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할 주인공 없어 ‘인기의 문’안 열려
  • 하재근│대중문화 평론가 ()
  • 승인 2014.10.2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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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 모았던 <비밀의 문> 시청률 저조한 까닭

하반기 최대 기대작이었던 드라마 <비밀의 문>이 마침내 시작됐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대왕 역할로 연기대상을 거머쥐었던 한석규가 영조로, 병역을 마친 <건축학개론>의 청춘 스타 이제훈이 사도세자로 등장하는 사극이다. 거기에 <하얀 거탑> 이후 비열한 악역의 대표 주자 중 한 사람으로 떠오른 김창완을 비롯한 중견 연기자가 뒤를 받친다. 이 정도 ‘스펙’이니 당연히 상반기 <정도전>을 잇는 하반기 대표작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모아졌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초라하다. 8%대로 시작해 4회에 10% 선을 돌파할 때까지만 해도 상승세를 기대하는 팬들이 있었지만, 5회부터 7%대로 급락해 8회엔 6%대까지 떨어졌다. 드라마의 만듦새 자체를 탓하는 사람은 없다. <추노> <뿌리 깊은 나무> 등 웰메이드 사극의 맥을 잇는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인기에 탄력이 붙지 않는다. 많은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화제작   <비밀의 문>에 왜 인기의 문이 열리지 않는 걸까.

드라마 포스터 ⓒ SBS 제공
이 작품은 한 화원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는 미스터리가 없다. 범인을 처음부터 다 알려주고 시작한다는 뜻이다. 살인을 교사한 건 노론의 수장이고, 그 사건을 덮으려는 자는 영조다. 비밀의 문을 열어젖힌 사도세자는 결국 노론과 영조의 역린을 건드리게 된다. 제작진은 이런 설정을 통해 사도세자를 재평가하고 영조가 왜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누구도 응원할 수 없는 극의 탄생

드라마 속에서 사도세자 주위엔 우군이 없다. 사도세자의 충신이자 훗날 정조의 충신이 되는 채제공 단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믿지 못할 사람이다. 노론은 그들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도세자를 당연히 적대시하고, 아버지인 영조는 툭하면 선위 파동을 일으키며 아들을 시험하는가 하면, 소론은 사도세자를 자신들의 집권을 위해 이용하려고만 한다.

모두가 썩어버린 거대 기득권 집단과 싸우는 주인공, 혹은 누구 하나 믿을 사람 없는 처지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익숙한 구도다. 올여름 ‘거족적’ 흥행을 일궈냈던 <명량>도 이런 구도였다. 이 영화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적은 물론 아군조차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홀로 전투를 치렀고, 바로 그런 설정 때문에 관객이 더욱 열광했다. 작품은 반역을 하지도 않았던 배설을 반역자로 만들면서까지 이순신을 고독한 처지로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적과 아군 모두로부터 공격받으면서도 오로지 백성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는 주인공을 그린 것이다.

사도세자도 그렇게 분투한다.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힘없는 백성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해 싸우고 또 싸운다. 그렇데 왜 시청자의 응원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명량>과 <비밀의 문>이 갈린다. <명량>은 관객이 응원할 만한 주인공을 제시해줬다. 반면에  <비밀의 문>에는 딱히 응원할 대상이 없다. 그저 꽉 막힌 상황이 답답할 뿐이다.

<비밀의 문>에서 비밀의 열쇠가 되는 것은 ‘맹의’라는 문서다. 이것은 노론의 경종 암살 모의를 담은 연판장인데, 바로 여기에 영조의 서명이 들어 있다. 경종의 이복동생으로 왕세제였던 영조가 노론의 반역에 가담해 형을 죽였다는 증좌인 셈이다. 이 원죄로 인해 영조는 노론에 휘둘리며 탕평책이나 균역법 등 기득권 구조를 깨는 개혁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한다. 영조는 맹의의 비밀을 완전히 묻어버리고 개혁정책을 펼치려 한다.

시체로 발견된 화원은 바로 맹의의 비밀을 아는 자였다. 사도세자가 그 사건을 캐면서 맹의에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이 초반 내용이었다. 이때 시청자가 사도세자를 응원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비밀에 다가갈수록 위협감을 느낀 영조가 노론과 가까워지면서 개혁이 오히려 후퇴하기 때문이다. 개혁을 꿈꿨던 영조는 위기의식으로 인해 점점 왕권에만 집착하는 인물이 되어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도세자가 영웅이 아니라 공연히 들쑤시고 다니면서 일을 키우는, 앞뒤 분간 못하는 청소년처럼 인식됐다.

감정이 널뛰며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는 영조에게도 시청자의 몰입이 일어나긴 힘들다. 한국 사극계의 공적으로 자리 잡은 노론은 말할 것도 없고, 당리당략만 따지는 소론에게도 감정 이입이 어렵다. 결국 시청자가 누구도 응원할 수 없는 극이 탄생한 것이다. 응원할 사람이 없으면 시청자는 극을 남의 일처럼 심드렁하게 보게 된다. 세상에 나와 아무 상관없는 남의 일처럼 재미없는 것은 없다. <왔다 장보리> 같은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누구를 욕해야 할지를 선명하게 알려준다. 시청자는 보리가 당하면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안타까워했다. <비밀에 문>은 그런 구도를 만들지 못했다.

거기에 한석규의 캐릭터는 홀로 너무 뜨겁고, 김창완에겐 노론의 수장이라 할 만한 무게감이 부족해 불꽃 튀는 연기의 격돌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도세자를 돕는 민간 탐정 역의 소녀는, 왜 그가 가족과 지인들 전체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타인의 사건에 몰두하는지가 설득력 있게 표현되지 않아 역시 몰입이 어려웠다. 이런 탓에 동시간대 1위를 하는 <야경꾼일지>보다 훨씬 잘 만든 작품임에도 시청률에서 밀리는 것이다.

의 주요 배역. 위는 극 중 서지담 역의 김유정, 아래는 영조 역의 한석규와 사도세자 역의 이제훈. ⓒ SBS 제공
사도세자 재조명은 계속된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한국 대중이 느끼는 조선 역사상 가장 아쉬웠던 순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아쉬웠던 순간의 포문을 여는 것은 광해군이다. 광해군이 서인(노론의 모태)의 반역을 진압하고 계속 집권했다면 병자호란의 치욕이나 훗날 노론의 패악도 없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이 아쉬움은 영화 <광해>로 표현됐다.

그다음은 소현세자다. 인조의 아들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 개화사상을 갖게 된 인물이다. 소현세자가 순조롭게 왕위에 올랐다면 조선이 탈레반에 버금가는 성리학 통제 사회가 되진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다. <추노> <삼총사> 등 많은 작품이 소현세자 소재를 취했다.

사도세자가 그다음에 등장하는 아쉬움이다. 그가 노론의 등쌀에 죽임을 당하면서 조선이 더욱 기울었고, 이는 그 아들인 정조 대의 아쉬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정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승하함에 따라 조선은 노론 천하가 됐고 그때의 질곡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네티즌은 느낀다.

대중에게 노론은 기득권 세력의 상징 같은 존재다. 나라가 어떻게 되건 말건, 백성이 어떻게 살건, 오로지 자신들의 권세만 탐하는 이들 말이다. 지금 현재의 사회 지도층이 그렇다고 느끼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가 ‘서인-노론’과 대결하는 지도자에게 열광한다. 이런 기본적인 구도는 계속 이어질 것이고, 따라서 설사 <비밀의 문>이 상업적으로 실패한다 하더라도 사도세자에 대한 재조명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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