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죽어버리겠다’ 말한 것 두 번 들었다”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11.23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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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 전 우리들병원그룹 회장이 말하는 ‘내 친구 노무현’

 

© 시사저널 임준선

김수경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90년 그가 펴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 <자유종>이 15만부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 계기였다. 그러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노무현의 정치 후원자로 김수경 우리들병원그룹 회장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거리감이 커 보이는 이 두 인물은 같은 사람이다.

소설가 김수경이 1987년 6·10항쟁부터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전까지 이어졌던 ‘친구 노무현’과의 지난 이야기를 <내 친구 노무현>이라는 ‘소설’로 정리해 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노무현의 정치 여정에서 김수경은 자신을 “참여는 없었고 관전만 있었을 뿐”이라고 한정지었지만 그의 책 곳곳에는 1990년대를 뚫고 직진해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정치인 노무현의 내밀한 모습이 등장한다.

소설가·병원장 부인, 어떻게 노무현과 친구 됐나

그는 이 책 제목에 ‘소설’이라는 말을 붙였다. “떠오르는 대로 썼지만 노무현과 관련한 인물 중 현재 활동 중인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삭제했다. 노무현 캠프 내에서도 자기들끼리 권력투쟁도 있고 갈등도 있었다. 기억대로 쓰다가는 내가 맞아 죽겠다 싶어서 지웠다. 지지자들 사이에서 노무현은 성역화돼 있고 반대파에서는 노무현을 양아치로 여긴다. 노무현을 문학이라는 텍스트 안에서 기억하게 하고 싶었다. 정치적인 맥락은 빼고 싶었다.”

그는 자신이 ‘노무현의 정치 후원자’로 불리는 게 싫다고 말했다. ‘노무현에게 뭘 잘 보이려고 갖다 주고 그런 게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부산 출신 60대다. 내 친구 중에 노무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강남 사는 우파인데 내가 노무현을 지지한다고 하면 또라이나 배신자로 여긴다. 나는 경남여고, 전 남편(이상호 우리들병원 원장)은 부산고 출신이다 보니 보수적인 지역사회에서 서로 얽혀 있는 게 많다. 나는 거기에서 이질적인 존재다. ‘노무현은 전라도 사람이다. 너도 전라도 사람일 것이다.’ 이런 수군거림이 많았다.”

노무현을 김수경에게 소개한 것은 전 남편의 부산대 동창인 김정길 전 장관이다. “1989년 말인가, 마포 고깃집에서 노무현과 처음 인사를 나눴는데 그 자리에는 홍준표나 이인제, 홍사덕 등이 있었다. 그때는 다들 백수였다. 뒤에서 바둑 두는 것처럼 한국 정치의 현실을 보게 됐다. 그 백수 중의 한 명이 한국의 대통령이 됐다. 연속극보다 더 재밌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 어울렸던 사람 중 김광일이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가고, 이부영이 한나라당으로 가는 것도 지켜봤다. “운동권에 대한 신뢰도 없었다. 박노해가 등장하기 전에는 김지하나 황석영에게 많이 실망했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정치권과 운동권의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어떤 경우에는 “사람의 밑천까지 들여다본 순간이 많았다”고 한다.    

김수경과 자주 만나던 노무현에게 1990년대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던 시절이었다. 1992년 부산 총선 낙선, 95년 부산시장 선거 낙선, 96년 종로 총선 낙선. 그 와중에 노무현은 우리들병원의 치료비 청구 소송을 맡아주고, 김수경이 대표로 있던 열음사 등록 취소 사건을 문재인 변호사에게 소개해줘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주고” 우리들병원의 고문변호사가 됐다. 이로 인해 김수경 부부는 관할 경찰서에서 ‘비위 의료인’으로 찍혀 동향보고를 당하는 감시 대상이 됐다.  

1996년 겨울 갤러리아백화점 앞 다방에서 만난 노무현은 김수경에게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말을 했다. 사주 공부를 했던 김수경은 그날 노무현에게 사주를 물었다. 노무현은 병술년 병신월 무인일 병진시 생. <연해자평>이라는 명리학 책에는 무인일 병진시면 왕의 기운이 있다고 본다. 김수경은 명리학을 잘한다는 몇 명에게 찾아가 검증을 했다. 그들 중 두세 명은 ‘난세의 영웅이요, 평화 시에는 율사’라는 답변을 했다. 노무현에게 장수천이라는 사업을 권한 것도 사주에 물 기운을 더하면 더 길하다는 판단에 “내가 부추긴 것”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이 장수천이 나중에 경영난에 빠졌을 때 김수경이 대주주로 있던 아스텍창투가 1억9000만원을 긴급 투자하기도 했다. 이게 2003년 현 충남도지사인 안희정을 정치자금법으로 구속시키는 빌미가 된다. 그가 취미로 사주를 봐준 인물 중에는 변양균 전 장관도 있었다. “내가 여자 조심하라고 했는데…”라며 그는 입을 닫았다.

 

왜 병원장 사모님이 노무현을 지지했을까



노무현이 장수천 사업을 시작한 것은 정치자금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김수경은 이 대목에서 “노무현이 ‘죽어버리겠다’고 말한 것을 두 번 들었다”고 말했다. “‘화살이 수천, 수만 개 날아오는 들판을 달려가고 있다’고. 언제 화살 맞고 죽을지 모른다고. ‘대통령을 안 할 수도 없고, 앞으로 나갈 수도 없다’고 했다.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이 한창일 때도 그런 말을 했다. 정치자금 마련하느라 빚이 너무 많아서 캠프에 있던 사람이 모두 1000만원대의 마이너스 통장을 썼다고 한다. 나중에 대통령이 월급 받아서 캠프에 있던 사람의 빚을 몇 백만 원씩 갚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97년 꼬마 민주당 출신 전·현직 의원 10명이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차렸다. 김수경은 김정길의 출자 포기분까지 두 구좌(4000만원)를 출자했다. 하로동선 멤버들은 영업이 끝나면 길 건너편 싸구려 술집으로 몰려가 어울렸다. 그 무렵을 전후해 노래방 사단이 생겼다.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 주동이 된 이 모임에는 노무현과 보수 언론의 ‘부드러운 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배려가 있었기에 보수 신문 정치부장도 멤버로 참여했다. 이들은 김수경이 병원 손님을 자주 모시고 가던 아미가호텔 중식당에 모였다. 밥값은 생일자가 계산했고 김수경과 생일이 같은 노무현은 음력으로, 윤달에 태어난 김수경은 양력 생일에 밥을 샀다. 아미가호텔 지하의 가라오케는 단골 뒤풀이 장소였다. 전 남편(이상호)이 병원 손님을 자주 모시고 가는 관계로 늘 키핑(보관)한 술이 있었고 단골인 덕에 얼마간의 서비스료만 내면 됐다. 하지만 이 모임은 한 보수 신문 부장이 노무현에게 쌍욕을 하고 ‘절대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을 것이다’라는 폭언을 하는 등 ‘노무현에게 무례하게 굴면서’ 깨졌다.   

1988년 4월 13대 총선에서 당선된 후 환호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 시사저널 포토



3당 합당 후 노무현 지지한 ‘강남 우파’

마침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났지만 김수경에게는 더 힘든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수경과 우리들병원은 검찰 조사와 세무조사로 곤욕을 치렀다. 2004년 3월의 노무현 탄핵 사건은 상징적이었다.

“2003년 말부터 점쟁이들이 ‘노무현이 임기를 못 마친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그 ‘예언’은 반대쪽에서 탄핵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다. 2004년 설 전에 안희정이 구속됐다. 그 전부터 나는 검찰에 참고인으로 불려 다녔다. 노무현 재임 기간 중 2005년 한 해만 빼고 임기 내내 검찰 조사와 세무조사로 시달렸다.”

김수경은 안희정과 문재인을 높이 평가했다. “나도 감정에 움직이는 사람이다. 노무현이 취임하자마자 안희정이 조사받고 나도 참고인이라고 부르는데 너무 가기 싫었다. 검찰 쪽에 아는 분을 통해 물어보니 ‘당신이 타깃이 아니니까 빨리 서울을 벗어나라’고 하더라. 무조건 부산으로, 충무로 돌아다녔다. 안희정이 구속될지 걱정됐다. 부산 사주쟁이에게 물어보니 수옥살이 있다고 하더라. 그해 음력 12월 전에 안희정이 구속됐다.” 안희정이 구속된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는 면회를 가서 펑펑 울었다. “나는 우는데 안희정은 그런 나를 보고 웃어줬다. 노무현 정권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원망 하나 안 했다. 그때 내가 마음으로 안희정을 막내 동생으로 받아들였다.”

문재인에 대해 김수경은 “인격적으로 노무현보다 훨씬 더 훌륭한 분이다. 너무 순수해서 그분이 권력에 물들여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대통령선거에서)되기를 열망했다”고 복잡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노무현의 봉하 사저를 설계한 정기용의 장례식에서 문재인을 조우한 김수경은 그에게 책을 내보자고 권유하고 편집자를 연결시켜줬다. “그분이 서문에 내 이름을 적었기에 또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편집자에게 말해서 내 이름을 뺐다.”

2005년 봄 청와대 정원에 모란이 만발한 날 청와대를 방문해 대통령이 된 ‘친구 노무현’을 만나 단둘만의 식사를 가진 것이 노무현 재임 기간 중의 좋은 기억이라면, 반대로 섭섭한 기억도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노무현은 주위 사람에게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이라는 가정하에 ‘소원수리’를 받았다. 그때 김수경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축하 파티를 열어 뉴욕타임스 1면에 기사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통령 당선 후 방미 일정이 잡히자 김수경은 뉴욕 맨해튼에 사무실을 내고 약속을 실천하기 위해 바바라 월터스, 우디 앨런 등 뉴욕 사교계의 명사를 초대했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외교안보수석(반기문)의 반대로 무산됐다. 최소 1인당 550달러의 식사비가 필요한 자리였는데 180달러라는 규정을 넘어선다는 것이 이유였다. “노무현 정부의 서민 코드로 공무원들이 알아서 줄맞췄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말했다.  

성장 배경과 관심사가 모두 달랐던 노무현과 김수경은 어떻게 함께할 수 있었을까. 김수경은 “기억도 안 나는 사건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인연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노무현이 나를 알아줬다. 자기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노무현이나 박노해는 나와 다르지만 표는 거기 가서 찍었다. 노무현도 나를 ‘첫 번째 부르주아 친구’라고 했다. ‘부르주아가 나쁜 게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나 역시 노무현을 통해서 블루칼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노무현의 계급적인 의식을 완화하는 데 내가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노무현은 또 극히 일부일 것이다.”

노무현 쪽 사람도 ‘예술인 김수경’의 여러 면모를 잘 모를 것이다. <자유종> 때문에 그는 엄청난 팬레터를 받았다. 소설에 필로폰 중독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탓인지 중독자들이 편지를 많이 보냈다. “소설 속 묘사는 중독자를 인터뷰해서 구상한 것이다. 주로 호스티스·택시기사를 인터뷰했다. 유명인도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다.” 나중에 그는 박지만이나 김중만, 강산에 등 이미 ‘딱지’가 붙은 유명인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와 만난 첫 자리에서 “약물 경험하고 쓴 게 아니지요?”라고 날카롭게 지적한 김중만과는 친한 친구가 됐다. 박지만에 대해 김수경은 “정치적인 것을 떠나서 노무현만큼 솔직한 사람이다. 자기를 숨기거나 위선적인 게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들그룹을 경영해본 ‘중소기업인 입장’에서 노무현을 말하기도 했다. “모임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는 안 했다. 다만 중소기업인 입장에서 보면 정치인은 물량 공세를 하는 규모의 게임에서 대기업을 이길 수 없다. 공정할 수 없는 게임이다. 그걸 알았다면 그는 권력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 전략적으로 미스다. 그래도 우리가 이상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세계를 노무현이 보여주고 갔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 점에서 노무현은 실패가 아니다.”

노무현의 대통령 퇴임 후 김수경은 더 거친 시간을 통과해야 했다. 세무조사, 검찰의 참고인 조사, 443억원의 세금 추징,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혼. 그는 이혼녀가 된 지금이 “처음으로 나 자신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전 남편 이상호는 18세에 만나 36년을 같이 살았고 44년을 같이했다. 2007년이 되니까 우리들병원 게이트 진상조사단이 국회에 만들어졌다. 노무현이 대통령 되기 전에는 이상호가 더 유명했다. ‘노무현 때문에 유명해졌다’고 하니까 스트레스가 심했다. 2008년에는 세무조사가 시작되고 443억원의 세금을 추징받았다. 그때가 지옥이었다. 나는 검찰에 불려 다니고 세무조사 받고 남편을 보살필 시간이 없었다. 그 사이 남편이 변했다.”

문제는 김수경의 의식도 함께 변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부부는 바람피워도 정으로 사는데 노무현 사건을 계기로 의식적 차이를 분명하게 느꼈다. 행복한 척하면서 덮고 사느냐, 더러운 진실이라도 맞닥뜨려야 하느냐, 선택해야 했다. 2009년 말 함께 뉴욕 여행을 갔다가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인생에서 더할 수 없이 힘든 시간이었다. 가장 큰 것은 배신감이다. 그가 (노무현과 엮인 것으로) 나를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내가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낼 때 그랬다는 게 너무 의리 없게 느껴졌다. 그때 이상호는 검찰에 불려 다니지 않았다. 원래 타깃은 이상호였는데 우리의 주 수입원이 병원이라 내가 나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아침 7시에 검찰청에 나가서 밤 10시에 귀가했다. 세무조사를 받아보니 직원이 나를 속인 것도 다 들통 났다. 배신의 계절이었다. 지금도 휘청휘청한다. 세금 내기 위해 처분한 주식 때문에 지난해에 90억원 정도의 세금을 냈다.”

그에게 이혼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모두의 평화, 지속 가능한 안락함, 보호’라는 것도 그를 망설이게 했지만 “노무현은 마누라 몰래 한눈팔았던 여자 얘기도 하는데 솔직해 보였다. 거짓은 오래 남는다. 솔직하면 되는데. 인격적인 신뢰감이 사라지니 모든 게 <장미의 전쟁>처럼 돼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홀가분하다. 내가 검찰 가고 국세청 갈 때보다 덜 외롭다. 그때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도 있다. 지금은 전 남편을 이해한다. 이해와 용납은 별개지만. 이혼 안 했다면 내 정신 안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2012년 4월25일 이혼하고 그해 6월 주식 처리 문제로 한 번 만난 후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는 내년에 그가 새로 발견한 대륙과 그가 그동안 머무르던 대륙의 오해받던 지점들을 책 두 권으로 온전히 정리해 낼 생각이다.

한편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해 노무현재단의 오상호 사무처장은 “책을 읽어봤다.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한 것 같다. 작가가 ‘소설’이라고 하니까 정색을 하고 구체적인 언급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책에도 등장하는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이 책의 북콘서트에도 게스트로 참여할 예정이다.

김수경과의 인터뷰는 2회에 걸쳐 이어졌다. 11월4일 출판기념간담회와 11월19일 자택에서의 인터뷰다. 간담회 이후에 이어진 시독회에는 김원기 전 국회의장이나 김정길 전 장관, 건축가 승효상, 사진작가 김중만 등이 함께했다. 애초 그 자리에는 신해철도 초청할 예정이었다. 신해철과 그는 좋아하는 영국 록 뮤지션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친해졌고 노무현 3주기 무렵에 자주 만났다. 이혼 소송을 하고 검찰에 불려 다니느라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때 김수경에게 신해철은 노무현을 위해 쓴 <불면> <자살> <황무지>를 데모 형식으로 만들어 보냈다. 들어보니 “너무 슬퍼서 이걸 콘서트에서 연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추모곡은 3주기 때 결국 연주되지 못했다.

지난 5월, 5주기 무렵 중국 베이징에 ‘죽은 자들을 위한 여행’이라는 이름의 투어를 승효상 교수(노무현 묘역 설계자)와 함께 갔을 때 “아이패드에 넣어둔 신해철의 그 곡을 다시 듣는데 가슴이 너무 찢어지더라. 그래서 내가 신해철의 음악을 듣는 장면을 책에 넣었고 이 자리에서 부르려고 했다”고 그는 말했다. 김수경의 요청에 신해철은 “나도 영광”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시독회 날짜가 잡혀 신해철에게 사흘간 전화를 했는데 안 받더라. 보통은 10분 안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는데….” 그러던 차에 신해철이 입원 중이라는 기사가 떴고 작가 후기를 인쇄하던 날 사망했다. “신해철이 추모곡을 만들 무렵 양평에 신대철과 방을 잡아놓고 공동 작업을 하던 때였다. 그때 콘서트라도 하게 해줬더라면 이렇게 미안하지는 않을 텐데…. ‘노통’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보수성에도 화가 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몸을 던진 신해철에게도 너무 미안하다.”.            

 

경매에 나온 김수경의 80억짜리 집

두 번째 인터뷰를 한 장소인 그의 자택은 인터뷰 다음 날 인터넷을 달궜다.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 아파트 81평형이 감정가 80억원이라는 단일 아파트 경매 사상 역대 최고가에 나왔다는 것이다. 이 아파트가 김수경씨의 집이었다.

이혼 전 남편과 함께 살던 이 아파트는 2012년 8월 이혼과 함께 그의 명의로 이전됐다. 동쪽으로 메인 창이 나 있고 한강과 잠실 주경기장이 한눈에 보이는 복층 구조로 된 이 집에 대해 김수경씨는 “이혼 후에 팔고 나가려고 했는데 승효상씨가 ‘그러지 말고 고쳐줄게 거기서 살라’고 해서 수녀원처럼 고친 뒤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실내는 한식을 가미했다. 사방 창에 한옥식 창호를 덧대 주상복합 특유의 과다한 햇살을 막아내고 바닥 면적의 반은 서재와 집 속의 집처럼 한옥 양식으로 꾸며진 작은 다실이 차지하고 있었다. “원고 작업을 위해 꼼짝도 안 하고 집에 갇혀 살고 있다”는 그의 말처럼 서재엔 긴 탁자에 매킨토시 컴퓨터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그는 이 집에서 매주 주말 낮에 분가한 1남 2녀의 자녀와 손자를 모아놓고 직접 요리해 대접함으로써 ‘엄마가 이혼 후에도 건강하게 잘살고 있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집 안에는 그의 취향을 말없이 증언해주는 미술품이 거실과 서재 곳곳에 놓여 있었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이자 2011년 미술 전문지 아트리뷰의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 중 1위에 꼽힌 건축가이자 미술가인 아이웨이웨이의 지름 1m짜리 대형 대리석 접시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설치작가 이불 특유의 강인한 여전사를 연상시키는 날개 달린 상반신 누드에 진주빛 스팡글을 매단 설치 작품이 있었다. 동쪽 창을 사이에 두고 놓여 있는 또 다른 작품은 철제 고깔모자를 쓴 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 김수경씨는 “아이웨이웨이나 이불, 최정화는 모두 무명 시절부터 재능을 눈여겨보고 모은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최정화는 그의 출판사에서 아트디렉팅을 하기도 했고 그의 딸 이서군씨가 시나리오를 쓴 <301, 302>에도 그의 소개로 미술감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소설은 물론 무용 대본을 쓰기도 하는 등 김수경씨는 문학과 그림, 건축, 영화, 무용 등 문화 전반에 걸쳐 교류의 폭이 넓고 안목도 높았다.

그런데 이 집이 왜 경매에 나왔을까. 그는 “세금이나 이혼과는 전혀 상관없다. 아스텍창투 시절 CJE&M과 영화에 공동 투자를 했는데 그게 문제가 되면서 여기까지 번진 것이다. 내가 아스텍 대표라 나에게 책임을 지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CJE&M은 이 집을 2013년 4억217만원에 가압류를 했고 이번에 청구 총액 4억7335만원에 강제 경매를 신청했다. 이 집은 제1금융권과 저축은행 등에 등기부상 근저당 70억7717만원이 설정돼 있다. 세금 체납으로 인한 세무서의 압류도 걸려 있다. 실제로 경매에 넘겨질 경우 CJE&M이 돈을 회수할 가능성은 작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CJE&M은 이번 강제 경매 신청으로 인해 이 집과 김수경씨의 관계를 세상에 알리는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김수경씨도 “나를 압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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