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14. “제군에게 주는 무기는 동포의 피와 땀이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11.27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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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독립군, 무기 구하려 사투…오늘날 방산 비리에 교훈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무기를 들고 적을 몰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나라가 망하자 너도나도 만주로 망명해 독립군이 되었다. 그런데 독립군의 가장 큰 문제는 무기 조달이었다. 1920년께까지 독립군은 다양한 무기를 갖고 있었는데, 주요 무기 중 하나가 체코제였다. 독립군이 체코제 무기를 갖게 된 데는 국제정치학적으로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1917년 10월 볼세비키 혁명에 성공한 레닌은 이듬해 3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발을 뺐다. 그해 7월 미국·영국·프랑스 등이 시베리아에 있던 체코군을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출병하는데, 그 속셈은 볼세비키 혁명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른바 간섭국으로서 모두 14개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일본도 영일동맹을 명분 삼아 시베리아로 출병했다. 미·영·프·일 4개국이 모두 2만8000명의 군대를 파병하기로 합의했지만, 일본은 무려 7만3000명의 대군을 보냈다. 일본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만 진격하기로 연합국과 약속한 것을 깨고 바이칼 호수 서쪽의 이르쿠츠크까지 점령했다.

O.S.S.훈련을 마친 광복군 대원들(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사진) ⓒ 뉴스뱅크 이미지
그러나 이 광대한 대지를 통치할 만한 역량은 부족해서 교통 요지만을 지키는 데 급급하다가 붉은 군대와 이에 동조하는 파르티잔들의 게릴라 전법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결국 1920년 제정 러시아를 지지하는 반(反)혁명 세력이 시베리아에 수립한 알렉산드르 콜차크 정부가 붉은 군대에 무너지면서 일본군도 3000~5000여 명의 전사자와 무수한 동사자(凍死者)만 남긴 채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을 주장한 인물이 1923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의 오성륜·김익상 등에게 저격당한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육군대신이었다. 이때 체코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면서 몰래 팔고 간 무기들이 독립군 소유가 된 것이다.

독립군, 총 한 정을 목숨처럼 소중히 다뤄

그런데 이 무기들은 가격이 대단히 비쌌다. 일제가 입수한 독립군의 한 문서에는 소총 1정당 총대와 탄환 100발을 포함해 35원이라고 적혀 있는데,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하던 ‘독립신문’에는 100원 내외라고 전하고 있다. 밀매 시장이다 보니 정해진 가격이 없었던 것이다. 이 무기들을 러시아 연해주에서 북간도나 서간도의 독립군 군영까지 운반하는 것도 무기 구입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었다. 중·소 국경을 통과할 때는 관헌을 매수하거나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인적이 드문 산길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보통 1명당 2~3정의 무기와 탄약을 져 날랐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서 무기가 전달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독립군은 무기를 목숨처럼 소중하게 다루면서 탄약 한 발도 아꼈다. 정의부 중대장이었던 정이형은 자신의 짤막한 자서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총) 한 자루 가격은 100원 내지 300원이요, 탄환은 한 발에 1원까지 한다고 했다. 총은 상하이나 천진(톈진) 같은 외국인 조계지(租界地)에서 독일인이나 유대인 상인들을 통하여 구입하고, 탄환은 중국 군인을 통하면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외국 상인들이 이러한 밀수를 하기 때문에 중국에는 마적이 생기고 군벌이 있는 것이요, 군인들에게 봉급을 잘 주지 않기 때문에 마적을 토벌하러 간다든지 무슨 행사를 한다든지 하여 탄환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하고 팔아먹는다는 것이다. 중국 군인들은 모여 앉으면 투전인데 돈이 없으면 총이나 탄환을 돈 대신에 사용한다고 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무기 공장도 가지지 않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 재미있게 들었다.’(정이형 <나의 망명추억기>)

독립군의 무기는 여러 군데서 구입했기 때문에 그 종류가 아주 다양했다. 일반 장총류는 러시아제 5연발총과 단발총이 주종이었고, 권총류는 루가식 권총이 제일 흔했다. 기관총과 폭탄이라 칭하던 수류탄도 보유했다. <간도지방 불령선인단의 무기 이입(移入) 상황의 건>이란 일제의 정보보고는 1920년 8월께 독립군의 무장 상황에 대해 ‘현재에 있어서 각 불령선인단(不逞鮮人團)이 소유한 무기는 기관총 9정, 군총 약 3300정, 권총 약 730정, 탄약 약 19만5300발, 수류탄 약 1550개를 셀 수 있다’라고 적고 있다. 무려 4000명 이상을 무장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다.

무기 구입 자금은 만주와 연해주, 국내 한인들에게서 모았는데, 군자금을 모으다가 투옥되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1920년의 봉오동·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이 대거 국경을 건너 한인들을 학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킨 후에는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하는 일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독립군들은 상하이나 톈진의 외국인 조계지로 시선을 돌렸다. 나중에 참의부 참의장(參議長)이 되는 김승학은 1920년 상하이에서 무기를 구입해 남만주까지 운반했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1920년 2월 보름 무렵 압록강 대안의 안동(安東·지금의 단둥)에서 이륭양행 소속 기선을 타고 상하이로 향했다. 이륭양행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아일랜드인 조지 쇼가 운영했는데, 그는 한국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김승학은 1920년 7월 말까지 권총과 소총 240여 정을 구입했는데, 문제는 이를 남만주까지 가지고 가는 일이었다. 김승학은 철궤(鐵櫃) 4개의 내부를 변조해서 무기를 넣은 후 칠을 다시 하고 나무 상자로 겉을 포장했다. 그는 한국인보다 감시가 덜했던 중국인 장해봉(張海峯)에게 운반 임무를 맡겼다. 물론 무기라는 말은 하지 않고 만주에서 생산되는 누에를 사다 팔면 많은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면서, 철궤를 관전현 장음자(長陰子)의 조 아무개에게 전해주면 그가 누에를 사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승학은 장해봉과 함께 다시 이륭양행 소속의 기선을 타고 안동으로 되돌아왔는데 정보가 새나갔는지 평소처럼 삼도랑두(三道浪頭)가 아니라 신의주와 안동현을 연결하는 철교 밑에 멈춰서 하선하지 못하게 했다. 다음 날 배가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간다는 소식이 들리자 김승학은 권총을 휴대하고 소형선 한 척을 빌려 하선했다. 육도구(六道溝) 강안까지 3분의 2쯤 갔을 때 일제 경비선이 쫓아와서 수중에 뛰어내려야 했다. 가까스로 언덕에 올라왔으나 하반신은 흙투성이가 되고 신발도 벗겨졌다. 김승학은 “그때 왜선(倭船)은 벌써 우리가 타고 온 배에 올라가서 선부를 구타하여 소리 지르며 괴로워하는 소리가 들렸다”(김승학 <망명객행적록>)고 회고하고 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왜경(倭警) 4명이 상륙해서 쫓아오는 바람에 김승학은 만주의 광활한 옥수수 밭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경찰이 정찰견을 풀어서 수색하는데, 개가 다가오면 쏠 작정을 하고 누웠으나, 다행히 개는 다른 곳으로 갔다. 일본 경찰은 한 시간씩 교대하면서 이틀 밤낮을 지키는데 목은 마르고 모기까지 달려들었다. 옥수수 밭에서 포위된 채 이틀을 새우던 김승학은 한시 한 구절을 지어보았다. ‘사냥개가 오는 것은 두려울 것 없지만/모기떼가 덤벼드니 이건 가장 무섭구나 (不?偵犬入 最畏蚊群侵) 목마를 때는 오줌으로 목을 축이고/배가 고프면 옥수수를 그냥 씹더라(渴含自己水 飢餐玉蜀黍)’

3일째 옥수수 밭 밖으로 빠져나갔는데 그만 발각되고 말았다. 형제봉으로 달아나던 김승학이 위에서 바위를 굴려 대항하자 왜경들이 다가오지 못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겨우 포위망을 벗어나 안동현의 비현정미소를 찾아가자 주인 김재엽은 경찰이 10여 일 동안 매일같이 찾아왔다며 빨리 피하라고 했다. 게다가 중간에 팔도구(八道溝) 중국음식점에서 일제의 밀정 김효선을 만나, 겨우 뒷문으로 도주해 중국인 친지의 집에 숨었다가 중국옷으로 바꾸어 입고 이튿날 새벽에 마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관전현 장음자의 광복군 참리부(參理部) 참리부장 조병준의 집이었다. 안동현 방면에서 물건이 온 것 없느냐고 물으니 “7~8일 전에 장해봉이 철궤 4개를 가져왔기에 받아 두었다”고 말했다. 무기가 도착했으니 항일 무장투쟁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셈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독립군은 흥분했다.

김진태 검찰총장(맨 가운데) 등이 11월21일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에서 열린 ‘방위사업 비리 합동수사단 현판식’에서 현판 제막 후 박수를 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해야 한다”

‘몇 날 후에 조(병준) 선생과 광복군 사령부 간부 일동이 내방하였다. 그날 밤에 청년들에게 외부를 파수케 하고 철궤를 해부하니 그 속에서 대·소 무기 240정과 탄환 수만 발이 나왔다. 좌중은 의외라며 감탄하고 청년들은 사기가 격분하고…’(김승학 <망명객행적록>)

그토록 소원하던 무기를 손에 쥔 독립군은 흥분했다. 김승학은 이 무기를 관전현 수혈립자(水穴砬子)로 운반해 무기 수여식을 거행하면서 청년 독립군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광복군 사령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직속 군단으로서 임정 군무부를 대표해 우리의 원수 왜노(倭奴)와 혈전하는 기관이요, 제군에게 주는 무기는 국내의 동포들이 피와 땀을 모아서 마련한 것이며… 이 무기는 국내 동포들이 주는 것이며,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주는 것이니 제군은 그렇게 알고 무기를 생명과 같이 사랑하여 일발의 탄환이라도 헛되게 쓰지 말고, 1탄에 왜적 1명씩 잡기로 결심해야 한다.”(김승학 <망명객행적록>)

김승학은 “그 후부터는 국내에 들어가서 적의 기관을 파괴하는 일에 전력하였는데, 3~4개월 동안 막대한 성과를 거두게 되어… 왜적의 기관에서 발표한 것만으로도, ‘교전 78회, 주재소 피습 56곳, 면사무소 및 영림창(營林廠) 소훼(燒?·불사르는 것) 20곳, 적경(敵警) 사살 95명’의 전과를 얻었고, 우리 측에도 전사 13인, 부상 9명이 생겼는데, 압록강 연안 일대와 평북 지방은 일시 전장화(戰場化)하여 적측에서는 상당히 당황했었다”라고 회고했다. 

현재 방위산업 비리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높다 못해 배신감까지 느끼고 있다.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는 그 뿌리를 캐보면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한국군이 독립군의 정신을 계승했다면 군수 비리 따위는 저지를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독립군들 사이에서는 훈련 강도는 셌어도 구타 따위도 꿈꾸지 못했다. 모두 일본군의 폐습이 지금까지 남아서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독립군의 정신으로 군을 재무장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터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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