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 논쟁’ 정치적 선동 집어치워라
  • 정재훈 | 서울여대 사회복지학 교수 ()
  • 승인 2014.11.1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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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복지 싸움의 부끄러운 민낯…사회적 대타협 포럼 만들어야

홍준표 경남도지사의 존재감 알리기는 확실히 성공했다. 온 나라가 ‘무상복지’ 논쟁으로 시끄럽다. 그러나 국제 비교에서 늘 낮게 나오는 우리 사회 신뢰도는 또다시 끝 모르게 추락할 것이다. “일단 내 이름 석 자 알리고 다음 선거 기회를 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신뢰는 사전에 없는 단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이른바 지도자로 뽑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또 속는 셈 치고 투표장에 가야만 하는 현실이 슬프다. 약속을 믿은 국민을 조롱하고 말장난을 일삼는 무상복지 논쟁의 부끄러운 민얼굴을 들여다보자.

첫째, 뭐가 무상이고 공짜인가. 무상복지는 세상에 없다. 세금이나 사회보험료를 더 내든 지하경제를 양성화하든 어디에선가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선거에서 표가 될 것 같으니까 ‘무상’ 단어를 남발했다. 그 반대급부로 복지가 마치 공짜를 바라는 게으른 사람들을 양산해내는 나쁜 제도라는 정치적 공세의 빌미만 주고 있다. 무상급식·무상보육은 보편복지를 실현하는 과정 중 제도의 예로서 의미를 갖는다. 왜 이 의미를 소홀히 하고 ‘공짜’만 강조했는가. 

보편복지는 필요할 때 근로자·학생·전업주부·노인·장애인 누구 할 것 없이 신속하고 충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복지 체제를 의미한다. 돈벌이가 가능한 근로자는 스스로 의료비도 부담하고 실업에도 대비하며 노후 생활도 준비하게 하면서 그렇지 못한 근로 무능력자, 저소득층 중심 복지제도를 발전시킨 국가는 선별적 복지 체제를 갖고 있다는 표현이 가능하다. 미국이 대표적 예다. 반면 저소득층, 근로 무능력자 대상 국민기초생활보장뿐 아니라 실업·질병·노령으로 인한 소득 중단 근로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보험제도를 운영하는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오히려 보편적 복지 체제에 한 발짝 더 다가서 있다. ‘누구나 필요할 때’ 국가와 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보편적 복지 체제의 단면을 경험할 수 있음이, 몇 년 전 유아보육과 학교급식 무상화 논쟁이 제기한 문제의 본질이다. 내가 낸 세금을 우리 아이의 보육과 급식에 사용하는 국가를 경험한 국민은 다른 보편적 복지제도 실현에 필요한 세금·사회보험료를 더 낼 마음도 쉽게 갖게 된다.

2012년 11월21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교육 관련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
국세·지방세 비율, 6 대 4로 전환해야

둘째, 보육과 급식에서 경험한 국가는 중앙정부든 지자체든 국민에게는 같은 국가다. 그래서 지난 선거에서 보육은 중앙정부, 급식은 지자체 소관이라는 논리적 분류를 머릿속에 두고 투표를 하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그 복지는 내 복지가 아닙니다”라는 발뺌을 하는 사고방식으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중심으로 선거 전략을 짜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중앙·지방 구분을 하려면 국세와 지방세 비율을 지금처럼 8 대 2로 해서 중앙정부가 재정을 무기로 삼아 지자체를 압박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선진국처럼 국세와 지방세 비율을 6 대 4로 해서 급식을 지자체에서 알아서 하도록 한다면 우리 국가의 모습이 지금처럼 치졸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셋째, ‘저부담·저복지’ 혹은 ‘고부담·고복지’로 가야 할지 명확히 하자는 문제제기도 있다. 결국 ‘저부담·저복지’로 가자는 이야기다. 국민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말장난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정체를 솔직히 드러내자는 모습에 친근감이 더 생긴다. 그 솔직함을 다음 선거에서도 그대로 드러냈으면 한다. 그런데 저부담·저복지를 유지하면 지속 가능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노동 집약적이고 토건 중심적인 경제 성장 신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 사고방식으로는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바꾸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경제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구조, 지속 가능 성장의 전제조건으로서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의 필요성 등은 이제 어떤 면에서는 상식이 되었다. 부모의 지위가 자녀에게 세습된다는 명제는 더 이상 선동적 정치 구호가 아니다. 사회과학적 연구가 이를 증명하는 흐름이다. 지금의 청년들은 저부담·저복지를 주장하는 분들이 겪었던 청년 시절보다 몇 배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지만 비정규직 문제와 고용 불안의 틀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청년 세대 고용 지원을 중심으로 한 고용복지 연계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다. 생애 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더 이상 정치적 구호로 놔둬서는 안 된다.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 구조 구축을 위해 높은 수준의 복지비용이 필요하다. 개발독재 시대 경제 성장 무용담에서 이제는 헤어날 때다.

이른바 무상복지 논쟁을 통해 ‘무상’ 개념을 공짜 정도로만 사용한 무능력, 보육·학교급식을 정치적 선동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교활함과 치졸함, 자신들의 성공 신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그 틀을 지금도 적용하려는 무지함의 민낯을 보았다. 이 얼굴 앞에서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계속 추락해가고 있다.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어내자. 노사정위원회의 한정된 범위를 넘어서고 국민대통합위원회의 유명무실해진 기능을 되살릴 수 있는 사회적 대타협 포럼을 만들자. 무엇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인가. 고부담·고복지로 가는 증세다. 후보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마지막 수단으로서 증세’를 이야기했다. 지하경제 양성화도, 빚내서 집 사게 하는 ‘창조경제’도 성공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증세가 마지막 수단으로 보이지 않는가.

직접세 대 간접세, 부자 증세 대 서민 증세 논란 구도에서 벗어난 사회적 대타협을 시도하자. 현란한 숫자놀이와 언변에 관계없이 법인세·소득세·주민세·담뱃세·사회보험료 모두 지금보다 더 부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높은 수준의 복지제도는 바랄 수 없다. 부자도 서민도 모두 설득해야 한다. 기업과 부자가 앞장서면서 대중과 서민이 함께 뒤따라가는 대타협을 이끌어내자. 복지제도를 경험한 국민은 증세의 목표를 이해한다. 급식과 보육에서 국가의 존재를 본 국민은 증세를 무조건 반대하지 않는다. 국민의 이름을 빌린 정략적 무상복지 해석을 이제 중단하고 사회적 대타협으로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나는 정치인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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