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건축물엔 사람이 빠져 있다”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10.30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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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건축가 가우디 안내서 펴낸 김희곤 교수

‘건축의 신’이라 불리는 스페인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를 좋아하는 김희곤 삼육대 교수가 <스페인은 가우디다>라는 건축 여행서를 펴냈다. 그는 최근 일어난 판교 환풍구 추락 사고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건축물에는 휴머니즘, 즉 사람이 빠져 있는 것 같다. 목적이나 결과에서 사람이 중심이 돼야 하는데 건축이 돈에 너무 좌지우지되고 있다. 건축에 르네상스 같은 움직임이 일어나야 한다.” 시간에 쫓기고 하청-재하청 같은 구조에서 지어지는 건물이 제대로 된 것이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인터뷰 끝에는 “독창적인 건물이 아니라도 시간이 내재된(공을 들인) 건물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쳐 건설 경기가 죽었던 해 마흔넷 생일에 스페인으로 떠났다. 홍익대에서 석사를 마치고 10년 동안 설계사무소를 운영한 후였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했던 차에 늦깎이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스페인 마드리드 건축대학 강의실에 앉아 공부하던 어느 날 밤 배낭을 꾸리고 무작정 마드리드를 벗어나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성가족 대성당, 구엘 공원, 카사 비센스, 카사 밀라…. 그는 그곳을 둘러보며 외로움과 자유와 열정으로 살다 간 가우디를 만났다.

ⓒ 시사저널 이종현
“건축이 돈에 좌지우지되고 있어”

“상상 속 가우디 작품을 실제로 보았을 때 영혼이 비틀거릴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기하학과 구조의 질서가 퍼즐 조각처럼 녹아 있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천재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한국 건축 교육이 잘못됐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 아름다운 삶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치는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한국 건축 교육의 문제점은 그의 지도교수에게서 익히 들은 바 있었다. 그것을 스페인에서 절감했다. “작고하신 홍익대 김성국 교수가 스승이었다. 그분과 10년간 도제 관계로 배웠다. 그 스승의 스승이 미국 분인데, 이분이 한국에 와서 ‘한국은 이상한 게, 실제로 뭔가를 만드는 사람이 가르쳐야 하는데 박사 학위 소지자가 가르친다’고 말했다고 한다. 건축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가우디는 짓고 만드는 현장의 끈끈한 땀 냄새를 더 좋아했다. 스승의 작업실에서 필요한 장식을 직접 손으로 만들면서 손과 땀으로 건축을 조각했다.”

가우디 건축의 힘이라 할 수 있는 ‘장인정신’은 딴 데서 나온 게 아니었다. 책상에서 컴퓨터로 건축을 배우는 요즘 풍경과 달리 가우디는 하나하나 몸으로 겪어가며 건물을 만들었다. 더 대단한 점은 그가 평생 관절염을 앓으며 몸이 불편했다는 사실이다.

TV 프로그램 <꽃보다 할배>에 등장해 스페인을 향한 관심이 높아지긴 했지만 원래 스페인은 관광 강국이다. 유럽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만나는 곳이고 제국주의 시절 엄청나게 광활한 영토를 보유했던 나라가 스페인이다. 자연스레 스페인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건축이다.

“많은 사람이 바르셀로나로 가는 이유가 가우디 때문일 것이다. 그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세계를 실현했다. 한 인간으로, 건축인으로 가우디는 성자처럼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건축가로서 그의 삶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가우디는 건축을 위해 자기 생을 오롯이 바쳤다. 세계적인 건축가인 르 코르뷔제는 가우디를 건축의 신이라고 불렀다. 이 말이 모든 걸 함축하고 있다.”

가우디는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독특한 건축물을 많이 남겼다. 그의 건축물은 주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곡선으로 이뤄져 있으며 섬세하고 강렬한 색상의 장식이 주를 이룬다. “1878년 가우디는 바르셀로나 시의 가로등 제작을 의뢰받았다.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의 레알 광장에는 가우디의 초기 작품인 가로등이 애환을 간직한 채 꿋꿋하게 서 있다. 람블라스 거리를 걸어보지 못한 사람은 바르셀로나의 낭만을 느끼지 못한 사람이며 세상 끝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다.”

“땀 흘리는 현장에서 가르치고 배워야”

1909년 7월 산업화로 일자리를 잃은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이 정부와 교회권력에 항거하며 교회와 수도원을 불태웠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우디는 더 이상 부자의 개인 건물을 짓지 않고 오로지 성가족 대성당 공사에 매진했다.

“많은 교회와 종교기관이 무참히 파괴되고, 신부와 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고 나서 마침내 비극은 끝이 났다. 다행히 가우디의 건축물은 별다른 파괴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공사를 함께 하며 땀 흘렸던 노동자들이 파괴를 막아주었다. 함께 일한 사람들이 가우디처럼 일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사건이었다.”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 가운데 완성작은 없다. 가우디의 모든 작품 중 유일하게 완성작으로 꼽히는 카사 밀라도 성모 조각상만은 끝끝내 옥상에 올려놓지 못한 채 공사를 마쳤다. 성가족 대성당, 구엘 공원, 카사 비센스 등 가우디가 남긴 작품은 대부분 개축이나 공사를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미완의 작품들이다.

“인간의 삶처럼 가우디의 모든 작품은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 가우디의 꿈은 완성보다 더 값진 미완의 열정으로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는 열정으로 지병을 이겨냈고 편견에 맞섰다. 성가족 대성당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공사를 진행 중이며 가우디는 바르셀로나의 성자로 불린다. 가우디 없는 스페인은 없다. 스페인은 가우디다.”

가우디에 대해 말할 때 목소리를 더 높이는 김 교수. 그는 “차가운 머리가 이끄는 방향이 아니라 가슴이 이끄는 방향으로 미련하게 달려갔다. 죽어서도 여전히 집을 짓고 있는 가우디는 신화가 됐다. 가우디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평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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