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 파수꾼→호남 맹주 “이정현이 변했다”
  • 양정대│한국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4.11.27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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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지역 예산 챙기기’에 여당 내 시선 복잡

“선거 때 당 지도부가 모두 호남 지역에 ‘예산 폭탄’을 약속했으니 이를 지키긴 해야 할 텐데, 솔직히 다른 지역 의원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어 좀 갑갑하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예산안조정소위원회를 가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새해 예산안 심사에 돌입한 지 사흘째인 지난 11월18일 여권 내에서 ‘김무성 대표 사람’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한 재선 의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7·30 재·보궐 선거 당시 이정현 최고위원 자신은 물론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 전체가 호남에서 예산 폭탄을 앞세웠던 일 때문이다. 이 의원은 “결국 예산이라는 게 한정돼 있어서 어느 한쪽을 늘리면 다른 쪽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벌써부터 의원들 사이에 신경전이 얼마나 치열한지 모른다”고 혀를 찼다.

예산 정국 ‘호남 예산 폭탄’ 딜레마

10월23일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가운데)이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무성 대표(오른쪽)와 이완구 원내대표 뒤를 걸어가고 있다. ⓒ 연합뉴스
여의도 정치권에선 ‘예산 시즌’이 본격화하면 여야를 가리지 않고 각 당 지도부의 고민이 커진다. 지역구 예산을 한 푼이라도 더 따내려는 의원들의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예산 편성에서 실질적인 칼자루를 쥐고 있는 예산안조정소위에 들어가기 위해선 몇 달 전부터 원내 지도부에 공을 들여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수도권 3선 의원은 “지금은 아니지만 나도 초·재선 때는 예산안조정소위에 들어가고 싶어 원내대표를 몇 번 찾아갔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매년 ‘쪽지 예산’과 관련한 비판이 많지만 사실 우리 입장에선 그런 게 중요한 홍보 수단”이라며 웃었다. 지역구 유권자들에게는 그만큼 예산 확보를 위해 노력한 모습으로 비친다는 얘기다.

그런데 올해 새누리당 지도부엔 고민이 하나 더해졌다. 예년 같으면 신경 쓸 이유가 거의 없었던 호남 지역 예산 때문이다. 7·30 재·보선을 통해 이정현 최고위원이 보수 정당 후보로는 26년 만에 전남에서 당선된 데다, 특히 예산 폭탄이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새누리당이 지역 주민들에게 이런저런 약속을 많이 했으니 어떤 식으로든 배려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최고위원 자신도 기회 있을 때마다 ‘호남 예산 지킴이’를 자처하고 있다. 실제로 자신의 지역구인 전남 순천·곡성뿐만 아니라 광주와 전남 광양·영광·담양 등지의 예산까지 챙겨나가고 있다. 이 최고위원실 관계자는 “챙겨야 할 호남 지역 예산 항목이 200개도 더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1월14일 끝난 각 상임위원회의 예산안 심사 과정에서 이 최고위원이 직접 챙긴 호남 지역 현안 관련 예산은 10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 대표 측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최고위원의 정치적 상징성을 감안해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야 할 상황인 건 분명하지만, 텃밭인 영남권은 물론 충청·강원 등 의석이 많은 지역 의원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표실 관계자는 “이완구 원내대표와 함께 새해 예산안을 법정 시한인 12월2일까지 반드시 처리하겠다고 수차례 공언한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력을 하나로 모아내는 것”이라며 “그런데 ‘돈 문제’로 서운한 의원이 있으면 이게 쉽지가 않다”고 토로했다.

이 같은 당내 분위기는 예산안조정소위 위원 선정 과정에서 한 차례 드러났다. 당연히 포함되는 듯했던 이 최고위원이 결국 최종 명단에서 빠진 것이다. 김 대표와 이 원내대표는 공식 회의석상에서 “약속한 예산은 꼭 지킬 수 있게 노력하겠다”고 위로 겸 다짐을 했다. 사실 예산안조정소위에 누가 들어가느냐를 놓고 잡음이 인 적은 종종 있었지만, 특정인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서 당 지도부가 이렇게 나선 건 극히 이례적이다.

이 최고위원 측은 애써 반응을 삼갔지만, 당 안팎에선 김 대표 측의 견제 심리가 작동했다는 얘기가 적지 않다. 이 최고위원 대신 예산안조정소위에 들어간 이는 같은 ‘친박(親朴)계’인 강원 출신 김진태 의원인데, 사실상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이 최고위원의 발을 묶었다는 게 요지다. 김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솔직히 이 최고위원을 배려하는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김 대표, 측근보다 이정현 최고 더 챙겨”

김무성 대표 측이 이정현 최고위원을 부쩍 의식하고 있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최고위원이 청와대 홍보수석 자리에서 물러날 때 다소간의 논란이 있었어도 여전히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腹心)으로 통하는 데다, 김 대표가 대권을 준비할 경우 호남권의 교두보 역할을 실질적으로 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현역 의원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명직 최고위원에 임명할 당시 김 대표 측근 그룹에선 찬반 의견이 팽팽했는데, “당에 기여한 사람이 되는 게 당연하다”며 논란을 단칼에 정리한 사람이 바로 김 대표였다.

호남 예산과 관련해서도 김 대표는 수시로 이 원내대표와 의견을 주고받는다고 한다. 원내대표실 관계자는 “김무성 대표가 자신의 측근들보다 오히려 이정현 최고위원을 더 챙기는 것 같다”고 전했다. 최근 김 대표는 사고 당협위원장 선정에 본격 나서는 등 사실상 1년 반 앞으로 다가온 20대 총선 준비에 시동을 걸었다. ‘김무성 체제’로 당의 체질을 바꾸는 싸움에 돌입한 것이다. 7·14 전당대회 패배 이후 한동안 숨죽이고 있던 친박계가 최근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친박계 맏형’인 서청원 최고위원, 사사건건 김 대표와 각을 세워온 유기준·홍문종 의원 등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당 안팎에서 정기국회가 마무리되고 나면 김 대표를 정점으로 한 비주류와 친박 주류 진영이 정면충돌하는 상황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이미 친박계는 당협 재정비의 주체인 조직강화특별위원회에 친박계 인맥이라곤 초선 의원 1명만 포함됐다며 공개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김 대표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상향식 공천제 전면화 방침과 보수혁신특별위원회 활동을 놓고도 친박계는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우리를 치려는 것”(경북 지역 한 의원)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이런 저간의 흐름은 김무성 대표 측 입장에서 이정현 최고위원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기도 하다. 국회 재입성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는 이 최고위원으로서는 예산 폭탄 공약 이행에 직을 걸 수밖에 없는데, 이는 당 지도부의 적극적인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김 대표 측에서 “이 최고위원을 당내 친박계의 조직적인 움직임과 떼어놓아야 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마침 최근 들어 친박계 의원들 사이에선 “이정현이 변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이 최고위원이 호남 예산 챙기기 행보에 전력투구하느라 친박계 모임에 얼굴을 내비치지 않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김 대표 측 관계자는 “박심(朴心)을 등에 업은 것으로 인식되는 이 최고위원이 ‘나 홀로 의정 활동’을 하는 게 우리로서는 가장 좋은 그림”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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