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 꼭두각시를 거부한다”
  • 모종혁│중국 통신원 ()
  • 승인 2014.10.07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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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우산 혁명’ 확산…중국 정부, 강력 대응 나서

10월2일 홍콩 코즈웨이베이는 여느 때처럼 인파로 붐볐다. 코즈웨이베이는 홍콩 섬에 있는 상업거리로 세계에서 임대료가 가장 비싸다. 소고백화점을 중심으로 백화점과 쇼핑몰이 몰려 있어 1년 내내 쇼핑객으로 넘친다. 이날 코즈웨이베이를 찾은 사람들의 행색은 평소와 달랐다. 다수의 젊은이는 쇼핑백 대신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쳤다. 시민단체 ‘센트럴을 점령하라’(이하 ‘센트럴 점령’)가 주도한 점거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었다.

10월1일부터 중국은 국경절 7일 연휴에 들어갔다. 이 기간에 홍콩은 대륙에서 온 중국인들이 점령한다. 하지만 9월28일부터 코즈웨이베이에서 홍콩 정부청사가 있는 어드미럴티에 이르는 거리에는 오직 홍콩인들만 있었다. 중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여행사들은 중국인 관광객을 이 일대로 데려가지 않았다. 홍콩 관광 상품이 아예 취소되기도 했다.

코즈웨이베이는 쇼핑 대신 다른 열기로 뜨거웠다. 민주주의를 향한 홍콩인들의 열망이었다. 거리는 직선제를 주제로 연설하는 시민,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학생, 홍콩의 자치에 대해 토론하는 군중 등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활동하는 데모크라시 광장이 됐다.

ⓒ UPI 연합
행정장관 선거 후보자 추천 방식이 쟁점

이번 점거 시위는 2017년에 치러질 행정장관 선거 후보자 선출방식을 둘러싸고 촉발됐다. 현재 홍콩은 국방·외교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고도의 자치를 시행하고 있다. 행정장관과 입법의회는 ‘홍콩인에 의한 통치’의 핵심이다. 임기 5년의 행정장관은 주요 정책의 결정과 행정명령의 발표, 공직자의 임면, 의회에 세입·세출 동의안 제출, 형사범의 사면·감형 등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다. 중요 안건을 중국 정부와 직접 협의해 결정하는 홍콩인의 대변자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막중한 권한을 지닌 행정장관을 직접 뽑고자 하는 홍콩 내 움직임은 1997년 홍콩 반환 직후부터 꿈틀댔다. 특히 ‘보안법 파동’이 일어나면서 표면화됐다. 2003년 홍콩 정부는 기본법 23조에 의거해 ‘국가안전법’ 23개 항을 제정하려 했다. 반역죄, 국가 전복, 국가 기밀 절취 등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두어 홍콩인의 반중(反中) 행위를 단속하려 한 것이다.

영국의 통치 아래 자유로웠던 홍콩인들은 반발했다. 중국 정부와 초대 행정장관인 둥젠화가 입법화를 서두르자, 홍콩 반환 6주년이 되던 7월1일, 50만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대륙에서 벌어진 최대의 군중 집회였다. 이런 홍콩인들의 거센 반대에 부닥쳐 중국 정부는 보안법 제정을 철회해야 했다.

2004년부터는 행정장관과 입법의원 직선제를 요구하는 민주파 정당과 시민단체의 요구가 본격화됐다. 이들은 홍콩기본법의 해석을 둘러싸고 중국 정부와 첨예한 논쟁을 불사했다. 이런 갈등의 여파로 둥젠화는 2기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2005년 3월 조기 사퇴했다. 뒤를 이은 도널드 창은 같은 해 12월 부분적인 정치제도 개혁안을 제시했지만, 민주파 의원들의 반대로 부결됐다.

2007년 3대 행정수반 선출을 앞두고 정치 개혁 문제가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도널드 창은 당선 후 직선제 실시에 대한 로드맵을 발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홍콩 정부는 정치제도 개혁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를 중국 정부에 보고했다. 같은 해 12월 중국은 홍콩 행정장관을 2017년부터 직접 선거로 뽑고 입법의원은 2020년부터 완전한 직선제로 선출하겠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2010년 행정장관 선거인단은 800명에서 1200명으로 확대됐고, 입법의원 수는 60명에서 70명으로 늘어났다. 바뀐 방식으로 2012년 4대 행정수반에 렁춘잉이 뽑혔다. 렁춘잉은 열성적인 공산당원으로 취임 전부터 각종 스캔들에 휘말렸다. 게다가 직선제 실시를 위한 조치를 미적거리자 시민단체들이 들고일어났다.

‘센트럴 점령’은 6월20일부터 10일간 비공식 국민투표를 주관했다. 행정장관 선거의 후보자 추천 방식을 놓고 온·오프라인 투표로 유권자의 의견을 물어봤다. 당초 참가자가 많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홍콩 인구의 10%가 넘는 78만7767명이 참여했다. 투표 결과 유권자 1% 이상의 서명을 받거나 의회에 진출한 주요 정당의 추천을 받은 후보자가 출마하는 안이 47.2%로 가장 많은 지지를 얻었다. 게다가 87.8%는 ‘중국 정부가 국제 기준에 맞지 않은 선거 방안을 내놓을 경우 의회가 거부해야 한다’고 답했다. 법적 효력이 없는 투표였지만 홍콩인들은 행동으로 옮겼다. 홍콩 반환 17주년이 되는 날, 무려 51만명이 거리로 나와 ‘진정한 직선제와 완전한 자치’를 요구했다.

홍콩인의 민의에 중국 정부는 8월31일 찬물을 끼얹으며 대응했다. 전인대는 “행정장관 선거의 후보자는 후보추천위원회 위원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는 애국 인사여야 한다”며 “이들 2~3명의 후보자 중에서 홍콩 주민이 투표로 행정장관을 선출한다”고 결정했다. 반중국 성향의 후보자를 사전에 걸러내겠다는 의도였다. 또한 “선출된 후보자는 중국 정부의 임명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해 임명권이 중국 정부에 있음을 못 박았다.

타이완과의 통일 행보에 가늠자

그날부터 홍콩은 분노로 들끓었다. 민주파 정치인과 시민단체는 즉각 불복종 투쟁에 돌입했다. 첫날 홍콩 정부청사 앞에서 열린 항의 시위 참가자는 1000여 명에 불과했지만 그 수는 날마다 늘어났다. 9월22일 홍콩 내 대학들의 학생회 연합체가 휴업 투쟁을 벌이면서 시위대 규모는 기하급수로 커졌고, 여기에 교수와 교직원이 동참하고 중·고등학생까지 합세했다. 9월28일부터 홍콩 주요 거리는 휴업에 나선 시위대가 점령했다.

흥미롭게도 현재 시위대를 주도하는 지도부는 없다. 비록 민주파 정당, 시민단체, 학생 조직 등이 시위 참여를 독려하지만 통합된 컨트롤타워가 존재하지 않는다. 낮에는 학생과 일반 시민이, 저녁에는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거리에 나서고 있다. 언뜻 무질서해 보이지만 시위는 평화적으로 질서정연하게 진행되고 있다. 시위대는 최루탄을 쏘고 최루액 스프레이를 뿌리는 경찰에게 우산을 펴서 맞서고 있다. 그래서 ‘우산 혁명’이라고 불린다. 시위대는 10월2일까지 렁춘잉 장관이 사임하지 않으면 정부 청사를 점거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중국에 홍콩은 일국양제의 실험장이다. 이 실험이 실패하면 타이완과의 평화통일 역시 물 건너간다. 중국이 이번 사태를 어떻게 매듭지을지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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