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넘어 갈라지는 소리로 노래하면 기맥히지 않겠소”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10.23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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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20주년 맞은 ‘찔레꽃’ 소리꾼 장사익

장사익(65)은 2004년 10월 데뷔 10주년 기념으로 <10년이 하루>라는 공연을 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흘렀다. 데뷔 20주년. 10월30일 서울 공연을 시작으로 20주년 기념 순회공연이 시작된다.

그는 소리꾼이 되기 전 25년 동안 15개의 직장을 바꿔가며 ‘헛갈리게’ 살았다. 노래로 승부를 내겠다는 결심을 했던 무렵인 1993년 5월 잠실 주공아파트 5단지에 살던 그는 버스 타러 가던 길에 어디에선가 풍겨오는 향기를 따라가다 덤불 속에 숨어 있는 하얀 찔레꽃을 발견하고 하염없이 울었다. 마흔다섯 되던 1994년 11월4일 피아니스트 임동창의 부추김으로 홍대 앞 소극장에서 가수로서 첫 무대를 가졌다. 1995년 데뷔 앨범 <하늘 가는 길>을 냈고, 그 앨범의 첫 번째 트랙이 <찔레꽃>이었다.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이라고 노래하던 그는 ‘가장 한국적인 목소리’라는 평가를 들으며 20년 동안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20주년 기념 콘서트 이름을 <찔레꽃>이라고 이름 붙였다.

ⓒ 시사저널 박은숙
삶과 죽음은 모두 축제, 노래는 위안

인터뷰를 하기 위해 서울 홍지동 집으로 찾아가는 길에 가방 하나를 들고 홍지천을 따라 걸어가는 그를 만났다. 강남 스튜디오에서 8집 앨범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신보를 들려줬다. <꽃인 듯 눈물인 듯>이라는 이름을 붙인 새 앨범에는 <상처>로 시작해 <청춘고백>까지 8곡이 담겨 있다. 그가 노래를 들려주며 설명을 한다. “<우리는 서로 만나 무엇을 버릴까>는 이현주 목사의 시로 두물머리에서 남한강은 ‘남’을 버리고, 북한강은 ‘북’을 떼버리고 한강이 되어 흐른다는 얘기다. 여러 가지 상징성이 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는 2년 전 공연 제목인데 내 자전적 이야기다. 부모에게서 생명을 얻은 기쁨과 고마움, 가는 골목마다 있었던 친구와 선생님이 고맙고, 늦은 나이에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살 수 있는 인연이, 가을꽃처럼 뜨거운 세월 다 보낸 뒤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게 기쁘다. <서풍부>는 김춘수 시인의 노래를 빌려온 것이다. 9분짜리 노래로 나는 구음만 한다. 윤회 같은 노래다. 이런 게 한국의 소리고 월드뮤직이라고 생각한다. <상처>는 신곡인데 마종기 시인의 노래다. ‘내가 어느덧 늙은이의 나이가 되어 사랑스러운 것이 그냥 사랑스럽게 보이고 우스운 것이 거침없이 우습게 보이네’ 이 대목이 너무 좋아서 내가 곡을 지었다. 이런 노래는 80쯤 먹고 불러야 하는데 너무 일찍 부르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는 이번 앨범에 3집에 실렸던 정호승 시인의 <허허바다>를 다시 녹음해 실었다. 이날 녹음실행도 <허허바다> 트랙의 징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손보러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는 ‘살아도 산 것이 없고 죽어도 죽은 것이 없네’라는 <허허바다>의 노랫말이 “세월호를 다룬 노래 같다”고 했다. 실제로 지난 6월10일 그는 조계사에 모인 세월호 유족 앞에서 이 노래를 후려치듯 불렀다. “유행가도 아니고 국악도 아닌 이런 노래가 한국의 소울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있는 힘껏 소리를 쏟아내면 개운해지게, 거기 있는 모든 유족이 맺힌 마음을 쏟아내게 소리를 힘껏 질렀다. 모든 근심 걱정은 갖고 있으면 병이 되니까 훌훌 털어버려야 한다. 굿이나 스님들 말씀, 목사님 말씀이 모두 음성 공양이라고 하지 않나. 위로해주고 덕담해주고. 나도 그렇다. 노래라는 게 즐거운 것은 더 즐겁게 해주고 슬픔은 가볍게 해주는 샤먼 같은 역할이다. 누가 슬픔 속에서 노래를 부를까 싶지만 우리는 그런 역할을 통해 슬픔을 삭혀주고 위로해주는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난 9월 문상 갔던 ‘거문고 하는 친구’의 모친상 얘기를 전해줬다. 돌아가신 친구의 어머니는 시인이었다. 장례식장 분위기가 허허로웠다. “엄마가 딸의 거문고 소리를 그렇게 좋아하셨다. 내가 ‘엄마 앞에서 거문고를 뜯어라. 나도 곁들어서 노래하겠다’고 했다. 슬픈 일에 와서 노래하는 게 남세스러울 수 있는데 가족이 좋다고 했다. 내일 출상인데 밤에 후배·제자들 다 모여 손주가 할머니 시를 낭송하고 아들이 엄마 추모하는 얘기를 하고 딸이 거문고를 뜯었다. 내가 노래하고 나중에는 ‘부모님 은혜’도 다 같이 부르고. 상주가 행복하다고 했다. 태어난 것도 축제고 장례도 축제다. 춤과 노래가 빠질 수 없다.”

대개의 유행가는 꽃피는 봄날과 연애의 달달함을 이야기하지 인생사의 겨울에 대해서는 금기인 양 취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앨범에는 이런 노래가 꼭 들어 있다. 가사만 그런 게 아니라 형식도 낯설다. “‘(노래를 부르며) 하얀 꽃~ 찔레꽃’(<찔레꽃>) 이 대목은 박자도 없고, 어떨 때는 후다닥 뛰어가버린다. ‘얘야 문 열어라!’(<삼식이>)하고 뛰쳐나가고, ‘엄마 꽃구경 가요~’(<꽃구경>)하며 판소리의 아니리 같은 형식을 빌려오고. 박자를 빌려오고 바꾸기도 하고 국악의 모티브도 가져오고. 이런 노래를 하니까 사람들이 처음에는 적응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10년쯤 되니까 내 노래 호흡에 사람들이 적응이 된 것 같다.” 

‘적응’ 정도가 아니라 그는 지금 인기 가수다. 대극장 무대를 꽉꽉 채우고 미국 LA와 뉴욕, 시카고 공연을 2년에 한 번씩 해도 모두 ‘흑자’를 내는 대표적인 가수가 됐다. “데뷔한 뒤 딱 2년이 지난 1996년 1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처음 공연을 했다. 운이 좋았다. 남들은 10년, 20년 해도 서기 힘들다는데. 지금 같은 때 데뷔했다면 힘들지 않았을까. 인생이 살 만하다는 게 그때 H.O.T.나 서태지, 김건모 같은 친구가 쏟아져 나왔는데 나 같은 사람도 어영부영 이렇게 살아남았다.”

사실 그의 유명세는 <동백아가씨>나 <봄날은 간다>같이 널리 알려진 ‘뽕짝’을 그만의 독특한 박자감과 발성으로 불러젖히며 시작됐다. 전통 국악 공연 뒤풀이의 판막음용으로 단골로 서던 그의 노래를 지인들이 ‘우리만 보기에 아깝다’고 발굴한 것. 그도 알고 있다. 사람들이 그의 ‘장사익표 뽕짝’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지금도 앨범이나 공연은 유행가 반, 내 노래 반씩 한다.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니까. 내가 지은 노래로 메시지를 전하고 유행가로 풀어준다. 공연장에서 웃고 울고 하면 몸이 환해진다. 심난한 소리만 하면 사람들이 마음을 닫는다(웃음). <허허바다>를 듣고 ‘저게 무슨 소리인가’ 하는 분도 있다. 그러다 유행가가 나오면 또 관광열차처럼 막 호응한다. 그래서 공연 뒷마디에는 유행가를 부른다. 유행가를 부를 때는 오리지널과는 다른 새로운 느낌으로 부르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 행복을 뿌리는 판 제공
“장사익, 가장 한국적인 소리”

유행가는 따뜻한 봄이나 뜨거운 여름의 춘정을 다루기 마련이다. 반면 그가 자주 노랫말을 빌려오는 시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들어 있다. “요즘 세상은 여름과 겨울만 있다. 꽃피고 새 우는 봄도 지겨워지기 시작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싫증날 때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온다. 봄·여름·가을·겨울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아까 전철 타고 오다 보니 차 안의 사람들 98%가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더라. 가을 햇살, 나뭇잎, 하늘도 보고 옆 사람도 쳐다봐야 하는데…. 시집을 자주 보는데 그게 돈 버는 일이다(웃음). 좋은 시 하나 고르면 노래가 나온다. 나는 공부를 안 해서 시는 못 짓고….”

그는 “사는 게 공부”라고 했다. “두 달 전에 체중계 갖다놓고 마누라와 겨루기를 했다, 누가 더 많이 살 빼나. 그렇게 5kg을 뺐다. 근데 노래를 하다 보니까 찔레꽃 후렴이 안 오더라. 이비인후과 가니까 선생이 가슴을 치더라. 운동을 해서 살을 빼면 근육도 빠진다고. 성대 근육도 빠진 것이다. 이후 한 달 동안 고생해 지금은 90%까지 올려놨다. 자연스럽게 가야지, 한꺼번에 뭐를 하려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한꺼번에 팩 돌아서면 병이 된다(웃음). 오늘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행복해지려고 사는데 사건·사고가 이어지고 노래도 안 되고, 매일이 공부다. 어떻게 지혜롭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그게 세상 사는 것이다.”

그는 장모 이야기를 꺼냈다. “10년 전 세종문화회관 공연에서 내가 ‘2014년 가을에 여기에서 만나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때 인천에 사는 77세의 장모도 보러 오셨다. 공연 보고 오신 뒤에 장모가 ‘나도 이제 운동하네, 자네하고 약속하지 않았나, 자네 공연 10년 뒤에 보러 가려면 운동해야지’. 그 말을 듣고 머리가 띵했다. ‘쉰여섯 살인 나한테는 10년이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노인에게는 10년이란 세월이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구나.’ 올해 장모가 87세이신데 이번에도 표 사서 공연 보러 오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그도 이제는 10년 뒤, 20년 뒤를 생각하는 것일까. “(남은 게) 1~2년이 될지, 30년이 될지, 40년이 될지 누가 아나. 시간 가는 게 신비하고 신기하다. 내가 지금 45세라면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겠나. 노래는 내 얘기를 하는 것인데 삶의 윤회나 죽음, 지혜에 대해 지금에서야 노래할 수 있는 것이지 젊었을 때는 그런 것을 몰랐다. 그때그때 내가 느낀 것을 기록하는 게 녹음이다. 늙어서 90세, 100세 됐을 때, 그때 노래하면 정말 기막힐 것 같다. 하지만 목소리는 안 나올 것이고, 허리는 굽었을 것이다. 그때는 읊조리기만 해도 기맥힌 것 아닌가.”

그는 지금이 “좋다”고 했다. “소리꾼이 되기 이전에는 생활이 부잡스러웠고 능력도 없어 한 직장에서 2~3년을 못 버텼다. 이제 노래는 20년 이상 해온 내 천직이다. 다른 것은 못한다. 장관을 시켜도 못한다. 이대로 고만고만하게 노래하고 살 것이다. 있는 그대로, 1년에 한두 개 노래 만들고, 공연하고, 돌아다니고, 뭐 있나. 더 이상 많이 알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더 이름난다고 밥을 네 끼 먹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여든에 돌아가셨는데 나는 아흔은 살 것 같다. 아흔의 절반이 45인데, 나는 45세에 인생의 밤과 낮이 바뀌었다. 깜깜한 밤에서 낮으로. 기맥힌 일이다.”

그의 20주년 기념공연은 언제나처럼 그의 부인 고완선씨(02-396-0514)가 꾸렸고 10월30일 서울을 시작으로 울산-대구-광주-대전-부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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