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찾아줘'로 귀환한 데이빗 핀처의 영화 세계
  • 허남웅│영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10.22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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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자신이 쓴 가면 뽐내고 싶어 연기하며 살아”

데이빗 핀처 감독은 세계에서 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감독 중 하나다. 그는 감히 영화로 만들어질 것 같지 않은 소재로 걸작을 만들어내고, 시시해 보이는 이야기도 특별하게 꾸미는 재주를 지녔다. 신작 <나를 찾아줘>는 끝내주는 스릴러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관계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친 서늘한 보고서라 할 만하다. 

추악한 부부 관계의 이면 폭로

길리언 플린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그는 이 영화의 각색에도 직접 참여했다)한 <나를 찾아줘>는 결혼 5주년 기념일에 사라진 아내와 그로 인해 살인범으로 몰리는 남편의 사연을 다룬다. 사건 전까지 이들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부부였다. 아내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는 미국인들이 유년 시절 즐겨 읽던 어린이 동화 시리즈 <어메이징 에이미>의 실제 주인공이다. 남편 닉(벤 애플렉)은 실직을 하고도 유명 인사인 아내 덕에 술집을 차려 어렵지 않은 생활을 영위하던 중이었다. 

영화 ⓒ 이십세기폭스 제공
아내의 실종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닉의 처지를 안타까워했지만, 언론이 가세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닉이 웃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포착해 인간 말종으로 몰아가고, 이를 계기로 경찰은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경찰이 닉의 사무실에서 정체불명의 여자 팬티를 발견하고 실종 전까지 아내가 썼던 일기장을 입수하면서 닉은 유력한 아내 살해 용의자로 급부상한다. 닉은 정말 아내를 죽인 걸까.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보통의 스릴러라면 닉의 진범 여부와 사건의 진상을 이야기를 풀어가는 핵심으로 삼겠지만 데이빗 핀처는 여기엔 관심이 없다. 졸지에 용의자로 몰린 닉의 에피소드에 집중하던 영화는 상영 시간 중간에 이르면 에이미가 전면에 나서는 이야기로 서술 방식을 전환한다. 실종 사건을 전후해 닉과 에이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밝혀 진범 찾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관객에게 인지시킨다. 그런 다음 닉과 에이미의 시점을 교차로 편집하며 이들 부부의 진짜 속내를 폭로하는 것이다. 

추악한 부부 관계의 이면. 행복하게만 보였던 닉과 에이미의 관계는 아내가 실종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금이 간 상태였다. 한때 잘나가는 잡지사 기자였던 닉은 경기 악화로 실직하게 되고 에이미가 모아두었던 돈이 바닥나자 대도시 뉴욕에서 시골 마을로 집을 옮기기에 이른다. 닉은 아이처럼 플레이스테이션을 사들여 오락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그런 남편에게 에이미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다만 주변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했던 데는 이상적인 부부로 보이고 싶었던 에이미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모두가 선망한 <어메이징 에이미>의 실제 주인공으로서 동화 속 공주님처럼 현실에서도 완벽한 삶을 ‘연기’해온 그에게 부부 관계의 불화는 곧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 무고한 이도 졸지에 살인범으로 둔갑시키는 언론이 눈치라도 채게 되면 그간 누려왔던 부와 명성을 모두 날릴 수도 있기에, 닉과 에이미는 쇼윈도 커플이 되어 행복한 척해왔던 것이다.

이는 데이빗 핀처가 길리언 플린의 소설을 영화화한 결정적 이유다. “반전과 복잡함이 있는 스릴러의 특징과 플롯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인간관계에 대한 가장 핵심적이고 현대적인 관점을 보여준다는 점에 끌렸다.” 현대의 인간관계는 데이빗 핀처가 영화감독 초창기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주제다. 특히 겉으로 보기에 사회적 지위와 명성과 능력을 갖췄지만 이를 무리하게 유지하려다 관계의 파탄을 자초하는 이들에게 유난한 관심을 보여 왔다.

진실의 가치는 사라지고 말았다

<파이트 클럽>(1999년)의 잭(에드워드 노튼)은 유명 메이커만 찾다가 일상의 공허함을 느끼면서 일대일 맨주먹으로 격투를 벌이는 파이트 클럽에 빠져 결국 정체성을 잃고 만다. <조디악>(2007년)의 그레이 스미스(제이크 질렌할)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잘나가는 삽화가이지만 조디악 사건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잡히지 않는 범인을 평생에 걸쳐 쫓다가 폐인이 되고 만다. <소셜 네트워크>(2009년)의 마크 저커버그(제시 아이젠버그)는 또 어떤가. 온라인에서는 신으로 군림하지만, 오프라인에서는 친구 하나 없는 사회 부적응자로 묘사된다.

데이빗 핀처가 보기에 인간을 평가하는 세속적인 가치는 가면에 불과하다. 현대의 인간은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이 그 누구보다 화려하다는 걸 뽐내고 싶어 연기(演技)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핀처는 눈에 보이는 사실의 힘을 믿지 않는다. “사실이 진실에 다가서는 데 얼마나 효용을 발휘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찾아줘>를 보게 되면 닉과 에이미 외에도 연기에 능숙한 이들이 넘쳐난다. 닉을 표적 삼은 언론은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과장된 보도와 자극적인 수사로 대중을 현혹하고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은 증거만 없다뿐이지 진범이 누구인지 다 안다는 양 닉을 몰아붙이는 식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혈안이 된 현대의 인간관계에서 진실의 가치는 사람들의 관심 밖 영역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누가 더 연기를 리얼하게 잘해 많은 사람을 속이느냐가 현대 사회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법이 되었다. 아내의 실종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기자회견장에서 표정 관리에 실패해 궁지에 몰린 닉이 상황 파악 후 뒤로 갈수록 뻔뻔한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 그런 인간 본성 변화의 추이가 데이빗 핀처가 <나를 찾아줘>를 통해 전하려는 궁극적인 메시지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를 찾아줘>는 단순한 스릴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의 자장 안에서 읽으려는 시도가 꽤 있다. 그렇게 틀린 접근은 아니다. 실제로 데이빗 핀처는 자신이 히치콕인 양, 아니 히치콕의 가면을 쓴 것처럼 히치콕 영화의 익숙한 요소들을 <나를 찾아줘>에 의도적으로 배치한다.

<나를 찾아줘>의 원제는 ‘사라진 여자’라는 의미의 ‘Gone Girl’인데 히치콕은 <숙녀 사라지다 The Lady>(1938년)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특정 영화는 아니지만, 히치콕 영화에는 금발의 미녀 주인공과 오인된 남자의 테마가 공통으로 등장한다. <나를 찾아줘>에서 금발의 아내 에이미와 그녀를 죽인 범인으로 의심받는 닉의 존재는 누구라도 히치콕의 영화를 떠올릴 만한 설정임은 분명하다. 

다른 점은 <나를 찾아줘>가 결국에는 부부 관계의 비극에 초점을 맞춘 반면, <이창>(1954년),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년), <새>

(1963년) 등 히치콕의 대표적인 스릴러는 사랑하는 남녀의 결합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이다. 겉으로는 히치콕 영화의 전형을 따르는 척하면서 이면에서는 전혀 다른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핀처의 연출력은 <나를 찾아줘>의 닉과 에이미 커플의 겉과 속이 다른 관계를 고스란히 형식으로 치환한 경우다.

영화적이라는 건 <나를 찾아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위기를 맞은 부부의 사연을 스릴러로 접근한 작품은 꽤 있었지만 데이빗 핀처처럼 기존 영화의 문법을 계승하는 ‘척’ 전혀 다른 차원으로 조립한 사례는 드물다. <나를 찾아줘>는 데이빗 핀처가 왜 이 세상에서 영화를 가장 잘 만드는 감독인지를 다시 한 번 증명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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