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장작’에 개헌 불쏘시개 얹어봤자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4.10.13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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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완강한 개헌 거부감…청와대와 국회 갈등 고조 불가피

“개헌 논의를 중지하라!”

박근혜 대통령은 10월6일 여의도발(發) 개헌 추진에 급제동을 걸었다. “개헌 논의로 국가 역량을 분산할 경우 또 다른 경제 블랙홀을 유발할 수 있다.” 여야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국회개헌 추진 의원모임’이 “이달 중으로 국회 개헌특위를 구성해 내년 상반기까지 개헌안을 만들겠다”고 발표한 지 닷새 만이다. 세월호 참사로 나라 안팎이 시끄러울 때도 말을 아꼈던 그간의 침묵 행보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다. 대통령이 이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이는지를 대변한다.

강창희 국회의장실에서 터져 나온 고성

개헌에 대한 박 대통령의 생각은 확고하다. 박 대통령은 올해 1월 초 연두기자회견에서도 민생 등 현안 문제에 집중해야 할 때라며 반대 의지를 분명히 했다. 그때도 개헌 문제를 블랙홀에 비유하며 시기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조기 진화 기대와는 달리 ‘개헌 엔진’은 바삐 돌아가고 있다.

10월6일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면서 정치권의 개헌 논의 자제를 당부했다. ⓒ 연합뉴스
개헌에 관한 한 제1야당의 입장도 단호하다. 20% 지지율의 바닥을 헤매는 새정치민주연합으로선 일단 판을 흔드는 게 낫다는 판단을 했음 직하다. 지난 1월 대통령의 개헌 반대 언명이 나오자마자 당시 원내대표이던 전병헌 의원은 이른 시일 내 국회개헌특위 구성을 공언했고, 김한길 당 대표는 “개헌은 18대 대선 당시 여야 후보 모두의 공약”이라며 전폭적인 지원을 다짐했었다. 그즈음 개헌 추진 모임 여야 의원 118명 중 새누리당 소속이 56명이었으니 얼핏 보면 청와대와 국회가 힘겨루기에 나선 양상이었다. 대통령의 정색에 여당 일각이 멈칫, 다소 주춤하는 듯했지만 정기국회가 열린 지금에는 개헌안 발의에 필요한 과반수를 넘었다. 152명이나 된다. 대통령의 위하(威?)가 먹혀들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월호 참사로 정국 전체가 얼어붙지 않았다면 개헌 논의가 훨씬 더 본격화됐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사태가 이렇듯 헝클어진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국민의 70% 이상이 개헌에 찬성하고 있다. 박 대통령 자신도 후보 시절 단임 대통령제의 문제점에 동의하며 개헌을 지지한 게 부담이다. 자신의 공약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양새여서 강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언제쯤부터 개헌 논의를 하자는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으면 낫겠지만 그럴 형편도 못된다. 박 대통령의 개헌 논의 중지 요구가 먹혀들지 않는 데는 비단 이재오 의원 등 여당 내 ‘비박(非朴)계’뿐 아니라 폭넓은 개헌 불가피론 지지층이 버티고 있어서다. 그 대표적 인물이 강창희 전 국회의장이다.

지난해 4월 박 대통령이 개헌에 대해 난색을 완곡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표명했으나 강창희 의장은 제헌절 기념사를 통해 개헌의 당위성을 강하게 피력했다. 강 의장은 “내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공론화해 19대 국회에서 마무리 짓는 게 옳다”고 단언했다. “1987년 이후 우리 사회의 규모와 내용이 천양지차로 달라졌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몸에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개헌에 많은 국민이 동의하고 있다”고도 했다. 당시 청와대는 이를 만류했으나 강 의장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국회의장실에서 터져 나온 고성은 이와 관련된 것이라는 전언이다. 때문에 청와대와 의장실 사이에 한랭전선이 형성됐고 그 여진이 남아 있다고 한다.

강 의장의 개헌 행보는 예서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개헌 반대 의사를 천명했음에도 신년사를 통해 ‘국회의장 직속 헌법자문위원회’ 발족을 약속했고, 실행에 옮겼다. 김철수 전 서울대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자문위원회는 5월 말 1500쪽짜리 최종 보고서를 작성했다. 대통령과 총리가 외치와 내정을 분장하는 이원집정제(분권형 대통령) 등을 내용으로 한 보고서는 세월호 파도에 밀려 일반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개헌 불씨를 계속 지피는 동력이 됐다. 대통령의 강력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여의도의 개헌 추진 노력이 지속되는 게 우연이 아닌 것이다.

강창희 의원은 국회의장 시절 청와대와 갈등을 빚으면서도 개헌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 연합뉴스
“국회 개헌 논의를 청와대가 왜 간섭하나”

박 대통령의 반대 언명이 나온 지 이틀 후 이재오 의원이 방송에 출연해 “국회의 개헌 논의는 행정부가 하라 말라 간섭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목청을 높일 정도가 됐다. 여당의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는 홍준표 경남도지사도 방송에 나와 “대통령으로 하여금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들었고,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의지만 있으면 분권형 대통령제 같은 제도는 바로 도입할 수 있다”며 내년 초에 개헌 특위를 구성하자고 한 발짝 더 나갔다. 개헌에 관한 한 친박·비박 경계가 무너진 느낌이다.

그러자 문희상 새정치연합 비상대책위원장은 “대통령이 개헌 논의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헌법에 대한 논의는 국회의 당연한 역할”이라며 정면으로 치받았다. 대통령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의회주의를 위협하는 위험한 처사라고 공박한 문 위원장은 “경제에 골든타임이 있듯이 개헌에도 골든타임이 있다”면서 “이번 기회를 놓치면 개헌은 사실상 물 건너간다. 청와대가 민주주의의 블랙홀이 돼서는 안 된다”고 했다. 청와대를 상대로 한 ‘여야 개헌 연대’ 얘기까지 나오는 상황이 됐다. 개헌이 정치판 전체를 뒤흔드는 뜨거운 감자가 되는 참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개헌이 과연 이뤄질까 하는 게 최대 의문이다. 개헌이 성사될 경우 ‘대통령 권한 분할과 4년 중임제’에 여야 정치권의 의견이 일치하므로 핵심이어야 할 결과는 오히려 뒷전이다. 청와대와 국회 간 대결로 진행되는 특수성으로 인해 박 대통령이 개헌 논의 중지를 요구하는 진의는 무엇이며, 개헌 반대 주장을 임기 말까지 밀어붙일지 등이 우선 관심사다. 이를 점치기 위해서라도 개헌의 역사적 맥락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과 독재 강화를 꾀했던 이승만 대통령 시절의 1차(발췌 개헌)·2차(사사오입 개헌) 개헌과 박정희 대통령 때의 6차(3선 개선)·7차(유신헌법) 개헌은 쳐다볼 필요조차 없다. 현재의 개헌 정신은 대통령 권한 분산이어서 방향이 정반대이고, 방법론상 강압이 아닌 합의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상 9차례의 개헌 가운데 정치권의 합의로 개헌이 원만하게 성사된 경우는 1960년 4·19혁명에서 비롯한 3차 개헌과, 1987년 6·10항쟁이 동력을 제공한 9차 개헌이다. 이들에겐 대변혁기라는 공통점이 있고, 시대정신이 요구하는 ‘가치와 목표’가 분명했다. 여론의 압도적 지원이 있었기에 다소의 이견은 있었을망정 이렇다 할 갈등 없이 이뤄졌다. 9차 개헌 결과가 ‘1987년 체제’로 불리는 현행 우리 헌법이다.

대통령의 개헌 논의 반대에도 여의도는 바삐 움직이고 있다. 왼쪽부터 청와대의 눈총에 아랑곳없이 개헌 전도사 역을 자처하는 이재오 의원, ‘개헌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청와대는 간섭 말라’고 외치는 새정치연합 문희상 비대위원장, 정치권의 개헌 드라이브 저지에 골몰하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 시사저널 이종현·시사저널 포토
“대통령 버티는 이상, 개헌 난망” 전망 우세

그런데 역대 개헌의 전례를 현재 정국에 대입하면 ‘사실상 개헌은 물 건너갔다’는 관측을 낳게 한다. 3차와 9차 개헌은 두터운 공감대 형성으로 가능했는데, 지금은 다르다는 게 큰 이유다. 가장 강력한 정치 주체인 대통령이 반대하면 사실 전망은 비관적이다. 게다가 내년의 경제 상황은 더욱 어둡다. 시기적으로 2015년을 넘기면 사실상 대선 정국이 전개되고 여야 모두 차기 대권 후보가 부각되면서 개헌 논의가 아예 증발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 결국 박 대통령의 ‘결심’ 여하가 관건인데 그럴 소지는 없어 보인다. 다음은 최근 개헌 논란에 대한 한 여권 고위 관계자의 ‘명쾌’한 진단이다.

“4년 중임 대통령제 도입에 관한 한 여야 간에 이론이 없다. 그러나 자칫 분권형 대통령제나 아니면 의회 권한이 좀 더 강화되는 쪽으로 개헌 분위기가 잡힌다면, 새 제도 도입에 따른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일치시키는 작업은 필수다. 20대 국회의원 임기는 2016년 5월까지고, 박 대통령 임기는 2018년 2월까지다. 현직 대통령의 임기는 보장한다고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실제론 3년 4개월짜리 대통령이 되기 십상이다. 행여 현직 대통령에게도 중임의 길을 열어준다면 모르겠지만 그건 헌법상 불가능하다. 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거나 중임으로 변경하는 개헌은 그 개정안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해서는 효력이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박 대통령이 마음을 고쳐먹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반면 개헌 관철을 낙관하는 측도 만만치 않다. ‘개헌 무산’ 전망과 반대되는 논거는 ‘대세론’이다. 국민의 70% 이상이 개헌을 지지하고, 여야 다수가 동의하므로 종국에는 관철되리라는 것이다. 박 대통령 자신도 개헌을 공약했고, 여야가 합의하면 수용하겠다는 원칙을 공언해왔으므로  여야 정치권이 합의안을 도출하면 거부할 명분도 없다는 것이다. 야당가에서는 지난 서울시장 후보 경선이나 당 대표 선출 당시 ‘친박(親朴)’ 후보가 연패한 사실 등을 상기시키면서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이 떨어진 것도 주요 변수로 보고 있다. 대통령도 무리수를 둘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최대 변수가 경제라는 점을 인정하며 고심하고 있다.

이렇듯 개헌 실현 전망은 엇갈리는데 박 대통령의 단호한 반대 의지가 거듭 확인되면서 현재는 ‘무산’ 예측에 좀 더 무게가 실리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 여권 핵심 관계자는 개헌 논란을 이렇게 정리한다. “누가 뭐라 해도 대통령은 대통령이다. 개헌에서도 최대 상수(常數)다. 설령 대통령의 영향력이 다소 훼손됐다손 치더라도 ‘차기’를 결정짓는 결정적 존재다. 그렇다면 결말은 자명하지 않은가.” 2007년의 경우, 당시는 대통령(노무현)이 개헌을 하자고 했어도 국회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그처럼 개헌은 청와대와 국회 그리고 국민 여론 등 세 축의 공감대가 이뤄져야 가능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현실과 예측 가능한 미래 요소들만으로 평가하면 개헌 추진은 일단 부정 쪽으로 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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