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7. “노비들의 분노 “양반들이나 나가 싸워라”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10.07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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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세습되는 노비, 조선 사회의 화약고

재일교포 학자인 윤학준 호세이 대학 교수는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1994년)란 책에서 재일 한국인 중 99%가 양반이고 99%가 상놈이라고 했다. 실제로 대한민국 국민의 99%는 스스로를 양반의 후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 숙종 16년(1690년) 대구부의 신분 구성에서 양반은 9.2%, 양인(良人·평민) 53.7%, 노비 37%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양반 숫자가 크게 증가했음에도 양반 비율이 10%를 넘지 못했다. 선조 39년(1606년)에 단성(丹城·경남 산청) 지역에서는 64%가 노비였고, 광해군 1년(1609년) 울산 지역에선 47%가 노비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양인과 천인 혼인하면 천인 모친 신분 따라

조선 후기로 갈수록 양반 비율이 크게 올라가는데, 앞의 대구부는 영조 5년(1729년) 양반이 18.7%로 10% 정도 급증했다. 양인은 54.6%로 별로 변화가 없었지만 노비는 26.6%로 10% 정도 줄었다. 노비 숫자가 줄어든 만큼 양반 숫자가 늘어난 것이다. 부를 축적한 백성들은 공명첩(空名帖·이름을 비워놓은 관직 임명장)을 산다든지, 양반들에게 직첩(職牒·벼슬 임명장)을 산다든지, 향리에게 돈을 주고 호적을 바꾼다든지 하는 방법들을 통해 양반 신분을 샀다. 이렇게 양반 숫자는 고종 31년(1894년) 갑오개혁으로 반상(班常)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늘어났고, 이것이 현재 모든 한국인으로 하여금 양반의 후예라는 허위의식을 갖게 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그 많던 평민·노비는 모두 어디로 증발했을까.

드라마 에서 태종과 아들 세종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했던 이맹현이 성종 25년(1494년) 자식들에게 상속한 노비 숫자는 무려 757명이다. 그가 청백리에 녹선된 것은 굳이 부패하지 않아도 충분히 부유했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이 선조 19년(1586년) 5명의 자녀들에게 상속한 노비 숫자도 무려 367명이었다. 의정부 좌찬성을 역임한 권벌도 317명의 노비를 갖고 있었다. 노비를 부리는 양반의 관점에서 보면 좋을지 모르지만 그 반대의 관점, 즉 노비의 관점으로 보면 이 많은 숫자의 노비는 그 존재 자체로 사회 불안 요소였다.

노비는 크게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와 개인에게 소속된 사노비로 나뉘는데, 사노비의 처지가 훨씬 열악했다. 노비제도는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 재산처럼 거래되는 것은 물론 그 자식들까지 자자손손 천인(賤人)이 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부모의 신분이 서로 다를 경우 그 자식의 신분은 어떻게 되는가도 문제였다. 양인과 천인이 혼인하는 양천교혼(良賤交婚)의 경우 자식들은 누구의 신분을 따라야 하는가. 모친의 신분을 따르는 것을 종모법(從母法) 또는 수모법(隨母法)이라고 하고, 부친의 신분을 따르는 것을 종부법(從父法)이라고 했다. 종부법을 채택하면 노비 숫자가 차차 줄어드는 반면 종모법을 실시하면 노비 숫자가 크게 늘어나게 돼 있었다.

고려시대의 제도를 계승한 조선은 개국 이래 종모법을 실시했다. 종부법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양반 사대부의 반발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황희와 태종이 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 태종 14년(1414년) 6월 예조판서 황희가 “아비가 양인이면 아들도 양인이니 종부법이 옳습니다”라고 개정을 건의했다. 그러자 태종은 “경의 말이 대단히 옳다. 재상(宰相)의 골육(骨肉)을 종모법에 따라 역사(役使)시키는 것은 심히 미편(未便)하다”라고 찬동했다. 태종이 ‘재상의 골육’을 언급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양반 사대부들의 첩에게서 난 자식들도 혜택을 입는 법이니 양반들에게 나쁘기만 한 법은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태종은 직접 윤음을 내려 종모법을 종부법으로 바꿨다.

“하늘이 백성을 낼 때는 본래 천인이 없었다. 전조(前朝·고려)의 노비법은 양인과 천인이 서로 혼인하면 천한 것을 우선해 어미를 따라 천인으로 삼았으므로 천인의 숫자가 날로 증가하고 양민의 숫자는 날로 감소했다. 영락(永樂) 12년(1414년) 6월28일 이후에는 공사(公私) 여종이 양인(良人)에게 시집가서 낳은 소생은 모두 종부법에 의거해 양인으로 만들라.”(<태종실록> 14년 6월27일)

임진왜란 끝나자 류성룡 개혁 정책 폐기

종부법 개정은 신분제의 획기적인 진전으로서 이후 모친의 신분 때문에 눈물 흘리던 수많은 천인이 구제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인의 숫자가 대폭 증가해 국가 재정이 튼튼해졌다. 여종을 소유한 양반 사대부들은 종부법에 큰 불만을 가졌으나 태종의 위세에 눌려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런데 세종이 즉위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세종은 사대부와 일반 백성들의 이해가 충돌할 경우 대부분 양반 사대부의 손을 들어주었던 임금이었다. 그래서 맹사성·권진·허조 등 대신들은 “천인 종모법은 또한 한 시대의 좋은 법규입니다”라면서 종모법 환원을 계속 주장했다. 그러자 세종은 태종이 종부법으로 개정할 때 담당 승지였던 전 판서 조말생을 불러 종부법 제정 경위를 물었다. 조말생은 태종이 강력한 의지로 종부법으로 개정했으며 “이숙번이 옳지 않다고 극력 말했으나 태종이 듣지 않으시고 신에게 법령 집필을 명하셨으며 친히 하교(下敎)하여 법을 세우셨습니다”(<세종실록> 14년 3월15일)라고 보고했다.

이로써 종부법은 태종의 강력한 의지로 제정된 법임이 명백해졌다. 이때 세종이 ‘조종의 성헌(成憲)은 고칠 수 없다’고 못 박았으면 이후 조선 역사는 신분보다는 능력이 우선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대신들의 요구에 쫓겨 종모법으로 환원하는 개악(改惡)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노비들은 평시에는 도망가거나 전시에는 적국에 가담하는 형태로 사회의 화약고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북상길에 올랐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의 어가(御駕)가 떠나자 백성들이 난입해서 ‘먼저 장예원(掌隷院)과 형조(刑曹)를 불태웠다’고 전한다.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지른 이유에 대해 <선조수정실록>은 ‘두 곳의 관서에 공사 노비의 문적(文籍)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적고 있다. 형조와 장예원은 모두 노비 문서와 노비에 대한 소송을 관장하는 부서였다.

평소 신분제의 질곡에 시달리던 노비들은 임금 일행이 도주하자 대궐에 난입해 형조와 장예원에 불을 지른 것이다. 나아가 노비들은 일본군에 적극 가담했다. 선조 25년(1592년) 5월4일 개성까지 도주한 선조는 윤두수에게 “적병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인가?”(<선조실록> 25년 5월4일)라고 물었다. 노비들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한 것이었다. 그래서 선조는 조선은 망했다는 생각에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주하려 한 것이다. 실제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조선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은 노비들이 군공(軍功)을 세우면 양인으로 신분 상승을 시켜주고, 공이 클 경우 양반 벼슬까지 주는 면천법(免賤法)을 제정했다. 공사 노비가 일본군의 머리 1급을 베어오면 면천(免賤·천인에서 벗어남)시키고, 2급이면 우림위(羽林衛·국왕 호위무사)에 제수하고, 3급이면 허통(許通·벼슬 시키는 것)시키고, 4급이면 수문장(守門將)에 제수하는 것이었다.(<선조실록> 27년 5월8일) 류성룡이 “이와 같이 하면 비록 끓는 물에 들어가고 불길을 밟더라도 전력을 다해 적을 무찔러 열흘도 채 못 가서 적의 수급이 쌓여 경관(京觀·적의 시신을 쌓아놓은 탑)이 될 것입니다”(‘명군이 퇴각해 평양에 주둔한 뒤 군중(軍中)의 할 일에 대해 아뢴 서장’, <진사록>)라고 예견한 것처럼 노비들이 의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은 신분제를 완화시키는 면천법을 제정해 국망(國亡)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고 전쟁이 끝날 때가 되자 선조와 사대부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면천법을 비롯해 류성룡이 전시에 시행했던 각종 개혁 정책들을 무효로 돌리고 전쟁 전의 사회로 되돌아가려 한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기 직전 남이공 등이 상소를 올려 “(류성룡이) 국정을 담당한 6~7년 동안에…훈련도감과 체찰군문(?察軍門)에서 속오군(束伍軍·양반과 노비로 편성한 부대)을 만들고…서예(庶?)의 천한 신분을 발탁하여…”(<연려실기술> ‘선조조 고사본말’)라며 류성룡이 전시에 신분제의 틀을 흔들었다고 격렬하게 비난했다. 결국 임진왜란·정유재란이란 7년 전쟁을 진두에서 이끈 류성룡은 전쟁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포상을 받기는커녕 선조 31년(1598년) 11월19일 파직당했다. 류성룡을 쫓아내고 그가 주도했던 각종 개혁 입법을 폐기시키고, 다시 ‘양반천국, 백성지옥’의 구체제로 돌아갔다.

9월1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와 사내 하청업체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부 승소 판결이 난 뒤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신분제로 백성 옭아맸던 조선 무너져

정유재란이 종결된 지 불과 30년 만에 북방의 만주족이 남침하는 정묘호란(1627년)이 발생했다. 숙종 때 신분제 완화와 북벌을 주창했던 백호·윤휴는 정묘호란 때 평안도 안주성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감사 윤훤이 성을 지킬 계책을 내자 “군사들이 호패를 풀어서 성 위에 쌓아놓고서 떠들썩하게 ‘호패가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데 우리들이 어찌 싸우겠느냐’라고 말했고 군사가 드디어 크게 궤멸하고 윤훤은 달아나서 서로(西路·평안도와 황해도)가 파멸되었습니다”(<숙종실록> 4년 5월11일)라는 것이다. 감사 윤훤이 병사들에게 나가서  싸우자고 말하자 병사들은 거꾸로 서얼·상민·노비라고 써놓은 호패를 성 위에 쌓아놓고 ‘너희들(양반들)이나 나가서 싸우라’고 거부했다는 것이다. 안주성이 무너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병자호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각종 신분제로 백성을 옭아맸던 나라가 위기에 무너지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같은 일을 하고도 각종 차별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은 과거의 서얼·상민·노비와 얼마나 다른가. 비정규직의 낮은 자존감으로 회사에 위기가 닥쳤을 때 힘을 모으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하물며 사옥 부지 매입에는 10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베팅하는 기업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법원의 결정에 불복해 항소하는 행태로는 진정한 회사 안정과 사회 안정을 이룰 수 없다. 구성원 대다수가 자신과 회사, 사회에 대한 자존감을 가질 때 개인과 회사, 사회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다. 조선이 끝내 총 한 방 제대로 쏴보지도 못하고 멸망했던 근본적 이유가 구성원들에게 ‘내 나라’라는 귀속감을 주지 못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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