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10. 신라와 고려 때 통일, 심각한 후유증 남기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10.30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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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의 통일정책 부재에 대한 우려 목소리 높아

한국사에는 두 번의 통일이 있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과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다. 그런데 신라는 ‘무력 통일’인 반면, 고려는 ‘평화 통일’에 가까웠다. 신라의 무력 통일은 사실 외교전이 절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나라가 처음부터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대업 3년(607년) 장(璋·백제 무왕)이 사자 연문진을 보내 조공했다. 그해에 또 사자 왕효린을 보내 공물을 바치면서 고구려 토벌을 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도 수나라와 손잡고 고구려를 치려고 했던 것이다. 수·당의 자리에서 백제와 신라는 마찬가지 관계였다. 당나라의 이런 외교정책은 신라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바뀌게 된다.

의자왕이 재위 2년(642년) 8월 장군 윤충을 보내 대야성(지금의 합천)을 함락시키자 신라의 성주 김품석 부부가 자결했는데, 김품석은 바로 김춘추의 사위였다.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가 거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망연자실하다가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하지 못하랴”라고 말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드디어 두 나라가 전면전에 돌입한 것이다.

후삼국의 통일을 다룬 드라마 의 주인공 궁예와 왕건. ⓒ KBS 캡처
신라, 삼국 통일 후 백제 왕조 탄압

김춘추는 평양으로 가서 고구려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되레 과거 진흥왕이 차지한 마목현(조령)과 죽령의 반환을 요구했고, 김춘추가 거절하자 투옥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이용해 겨우 빠져나온 김춘추는 좌절하지 않고 647년에는 야마토 왜(大和 倭)를 방문했다. 백제의 한 지방에 불과했던 야마토는 645년 나카노오에가 왕실을 좌지우지하던 백제계 호족 소가노이루카를 참살하는 태극전(太極殿)의 변, 즉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일으켰다. 김춘추는 이것을 반(反)백제계 정변으로 생각하고 야마토로 간 것이지만, 나카노오에 역시 백제 세력에 불과한 것을 깨닫고 그냥 돌아왔다.

김춘추는 이번에도 좌절하지 않고 진덕여왕 2년(648년) 아들 문왕을 대동하고 당나라로 건너갔다. 3년 전 고구려 원정 실패로 상심해 있던 당 태종은 아들까지 데리고 장안(지금의 서안)을 찾아온 김춘추의 연합 제의를 수락했다. 이렇게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었다. 동시에 당나라의 백제 우호정책이 적대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삼국사기> 문무왕조는 당 태종이 김춘추에게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신라에 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라는 영토 분할 협정 내용은 민족사의 견지에서 볼 때는 고구려 북방 영토와 백제의 해양 영토 대부분의 상실을 뜻하지만 신라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자국 강역의 두 배 이상 확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런데 백제의 왕성을 무너뜨린 후 보여준 신라 왕실의 태도는 역사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태종 무열왕 7년(660년)조는 의자왕이 도주한 후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이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하였다. 법민(문무왕)이 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너의 아비가 나의 누이를 억울하게 죽여서 옥중에 묻은 적이 있다. 그 일은 나에게 20년 동안 마음이 아프고 머리를 앓게 했는데 오늘 너의 목숨은 내 손안에 있구나!” 융은 땅에 엎드려서 말이 없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660년) 7월조)

이것이 신라 왕실의 한계였다. <삼국사기> ‘흑치상지 열전’은 흑치상지가 항복했지만 당나라 소정방이 의자왕을 가두고 병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자 백제 부흥군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일본에서 귀국한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을 임금으로 추대하자 10일 만에 3만의 병력이 모여서 200여 성을 회복했을 정도였다. 신라 왕실이 의자왕과 부여융 등을 임금의 예로 대했으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 문무왕 21년(681년)조는 문무왕이 세상을 떠날 때 남긴 조서에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합의 관점이 아니라 복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백제 망국인들은 신라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라는 백제인들의 마음을 사는 화학적 통합엔 실패했다. 그 결과 240여 년 후에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각각 일어나는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 신라는 물리적 통일은 성공했지만 화학적 통일에는 실패한 절반의 통일이었다.

강력한 왕권 추구한 궁예·견훤 통일 실패

반면 고려의 왕건은 달랐다. 견훤은 신라 진성여왕 6년(892년) 완산주(전주)에서 후백제를 일으켰는데, <삼국사기> 진성여왕조는 ‘무주(광주) 동남쪽의 군현이 모두 이에 항속(降屬)했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 ‘견훤 열전’은 ‘견훤이 은근히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서울 서남쪽 주현들을 치니 가는 곳마다 호응하여 그 무리가 달포 사이에 5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전한다. 견훤은 “내가 지금 도읍을 완산에 정했으니 어찌 감히 의자왕의 숙분(宿憤)을 씻지 않으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멸망한 지 230여 년이나 지났는데 ‘의자왕의 숙분’을 갚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통일 후 신라의 백제 유민정책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삼국시대를 연 또 한 명의 인물인 궁예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사기> ‘궁예열전’은 궁예가 901년 왕을 자칭하면서 “옛날에 신라가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평양 옛 서울이 황폐해져서 풀만 무성하니 내가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옛 고구려인들 역시 신라에 원한을 갖고 있었다. 견훤과 궁예는 모두 신라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둘은 또한 각지를 장악한 호족들의 세력권을 인정하기보다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다.

후삼국시대에는 견훤이나 궁예의 승리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그 승자는 궁예의 부하 왕건이었다. 그 승패는 호족정책에서 갈렸다. 궁예가 호족들을 숙청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려 하자 호족들이 강력히 반발했다. 918년 6월 궁예 휘하의 장군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 등이 “궁예가 신료를 목 벤다”면서 왕건을 추대하자, 대다수 호족이 가세해 ‘앞뒤에서 분주하게 달려와 따르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먼저 궁성의 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사람이 또한 1만여 명에 달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궁예는 호족들의 반란으로 쫓겨나 918년 평복으로 갈아입고 산속으로 도망갔다가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일생을 끝내고 말았다. 왕건은 918년 6월15일 포정전에서 즉위해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지었다.

신라가 유명무실해진 가운데, 후삼국의 승패는 왕건과 견훤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양 세력 사이의 쟁패 또한 군사력이 우세했던 견훤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925년 조물성(경북 선산의 금오산성) 회전에서 불리함을 느낀 왕건이 화친을 청하면서 사촌동생 왕신을 인질로 보내야 했을 정도로 견훤이 유리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운명이 바뀌는 것은 신라에 대한 정책 때문이었다. 신라는 독립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할 수 없는 종속변수로 전락했으나, 신라의 지지를 얻는 것은 대세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외교정책에서 왕건은 견훤보다 한 수 위였다. 견훤은 시종일관 신라에 적대적이었던 반면, 왕건은 유화책으로 일관했다. 927년 9월 견훤은 서라벌까지 진격해 경애왕(재위 924~927년)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한 후 왕제(王弟) 김부에게 왕위를 잇게 했으니 그가 바로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재위 927~935년)이었다. 다급해진 신라가 손을 내밀자 왕건은 정예 기병 5000명을 이끌고 대구의 공산(팔공산) 아래에서 견훤과 맞붙었다. 그러나 왕건은 장수 김락과 신숭겸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고 말했다.

10월4일 2014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온 북한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 겸 대남담당 비서,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노동당 비서가 우리 측 관계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왕건, 호족 포용정책으로 민심 얻어

이처럼 군사력에선 견훤이 절대 우위였지만, 신라 전체를 적으로 돌린 견훤은 결국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는 패하고 말았다. 왕건은 패전하고 두 장수까지 잃었지만, 그 대가로 천년 왕국 신라의 민심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각지를 장악한 호족들은 견훤의 무자비성을 두려워하며 등을 돌렸다. 왕건은 이와는 달리 고려 개국 후 각지의 호족들에게 ‘후한 선물과 함께 자신을 낮추는 글’을 보내는 중폐비사(重幣卑辭) 정책으로 호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왕건이 호족들을 포용하기 위해 사용했던 또 다른 정책이 혼인정책이었다. 935년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항복하자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을 취해 신성왕후 김씨로 삼고, 자신의 두 딸은 경순왕에게 출가시켜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었다. 왕건은 6명의 왕후와 23명의 부인을 두는데 나주 오씨 등 특수한 예를 빼면 대부분 각지의 유력 호족 집안이었다. 왕건은 이런 호족연합정책으로 견훤을 꺾고 후삼국의 승자가 되었다.

왕건의 통일은 무력을 전혀 수반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신라 왕실을 비롯해 각지 호족들의 지분을 일정 정도 인정해주면서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낸 평화 통일이었다. 이런 통일 방식 또한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호족들의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한 결과 호족들 사이의 치열한 권력투쟁은 불가피했다. 고려 초기 궁중의 숱한 정변은 왕건의 호족연합정책이 낳은 산물이었다. 이처럼 신라의 무력 통일과 고려의 호족연합정책에 의한 통일은 모두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 통일정책을 갖고 있는가. 겉으로는 평화 통일을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북한의 급변 사태에 의한 흡수 통일을 원하는 기류가 점쳐진다. 이 경우 북한 주민들이 중국이 아닌 남한을 선택하게 할 자신이 있는지, 또 100만이 넘는 북한 군부가 반발할 경우 이를 평화적으로 접수할 방안이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통일부 기자단이 남북 당국의 접촉 사실에 대해 통일부가 거짓말을 했다며 항의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과연 일관된 통일정책 자체를 갖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만약 그게 없다면 정파적 이해를 뛰어넘어 기존의 6·15 남북공동선언(2000년)과 10·4 남북공동선언(2007년)의 합의 사항을 실천하면서 남북한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는 민족화해 정책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물리적 통합보다 화합적 통합을 고민하는 심모원려(深謀遠慮)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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