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피아’ 깬다더니 손 놓고 있었네
  • 조현주·조유빈 기자 (cho@sisapress.com)
  • 승인 2014.10.13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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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 이른바 ‘관피아(관료+마피아)’ 금지령이 내려졌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관료 출신 기관장들에 대한 혐오가 그 어느 때보다 강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있다. 올해 50여 개 기관이 새로운 수장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지만 관료 출신 아닌 인사를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수장 자리가 빈 채로 운영되는 기관이 부지기수다.   


 “9월부터 공공기관장 임기가 무더기로 만료된다. 고기반찬이 지천에 깔려 있는 셈인데 요즘 ‘관피아(관료+마피아)’라면 학을 떼는 분위기라 군침만 삼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오죽하면 임기가 끝난 기관장이 떠나지 못하고 유임하는 곳들이 있겠나.” 공공기관에서 근무 중인 한 인사가 최근 기자에게 한 말이다. 그는 “우리만 해도 기관장 임기가 얼마 안 남았는데 아직까지도 후임자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다. 내부에서는 유임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소문도 나온다”고 토로했다. 이어 “다른 기관들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 honeypapa@naver.com
“사장님 공석 중”…公共기관 아닌 ‘空空기관’

실제 시사저널이 298개 공공기관의 경영공시를 바탕으로 조사한 결과 현재 임기가 끝난 후에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공공기관장이 22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유임이 확정된 수장은 4명이다. 기관장이 공석인 공공기관도 19곳에 달한다. 무려 41곳의 공공기관장이 임기를 넘겨 활동하는 사실상 유임 상태이거나 혹은 공석으로 무더기 ‘파행 운영’이 우려된다. 올해 남은 두 달 사이에 임기가 만료되는 기관장 또한 13명에 달해 경영 공백이 심각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임기가 끝난 공공기관장 가운데 의결 등을 거쳐 유임이 확정된 이는 총 4명이다. 고학찬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회장은 원래 지난 3월17일로 임기가 만료됐으나 곧바로 재선출돼 임기 3년이 연장됐다. 고학찬 회장은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한 전력이 있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출신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송종국 과학기술정책연구원장, 박인상 노사발전재단 이사장, 이범희 한국특허정보원 이사장 또한 유임이 확정됐다. 

임기 연장이 확정되지 않았지만 후임이 임명되지 않은 18곳의 경우 기존 기관장이 계속 출근하고 있다. 이 가운데 7개월 넘게 출근하는 이들도 있다. 곽인섭 해양환경관리공단 이사장은 지난 3월20일, 김의석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3월29일 각각 임기가 끝났지만 아직까지도 수장으로 활동 중이다. 특히 곽 이사장은 국토해양부 물류항만실장을 거쳐 해양환경관리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해 ‘관피아’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다. 이에 대해 정치권의 한 인사는 “세월호 침몰 참사 이후 관피아에 대한 눈길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관피아 수장이 유임하는 기관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외에 강기창 한국가스기술공사 사장, 허진규 광주과학기술원 이사장, 박선이 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유병한 한국저작권위원회 위원장 등도 지난 6월 임기가 만료됐다. 이어 7월에 임기가 끝난 기관장은 이원희 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 백헌기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이사장 등이다. 정일영 교통안전공사 이사장, 김춘선 인천항만공사 사장, 이계순 우체국금융개발원장, 정유신 한국벤처투자 대표이사, 변용찬 한국장애인개발원장은 8월에 임기가 끝났다.

(왼쪽부터)고학찬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회장, 곽인섭 해양환경관리공단 이사장, 김의석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 시사저널 구윤성·연합뉴스
임기 끝난 수장이 7개월째 출근도장

기관장이 공석인 곳도 적지 않다. 총 18곳의 공공기관이 현재 수장이 없는 상태다. 기관장의 장기간 공백으로 인해 일찌감치 직무대행 체제로 전환한 곳도 여럿 있다. 아시아문화개발원장 자리는 지난해 5월 이영철 전 원장이 물러난 후 17개월째 공석이다. 이경윤 원장 직무대행이 업무를 맡고 있지만 주요 문화 사업 진행을 위한 정책 결정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예컨대 오는 10월 말 완공돼 내년 9월께 문을 열기로 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 준비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시아문화전당 내 콘텐츠 개발과 제작을 도맡는 곳이 아시아문화개발원이기 때문이다. 선박안전기술공단 이사장 자리는 지난 5월 이후부터 쭉 비어 있다. 현재 함기영 이사장 직무대행이 업무를 대리하고 있다.

관피아 자질 논란이 일자 기관장이 스스로 물러나 공석이 된 곳도 있다. 울산항만공사 사장 직은 지난 7월12일 이후로 공석이다. 박종록 전 사장은 지난 6월 정부가 발표한 경영실적 평가에서 울산항만공사가 최하위 등급과 함께 기관장 해임 건의 대상 기관으로 분류되자 스스로 물러났다. 박 전 사장은 국토해양부 해양정책국장을 역임했다. 한국어촌어항협회 이사장 자리도 비어 있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 이후 이른바 ‘해피아(해수부+관피아)’들이 대거 퇴진했는데, 방기혁 전 어촌어항협회 이사장 또한 지난 8월7일까지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4월29일 조기 사퇴했다.  

이처럼 광범위한 인사 공백에 ‘관피아 논란’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공공기관장 인사는 세월호 참사 이후 중단되다시피 했다. 올해 공공기관장 임기가 끝나는 곳이 많아 수요는 많아졌지만 ‘관피아는 절대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인재풀이 그만큼 줄어들었다. 기관장 임기 만료 시기에 맞춰 공모를 진행했지만 관피아 논란으로 다시 공모를 진행하는 곳이 있을 정도다.

대한법률구조공단은 황선태 전 이사장의 임기가 지난 6월 끝난 이후 줄곧 이사장 직이 비어 있다. 법률구조공단의 한 관계자는 “지난 3월 이사장 공모가 추진됐지만 무산됐다”며 “(이사장 공모는) 법무부 소관이기 때문에 재공모 계획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밝혔다.

(왼쪽부터)김춘선 인천항만공사 사장, 박인상 노사발전재단 이사장, 최흥집 전 강원랜드 대표 ⓒ 연합뉴스
공공기관 운영법 ‘악용’ 심각   

현행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임기가 만료된 임원은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돼 있다. 1년 넘게 기관장 공백이 이어져도 후임 공모에 미적지근한 곳이 많은 이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관장 유임이나 공백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현직 관료들이 임기가 만료되는 기관장 등을 유임시키면서 자신들이 입성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2013년 6월 이영철 전 아시아문화개발원장이 아시아문화전당 전시예술감독으로 부임하자 일부 문화계 단체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 연합뉴스
최근 공공기관장의 대규모 인사 지연으로 인한 불만이 곳곳에서 터지자, 정부 부처 산하 기관들이 뒤늦게 ‘줄줄이’ 공모에 나서고 있다. 현재 기관장이 유임 혹은 공석 상태인 41곳과 올해 안에 임기 만료가 예정된 13곳까지, 올해 안에 50여 곳의 공공기관장 교체가 예정돼 있다. 관피아 대신 정치인과 교수 출신이 대거 공공기관에 진출할 가능성이 커 논란이 예상된다. 벌써부터 “관피아가 빈 틈새를 정피아(정치인+마피아)·교피아(교수+마피아)가 노리고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김용철 부산대 행정학과 교수는 “그동안 법률상 공공기관장 후보자 기준 조항이 ‘업무에 대한 경험과 학식이 풍부해야 한다’는 식으로 추상적이고 애매하다 보니 관피아 관행이 생겼던 것”이라며 “기관장 후보자 기준 조항을 세분화해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인사가 무분별하게 임명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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