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바보들의 행진
  • 정준모│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
  • 승인 2014.10.07 15:0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바지·미니스커트·통기타·장발로 상징되는 70년대 청년문화

 지구상에서 가장 빈곤했던 대한민국도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살림에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보릿고개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현대식 주택과 아파트가 등장했다. 빨간 ‘고무 다라이’와 플라스틱 바가지가 부엌을 차지했고 국산 공산품인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집안의 귀한 재산 목록에 들었다. 당시 ‘집에 불이 나면 무엇을 제일 먼저 들고 나올까’라는 농담 같은 질문에 ‘텔레비전’이라는 담이 나올 정도였다. 분식센터에서 돈가스와 함박스테이크를 즐기면서 DJ 박스에서 틀어주는 클리프 리처드의 <The young ones>에 발장단을 맞추기도 했다.

세상은 쉴 새 없이 균열이 일어나고 수많은 틈이 생기고 그래서 자주 변한다. 미·소 냉전 체제가 완화되고, 미·중 수교, 주한미군의 일부 철수와 남북 교차 승인 안이 등장했다. 여기에 고속 성장에 따른 후유증으로 경제 불황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는 1970년 11월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 사건, 1971년 8월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의 KAL빌딩 방화 사건과 광주 대단지 사건이 터지고, 대학생들은 교련 반대 시위에 나서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전국 14개 언론기관에서 언론 자유 수호 운동에 나서고, 대학 교수들은 대학자주화운동을 선언하면서 그간의 성장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잘살아보자’는 구호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한국 사회에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①미니스커트 단속 ②1971년 10월1일 서울역광장에서 벌어진 장발 단속 ③ 정강자 투명 풍선과 누드(1968) ⓒ 정준모 제공
정치적 저항으로 확장되지는 못해

균열의 조짐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당시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청년문화’가 한국 사회의 시청각적 풍경을 바꾸면서 변화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청년문화는 미국이나 유럽에서 지칭되는 ‘68세대’의 정치·문화적 경향과는 다르게 ‘유신’으로 밀폐된 한국에서 대중문화를 통해 번져갔다. 당시 청년 학생에게 통기타와 생맥주, 청바지, 장발은 상징이었다. 서구에서 수입된 이런 ‘상징’은 당시 청년에게 지향과 동경의 대상이 됐다. 지금은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 된 이들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고 대체로 6·25전쟁 전후에 태어나 미국식 교육제도 속에서 성장했다. 이들은 대한제국이나 왜정시대를 경험한 세대와는 가치관과 미적 취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등장은 세대 간의 격렬한 문화적 갈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기성세대의 ‘뽕짝’ 대신 ‘포크’음악에 열광했다. 당시 한국 청년은 서구에서 포크음악의 형성과 인기에 큰 영향을 미친 ‘저항’이라는 맥락은 제거한 채 ‘서구적’ ‘미국적’ ‘새로운 것’ ‘다른 것’이라는 점에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이고 소비했다. 

전통적인 풍경과 인물화가 주를 이루던 보수적인 미술 동네에도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의 추상표현주의 화풍이 등장하고 이내 해프닝이라는 이름의 행위예술이 등장했다. 1968년 정강자는 젊은이의 문화 성소였던 ‘세시봉’에서 정찬승·강국진과 함께 ‘투명 풍선과 누드’라는 해프닝을 전개한다. 취재 나온 기자가 ‘다 벗으면 안 된다’고 만류하지만 않았어도 다 벗을 각오로 무대에 섰던 당시 25세의 정강자는 일약 유명인사가 됐다. 

① 양희은의 재킷 ② 포스터 ⓒ 정준모 제공
낭만적인 엘리트 의식과 감성적인 자유주의

1969년 장발에 통기타를 들고나온 한대수·송창식·윤형주·조영남이 노래하던 세시봉은 청년과 대학생의 성지가 됐다. 노래 가사는 대화체로, 반말 조로 바뀌어 당시 청년의 일상과 고민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세시봉에 이어 명동엔 심지다방·황실다방·시보네가, 무교동엔 연다방, 광화문엔 아카데미 음악감상실과 금란다방, 종로엔 디쉐네·르네상스·아폴로 등이 경쟁하듯 청년들의, 대학생들의 집결지가 되어갔다.

당시 대학에는 교복이 있었지만 청바지는 젊음의 상징이자 ‘대학생’을 증명하는 신분증에 다름없었다. 1950년대 미군을 통해 들어왔지만 깡패나 불량한 이들이 입는 옷으로 여겨졌던 청바지가 대학생의 상징이 된 것이다. 하지만 변변한 국산 청바지가 없던 시절이라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중고 청바지를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 등에서 사 입었다.

미니스커트와 청바지는 청년문화의 아이콘. 여기에 하나 더 갖춰야 진정한 청년문화의 기수로 변신할 수 있었다. 바로 장발이었다.

사실 1970년대 한국의 청년문화는 1960년대 서구 청년들이 벌였던 반전 및 인종 차별 반대 운동, 기성 사회의 지배적 가치와 문화를 거부하는 히피 운동이 이입된 것이었다. 서구에선 여기에 노동 계급과 대학생이 연대하면서 저항적인 문화로 확대된다. 하지만 1970년대 초반 한국 땅의 ‘히피 문화’는 변혁 운동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그때 대학생이 열망했던 서구 라이프스타일과 서구 대중문화를 뜻했다. 따라서 1970년대 초·중반의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를 박정희식 계도 정치와 억압에 대한 정치적 ‘저항’으로까지 확장시키는 것은 무리다.

아무튼 당시 장발은 ‘의식’ 있는 젊은이의 ‘저항’의 상징이었다. 아니 단속을 하니 그 반항으로 더 장발을 선호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유행이 됐다. 대학생이 모이는 서울 종로와 명동, 신촌에서는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입은 ‘민족의 주체의식과 국민기강을 문란’하게 하는 미풍양속사범과 이를 단속하는 경찰의 숨바꼭질이 벌어지곤 했다. 하길종 감독(1941~79년)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년)에서 보여주듯 쫓고 쫓?기며 나오는 송창식의 <왜 불러>라는 노래는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여기에 벌거벗고 거리를 뛰는 스트리킹도 등장하면서 답답한 세상에 몸으로 저항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대학생의 지적 허영은 연극에도 스며들었다. 1975년 개관한 150석 규모의 실험극장은 <에쿠우스> <신의 아그네스>를, 청년 연극인이 모여 만든 신촌의 76극장은 <고도를 기다리며> <병사와 수녀>를 올렸다. 이른바 이해랑·김동원 유의 전통 연극이 아닌 미국 연극을 직접 보고 배운 연출가가 현대 아방가르드 연극을 소개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새로운 문화 흐름을 ‘허영’으로 보는 운동권도 있었다. 사실 당시 청년문화는 낭만적인 엘리트 의식과 감성적인 자유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을 ‘저항’이라고 읽기보다는 ‘차이’라는 말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한계지만, ‘탈(脫)정치적’ ‘탈이념적’ 집단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 종의 다양성을 배태해낸 시각적·문화적 혁명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