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모디의 밀월 못마땅한 오바마·아베
  • 모종혁│중국 통신원 ()
  • 승인 2014.10.0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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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도에 20조원 선물 보따리…두 대국 밀착에 미·일 긴장

9월18일 인도 뉴델리의 총리실 영빈관. 세계 1, 2위 인구대국의 정상들이 기자들 앞에 나란히 섰다. 먼저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중국은 앞으로 5년간 200억 달러를 인도에 투자할 것”이라며 “양국 경제 관계의 새 역사를 열었다”고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했다. 뒤이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도 “인도에 고속철도를 놓고 구자라트·마사라슈트라 등지에 산업단지를 조성하겠다”며 “양국이 협력하면 전 세계 3분의 1의 인민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9월17일부터 사흘간의 일정으로 인도를 방문했다. 그전부터 인도의 일부 언론은 “중국이 인도에 1000억 달러에 달하는 초대형 투자 공세를 퍼부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중국은 예상에 훨씬 못 미치는 5분의 1에 불과한 선물 보따리만 풀었다. 9월1일 모디 총리의 일본 방문을 맞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밝힌 향후 5년간 3조5000억 엔(약 34조원)의 투자 계획보다 훨씬 적다.

9월1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축하 공연을 하는 무용단 사이를 거닐며 환담하고 있다. ⓒ EPA 연합
그러나 지난 14년간 중국의 대(對)인도 투자액이 4억10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것 또한 엄청난 규모다. 양국 정상은 경제·무역 발전 5개년 계획, 상하이-뭄바이 쌍둥이 도시 육성 등 12개 협정에 서명하며 경제 분야에서 구체적인 성과를 도출했다. 오랫동안 긴장과 대립으로 점철돼왔던 두 나라의 관계를 돌이켜볼 때, 이번 정상회담은 양국 교류사에 새 장을 연 획기적 사건이다.

인도와 중국은 세계 4대 문명 중 인더스·황허(黃河) 문명의 발상지다. 하지만 근대화에 실패하면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나 반(半)식민지로 전락한 아픔이 있다. 외세 침략의 고난을 겪은 두 나라였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른 어떤 국가들보다 가까웠다. 1947년 독립한 인도는 1949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중국과 비사회주의 국가로는 처음으로 공식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50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을 유엔 회원국들은 ‘침략국가’로 규정했지만, 인도는 관련 결의안을 모두 반대했다. 1951년 양국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티베트를 중국이 강제 점령하자, 인도는 이를 인정했다.

“국가 안보에 위협” 중국 진출 막았던 인도

1955년 인도네시아에서는 두 나라의 돈독한 협력 관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다. 인도·인도네시아 등 5개국의 발기로 아시아·아프리카 29개국 대표단이 참석한 반둥회의가 열렸던 것이다. 참가국들은 서구 열강에 의해 자행됐던 식민주의 종식과 미·소 간의 냉전 상황 속에서 중립을 선언했다. 이후 국제무대에는 ‘제3 세계’라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했고, ‘비동맹주의’ 노선이 태동했다.

뜨거웠던 양국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1957년부터다. 두 나라 사이의 1700㎞ 국경선이 분쟁을 촉발했다. 티베트 서단이자 인도 카슈미르 지역의 악사이 친이 그 무대였다. 중국은 신장에서 악사이 친을 지나 티베트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했다. 이에 인도는 서한을 보내 엄중 항의했다. 1959년 티베트 민중이 일으킨 반중(反中) 항쟁이 실패하자, 달라이 라마 14세는 인도로 피신했다. 그러자 중국은 ‘반란 세력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며 인도를 격렬히 비난했다.

조금씩 쌓여가던 두 나라 간의 앙금은 1962년 터져 나왔다. 1959년부터 소규모 전투로 긴장 수위가 높아가던 국경에서 대규모 군사 충돌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해 10월 중국군은 인도로 진입해 7일 만에 160㎞나 진격했다. 다음 달 공격에서는 인도군 3000여 명을 사상(死傷)하고 4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두 고대 문명국이 역사상 최초로 직접 싸운 전쟁은 양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인도는 취약한 군사력에 충격을 받아 국방비 지출을 대폭 늘렸고, 중국에 대한 모든 우호 정책을 철회했다. 중국은 인도의 적국인 파키스탄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그 후 두 나라는 국경에서의 크고 작은 분쟁을 지속하며 1980년대까지 견원지간처럼 지냈다.

1988년 라지브 간디 총리가 중국을 방문하고 1991년 리펑(李鵬) 총리가 인도를 답방하면서 양국은 해빙의 물꼬를 텄다. 중국이 선이후난(先易後難·쉬운 것을 먼저 하고 어려운 것은 나중에) 식 접근을 추구하면서 국경 분쟁은 뒤로 미뤄졌다. 하지만 1998년 인도가 5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하고 중국의 핵 위협론을 선동하면서, 양국 관계는 다시 틀어졌다. 다시 국경 문제를 앞세워 대립하던 두 나라는 2003년 바지파이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 인도 내 티베트인의 활동 제재와 국경 협상 재개를 약속하면서 정상화됐다.

200억 달러는 미·일 견제 뚫기 위한 선물

험난했던 정치·외교 분야처럼 양국의 경제 협력은 그동안 더디게 진행됐다. 인도는 중국의 진출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며 규제해왔다. 특히 중국이 강점을 지닌 항만·철도 등 인프라 건설에 대한 투자를 철저히 막았다. 이 때문에 중국은 지난 14년간 영국(200억 달러)·미국(120억 달러) 등 다른 나라보다 투자가 한참 뒤처져 인도 진출에 난항을 겪어왔다.

지난 5월 집권한 모디 총리는 이런 양국 관계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모디 총리는 BJP(인도국민당) 출신이지만, 투자 유치와 수출 주도로 인도 경제를 부흥시키려 하고 있다. 이른바 ‘모디노믹스’로 일컬어지는 그의 경제 철학은 중국식 성장 모델을 철저히 따른다. 구자라트 주 총리 시절 모디 총리는 “구자라트 주를 중국의 광둥성처럼 만들겠다”며 타타·GM 등 국내외 대기업 공장을 유치해 일자리를 만들고 수출을 늘려 고도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모디 총리는 제조업뿐만 아니라 도로·철도·댐 등 사회기반시설에 외국인 투자를 받아들여 적극적인 국토 개조를 벌이고 있다. 이를 위해 집권 후 외국인이 인프라에 투자할 경우 49% 이상 지분을 가질 수 없다는 제한을 철폐했다. 이런 추세에 중국도 화답하듯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은 이전 역대 최고 지도자들이 10년 단위로 인도를 찾았던 것과 달리 “필요하면 언제든 방문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중국의 통 큰 투자는 미국과 일본의 ‘인도 러브콜’에 대한 맞대응이다. 일본은 이미 막대한 차관을 약속했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9월29~30일 유엔 총회에 참석하는 모디 총리를 두 차례나 만난다. 인도를 통해 중국의 해양 진출을 막겠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반면 중국은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을 연결하는 ‘해상 실크로드’를 통해 안정적인 해상 자원 수송로를 확보하려고 한다. 여기에 인도의 도움은 필수적이다.

비록 제2의 밀월기를 맞이했지만, 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있다. 해결되지 않은 영토 분쟁이 양국 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도 모디 총리는 국경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며 지지자들을 달랬다. 하지만 인도 입장에서 침체된 경제를 일으키려면 중국의 협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친디아로 상징되는 13억의 중국과 12억의 인도. 두 나라가 과거의 반목을 딛고 친구가 되어 새로운 아시아의 시대를 열어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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