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세대와 우리의 잘잘못 함께 들여다봐야 할 때”
  •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 승인 2014.11.06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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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언론인들과 만나 오랜만에 환담한 소설가 김훈

1760만명이라는 역대 최다 관객 수를 기록한 영화 <명량> 하면 떠오르는 소설가가 있다. <칼의 노래>를 쓴 김훈 작가(66)다. 지난해만 해도 경북 울진에서 작품을 쓰고 있었던 그는 서해안에 있는 선감도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사이 하얀 머리가 더 많이 늘어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백발노인이다. 고뇌가 흰 서리처럼 그의 머리 위로 내려앉은 건 아닐까.

10월2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소설가 김훈 초청 한담(閑談)’이 열렸다. 전·현직 언론인이 만든 한국언론문화포럼이 마련한 이 행사에서 김 작가는 100여 명의 참석자와 마주 앉아 자신의 문학과 문장에 대해 다시 한 번 오해와 이해의 간극을 좁히는 대화를 나눴다.

국민소득 2만 달러 되기까지 무슨 일 있었나

“1948년 전쟁의 시대 빈국에서 태어나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의 늙은이가 됐다. 82달러에서 2만 달러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제는 들여다봐야 할 때가 됐다고 느낀다.”

10월27일 김훈 작가가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언론문화포럼에서 강연하고 있다. ⓒ 시사저널 박은숙
김 작가는 오래전부터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신작 장편을 준비 중이라고 말해왔다. 참석자들은 이전에 썼던 역사소설은 이것을 위한 습작이었다고 말할 만한 작품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문학평론가 장석주 시인은 2009년 김훈 소설에 대한 평론에서 이렇게 썼다. ‘김훈 소설은 진화 중이다. 진화의 단계에서 역사소설은 악보상의 휴지부(休止符), 잠시 쉬어가는 쉼표다. 김훈은 이 휴지부, 쉼표를 빠르게 건너갈 것이다. 지금까지 김훈 소설은 그 본질에서 독백이다. 앞으로 나올 소설은 독백에서 벗어나 다향(多響)의 울림을 가진 대화일까?’

김 작가는 많은 독자와 공감할 내용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다. “1948년에 태어난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가 1960년대였다. 당시 국민소득이 82달러였다.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데 지금은 2만 달러다. 엄청난 변화를 지나온 거다. 82달러에서 2만 달러로 바뀌는 과정에서 많은 비리와 모순과 억압을 저지른 거다. 그런 게 지금 우리 사회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은가.”

김 작가는 아버지에 대한 소설을 쓸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대해 그는 “어떤 시대, 어떤 나라에서 태어나느냐, 어떤 부모 밑에 태어나느냐는 자기가 선택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한 번은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며 즉답을 피해갔다.

김 작가의 아버지 김광주(金光州·1910~1973년)는 중국 상하이 난양의과대학에 다니던 중 문학에 심취해 시와 소설을 써 필명을 날렸다. 1937년 노구교 사건 이후 광복이 될 때까지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방랑 생활을 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한 후 수년간 김구 선생을 보필했고 민주일보 등 매체 창간에 관여했다. 1947년부터 1954년까지 경향신문 문화부장을 거쳐 편집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2년 연합신문에 발표한 <나는 너를 싫어한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고발한 작품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는 고생을 많이 했다. 1910년에 태어나서 만주를 떠돌다가 해방된 뒤에 와서 한국전쟁을 겪고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까지 살았다. 어머니도 고생 많이 했는데 한국전쟁 당시 어린 아이들을 업고 미어터진 열차에 왜 올라탔는지 궁금했다. 물어보고 싶었는데 이제는 물어볼 수가 없다.”

김 작가는 유년 시절 겪었던 일들이 자신의 문학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전쟁 당시 어렴풋이 생각나는 일들과 가난했던 시절 깡통 차고 밥 얻어먹으러 다니던 아이들의 모습, 천막 교실에서 공부했던 기억 같은 것들이 내 마음의 밑바닥에 쌓여 있다. 이를테면 안방에서 식구들과 밥을 먹고 있는데 거지가 나타나 애걸할 때 참담했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게 딱 붙어 있는 기억들이다”고 말했다.

많은 책을 읽었을 텐데, 문학 하는 데 영향을 미친 책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책을 많이 읽지만 꼭 책을 봐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할 수 없다. 시골에 머무르면서 한글도 못 깨친 할머니들을 알게 됐다. 평생 책 한 권 못 읽었을 분들인데 그들은 대학 나온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뛰어난 면이 있다. 개와 고양이와도 대화를 나눌 줄 알고, 돼지가 어떤 상황인지 가늠하고 이웃에는 무슨 일이 있고 마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안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길바닥에서, 사물이나 사태, 사건에 의지해서 세상을 바라봐야겠다고 생각했고 계속 그러려고 한다.”

세월호 침몰 사고, 사회가 깊이 반성해야

최근 김 작가는 여러 문인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 유가족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진도 팽목항을 찾았다. 그는 팽목항을 찾은 것에 대해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찾아간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어려운 일 당한 사람을 찾아가 보는 것이다. 풍속에 속하는 사항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풍속에 속하는 일이고 이념에 속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참사에 대해 “단순한 사고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 사회의 비리와 문제가 다 드러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김 작가는 세월호 침몰 사고를 다룬 소설을 쓸 생각은 없는지, 쓴다면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이준석 선장과 참사 다음 날 자살한 교감에 관심이 있다. 선장을 다룬다면 선장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아버지의 행동을 생각하는 내용을 그려봤다. 선장은 이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임이 틀림없지만 이 사회가 그 책임을 요구하기엔 무리가 있다. 세월호 침몰 사고를 통해 사회가 깊이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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