양성 영화로 구분되기에 납득하기 어려운 사유는 없는 작품이지만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선정 기준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 영화평론가는 “상업영화와 비교해 뚜렷한 차이를 알 수 없는데도 다양성 영화라는 이름으로 보호받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영화 ⓒ 무비꼴라쥬
한국 독립영화가 큰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는 것 역시 다양성 영화 시장의 문제점으로 꼽을 만하다. 2011년 <파수꾼>과 같이 사회적 문제를 건드린 작품이 여전히 주목받고 있지만 모든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올해 각각 10만명 이상의 관객 동원에 성공한 한국 다양성 영화인 <한공주>와 <도희야>는 CGV의 다양성 영화 브랜드 무비꼴라쥬가 배급과 마케팅을 맡았다는 점이 주효했다. 그마나 최근 명랑한 코미디로 주목받으며 3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고 선전 중인 <족구왕>이 새로운 흐름으로 보이지만 대다수 한국 독립영화는 제대로 된 개봉 기회조차 잡지 못한 채 사장되기 일쑤다. 애초의 취지처럼 다양성 영화 정책이 영화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보완돼야 할 점이 아직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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