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스타 X파일] #2. MB에게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라"
  • 이기진│PD ()
  • 승인 2014.11.12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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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독설 뱉어내며 고독하게 억압된 구조와 싸운 ‘마왕’

그가 떠났다. 대중문화계의 독설가, 끊임없는 도전과 실험으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닌 ‘마왕’ 신해철이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그의 향년은 한국 나이로 마흔일곱이다. 데뷔 이후 줄곧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통해 우리 대중음악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아쉽게도 본격적으로 삶과 음악이 깊이를 더하고 안정감을 찾아갈 시점에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더 아쉽고 안타깝다.

얼마 전 필자와 우연히 마주친 자리. 평생 늙지 않을 것 같았던 그는 어느새 중년이 되어 있었고, 얼굴에서는 카리스마 대신 연륜의 흔적들이 엿보이고 있었다. 어느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버린 그는 음악의 깊이와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무한궤도’라는 록밴드를 결성하고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를 유심히 지켜본 당시 심사위원장 조용필의 지원 아래 당당히 대상을 차지했다.

10월31일 서울아산병원에서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으로 생을 마감한 신해철의 발인이 엄수되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때문인지 그는 데뷔 시절부터 다른 뮤지션들과는 생각과 사고가 달랐다. 그의 특이함은 먼저 그가 결성한 밴드 명칭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멈추지 않고 끝이 없는 길을 뜻하는 ‘무한궤도’, 새로운 미래를 의미하는 ‘넥스트’, 영국 유학 시절 좋아했던 시민혁명가 올리버 크롬웰에서 따온 ‘모노크롬’, 정식 철학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20세기 서양철학의 흐름을 바꿔놓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가 비트겐슈타인(그는 음악에도 천재성을 갖고 있었다)의 이름에서 따온 ‘비트겐슈타인’ 등은 그의 사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몰렸다. 무려 1만6000명이 넘는 일반 조문객이 헌화했고 또 수많은 유명 인사가 찾아와 조문했다. 그들은 왜 신해철에게 열광하고 이토록 아쉬워하는 걸까. 답은 명료하다. 그것은 그의 치열한 삶과 그 밑바탕이 된 실험정신과 고집스러운 도전 때문이다.

신해철은 1990년 솔로 데뷔 후 <안녕>이란 노래에 생소하던 영어 랩을 삽입해 폭발적 반응을 얻었고, 2집 <myself>를 통해 대한민국 미디음반의 역사를 열었다. 또한 1994년 발매한 넥스트 2집 <The Being>은 “최초로 철학적 언어를 가요에 접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1996년 윤상과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노땐스’는 그의 고집스러움의 결정체다. 팀 이름이 유치해 보인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당시 가요계 주류 음악이던 댄스음악에 맞서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은 ‘음악 장르의 본질인 감상을 위한 음악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주장해 화제를 모았다. 그가 ‘비트겐슈타인’을 결성하고 2000년 발표한 음반은 홈레코딩으로 제작한 저예산 음반이다. 이는 지나치게 상업적이고 왜곡된 가요 시장에 대한 강렬한 도전의 결실이다. 이후 2004년 재결성된 넥스트 5집 앨범 역시 저예산으로 제작해 호평을 받았다. 이는 왜곡된 음원 유통 구조와 불합리한 한국 음악산업의 개선을 위해 동료 신대철과 함께 설립한 ‘바른 음원 협동조합’으로 이어졌다.

음악 외적 측면에서도 신해철은 끊임없이 독설을 뱉어내면서 고독하게 사회 부조리 및 억압된 구조와 싸웠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TV토론의 단골손님이 되어 각종 주장을 펼치면서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대마초 비범죄화 주장’ ‘간통죄 폐지’ ‘학생 체벌 금지 법제화 추진’은 물론, 더 나아가 ‘사이버 모욕제 실시 제고’ ‘이라크전 파병 반대 1인 시위’를 감행(?)했다. 그는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아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가 공격적으로 추진한 ‘영어 공교육 정책’에 대해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든지…”라면서 독설을 날리고, 이의 실천을 위해 영어를 가르치지 않는 유치원을 찾아 지방으로 이사까지 했다. 또한 앨빈 토플러의 공교육 소멸론에 동조해 자녀를 대안학교에 입학시키고 싸이렌음악원이라는 대안 아카데미를 운영하기도 했다.

상업적이고 왜곡된 가요 시장에 도전

2009년 4월, 그는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북한의 로켓 발사를 축하한다’는 글을 올려,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글로 그의 홈페이지는 격렬한 토론장이 되었고 일부 보수단체는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결국 이 사건은 검찰 조사 후 무혐의 처분되었으나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보수단체도 애국한다고 뛰고 있으니 나와 방법이 다를 뿐 무시하지 않는다…(중략)…한동안 이런 글이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을 살았다. 집과 차를 한 단계 내려서 못 살 듯이 자유도 내려 못 산다.”

신해철의 장례식장과 영결식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여러 풍경을 연출했다. 조용필·이문세·한대수·전인권·이선희·백지영·신승훈·김부선·엄태웅·유지태·신현준·권상우·김범수·싸이·이승철·김장훈·이승환·서태지 등 정말 많은 선후배 동료 스타들이 줄을 이었다. 이 중 상당수는 3일 내내 빈소를 지켰고 영결식을 함께했다. 특이한 것은 유해가 화장터로 향하던 도중 이승철·싸이·윤도현·윤종신 등 동료 가수들의 요청으로 화장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스타들이 후일 혹시 책임 소재 논란에 연루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신해철이 그동안 연예계에서 쌓아온 신뢰와 카리스마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와 직간접적으로 음악 작업을 함께한 뮤지션의 면면만 열거해봐도 이는 증명된다. 학창 시절 심부름하며 따라다닌 ‘부활’의 이승철과 김태원, ‘무한궤도’ 멤버로 참여한 015B의 정석원, 넥스트 멤버인 이동규·정기송, ‘노땐스’의 윤상, 시나위의 신대철, 그리고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그와 함께 작업하고 공연을 함께했다. 특히 그의 6촌동생으로 최근 음반을 발표한 서태지와는 선의의 경쟁을 약속하기도 했다.

신해철이 주로 왕성하게 활동한 1990년대 한국 가요계는 댄스음악이 주류를 형성했다. 박남정·심신·김완선에서 시작해 서태지와아이들·현진영을 거쳐 김건모·룰라·REF·듀스·DJ DOC·터보·HOT·젝스키스·유승준·SES·핑클 등 수많은 스타가 인기를 얻으며 음반 100만장 판매 시대를 열었다. 물론 힙합이나 신승훈·이승철·조성모·이소라 등이 주도한 발라드도 여전히 강세를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1980년대를 풍미한 록그룹은 침체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신해철이 있었다. 그는 댄스 열풍 반대편에서 묵묵히, 때론 고독하게 록음악의 자존심을 지켰다. 나아가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실험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노래 가사에도 자신의 철학적 사고와 가치, 사회 부조리와 억압된 구조·행태에 대한 날 선 비판을 담아 새 영역을 개척했다. 참 많이 아쉽고 아프다.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마왕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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