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오류, “잘못 인정 않는 고집이 1만8000명 울렸다”
  • 김지영 기자 (abc@sisapress.com)
  • 승인 2014.10.2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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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수능 세계지리 8번 오류…평가원의 폐쇄성이 빚은 참극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 했다. 모두들 뜯어말렸다. 보나마나 계란이 깨질 거라고 했다. 그런데 바위가 깨졌다. 1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함께했던 학생 59명이 22명으로 줄어들었다. 수입도 80% 감소했다. 간절히 바랐던 승리였다. 하지만 ‘위너(winner)’는 없었다. 이겼지만 그간 겪었던 피해를 보상받을 길은 여전히 막막하다. 201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세계지리 문제 8번에 대해 처음으로 이의제기를 한 전직 EBS 강사 박대훈씨 이야기다.

1994년 수능이 도입된 이후 출제 오류를 법원이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 수능에서 오류가 난 적은 2004, 2008, 2010학년도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재판에서 이겼지만 그는 피곤해 보였고 목소리에는 기쁨보다 불안감이 깃들어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첫 마디였다.

지난해 세계지리 8번 문제(오른쪽 사진). 이 문제의 정답은 ‘답이 없다’이다. 서울 고법은 10월16일 이 문제에 오류가 있다고 판결했다. 법원이 수능 오류를 인정한 첫 판결이다. 박대훈 전 EBS 강사(사진)가 문제제기를 한 지 1년 만이다. ⓒ 시사저널 최준필
박대훈 강사는 이번 수능이 예고된 사고였다고 강조한다. “2년 전에도 똑같은 사고가 일어났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평가원)이 낸 2012년 9월 수능 모의고사 세계지리 9번에서 인구센서스 자료를 활용한 똑같은 유형의 문제가 나왔다. 그때도 평가원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묵살했다. 당시 평가원 책임자가 지난해 수능 세계지리 과목을 총괄·기획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담당자의 고집이 1만8000여 명의 피해자를 만든 셈이다.”

평가원에 출제·검토위원으로 수차례 참여한 복수 관계자의 말을 종합하면, 지난해 수능시험 전에 수능 출제 위원과 검토위원 내부에서 문제제기가 이뤄졌는데 이를 평가원에서 묵살했다고 한다. 세계지리의 경우 교수진으로 구성된 5명이 출제한다. 출제위원은 수능 한 달 전쯤 외부와 격리된 곳에서 ‘감금’ 생활을 한다. 그런데 실제 문제를 내는 기간은 일주일 정도뿐이다. 출제 이후 모두 세 번에 걸친 문제 검증 과정이 있다. 검증위원은 주로 현직 교사로 구성되는데 세계지리의 경우 1, 2차 현직 교사 각 5명이 일주일 단위로 문제를 검토한다. 이후 사회탐구 연관 과목 출제진 등이 함께 모여 문제의 오류를 검토하는 ‘교차 검토’가 이뤄진다. 수차례에 걸친 검토 과정에서도 결국 오류를 걸러내지 못한 것이다.

2년 전 오류 책임자가 수능 세계지리 총괄

박 강사는 지리라는 소외 과목 특성에 얽힌 평가원 내부의 폐쇄성을 지적했다. “평가원이라는 곳은 주로 대학교수를 희망하는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 교수 임용 전 단계로 거쳐 가는 과정으로 인식된다. 박사 이상 연구원들은 이곳에서 평균 3~5년 정도 근무하며 그들이 출제위원, 즉 교수들을 선발한다. 이들과 출제를 명분으로 한 달가량 합숙하면 자연스럽게 인맥이 형성된다. 전국에 지리학과가 있는 대학이 몇 군데 없는데, 다 아는 사이에 강한 문제제기는 당연히 힘들지 않겠나.”

실제로 수차례 평가원에서 수능 출제에 참여한 한 인사는 평가원 내부에서의 이의제기가 형식적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평가원 내부에서 문제에 대해 이상이 있다고 해도 해당 과목을 담당하는 평가원 직원이 ‘확인해보겠습니다’ ‘확인했습니다’라는 말만 하면 그걸로 이의제기는 끝”이라며 “평가원 수능 담당자의 입김은 세지만 검토위원이 오류를 시정하라고 강제할 권한이 없다”고 밝혔다.

지난해 세계지리 8번처럼 ‘답이 없음’이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발생한 것도 평가원으로선 큰 부담이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평가원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의 말이다. “지금까지 수능 문제 오류는 보기에 두 개 이상의 정답이 있었다. 예를 들면 보기 1번도 맞고, 2번도 맞는 경우였다. 하지만 이번은 문제 자체에 ‘답이 없다’. 문제가 평가 도구로서 가치를 상실하게 돼 그 심각성이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다. 평가원장이 100% 옷을 벗어야 했을 텐데 불명예 퇴진을 하기 싫으니까 대형 로펌을 고용해 소송으로 시간을 끌면서 자신은 ‘명예롭게’ 퇴진한 것이다.”

실제로 성태제 전 평가원장은 지난해 수능 출제 오류에도 불구하고 2011년 원장에 취임한 후 3년의 임기를 꽉 채워 퇴임했다. 그를 제외하곤 평가원 원장 임기를 채운 경우는 거의 없다. 성 전 원장은 재임 시절 출제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법무법인 광장을 고용해 수험생과 법적 공방을 벌였다. 기자는 그의 입장을 직접 들어보고자 여러 차례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각에서 제기된 ‘서울대 지리학과-평가원’으로 이어지는 ‘학(學)피아’ 논란은 이번 문제에서 핵심이 아니라는 지적이 많다. 수능 출제에 관여한 평가원의 한 관계자는 “이번에 평가원에서 세계지리 출제를 담당한 사람은 비(非)서울대 출신”이라며 “오히려 지난해 수능 출제 오류 논란으로 인해 올해 평가원이 세계지리 출제·검토에 서울대 출신을 더 많이 고용했다. 어느 대학 출신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평가원 자체가 문제”라고 설명했다.

박대훈 강사는 당초 소송까지 할 생각이 전혀 없었으나, 자신이 문제를 제기하자 “가만히 있어라, 다친다”며 평가원 측에서 친한 친구를 통해 회유했다고 한다. 논란이 계속되자 당시 성 원장은 “1등급 학생은 다 맞혔다”고 공식 발표를 하기도 했다. 3점짜리 문제였다. 틀리면 사회탐구 등급이 1등급에서 최대 3등급까지 떨어질 수 있었다. 실제 이 문제를 틀려 수능 성적 최저등급 미달로 이화여대 수시에서 최종 불합격을 받은 학생도 나왔다. 그럼에도 사과는커녕 학생을 폄하하는 듯한 평가원의 태도에 박 강사는 폭발했다. 소송까지 불사하게 된 계기다.

“좋은 학교 나와 공부도 많이 하신 분들이 사과는커녕 ‘공부 잘하는 애들은 맞혔다’며 학생들에게 잘못을 전가하는 태도가 학생들에겐 대학에 떨어진 것보다 더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요?” 인터뷰가 끝날 때쯤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평가원에서 상고를 할까요? 상고하면 학생들은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할까요?” 

 

피해 학생은 어떻게 되나 


2심까지 참여한 학생 22명은 자신을 떨어뜨린 대학을 상대로 ‘불합격 취소 소송’을 할 수 있다. 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 2심 항소를 이끈 박현지 변호사의 말이다. “대학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도 세계지리 8번 한 문제로 대학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에 승소하기는 어렵다. 이마저도 항소심에 참여하지 않은 다른 학생들은 소를 제기할 자격 요건을 갖지 못한다. 다만 이 문제를 틀린 1만8000여 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는 있다. 하지만 피해액이 100만원을 넘기긴 어려울 것이다. 결국 피해 학생을 실질적으로 구제할 마지막 기회는 지난해 12월 평가원이 대학 입시전형이 이뤄지기 전에 문제 오류를 인정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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