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4. 삼성 이병철家 / 이병철-홍진기 사돈 맺으며 ‘동지적 관계’로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4.11.27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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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홍라희 1966년 8월 도쿄에서 첫 만남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유년 시절을 상징하는 단어는 ‘고독’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자랐다. 사업에 바쁜 이병철은 차분하게 아들을 돌볼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건희는 고독 속에서 통찰력을 키우고 정신적으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허물어지지 않고 외로움과 벗할 줄 알게 되면서 그는 세상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됐다. 어쩌면 오늘날 이건희가 있었던 데는 어릴 적 고독과 홀로 맞섰던 경험이 바탕이 됐는지도 모른다.

1942년 1월9일 대구에서 이병철의 셋째로 태어난 이건희는 젖을 떼자마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의령으로 보내져 친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병철은 사업을 키우느라 워낙 바빴고 어머니 박두을은 그런 이병철을 곁에서 뒷바라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건희가 유치원에 가기 위해 대구로 와 어머니의 품에 제대로 안긴 것은 네 살 때였다. 1947년 이병철이 사업장을 서울로 옮기면서 이건희는 서울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하지만 초등학생 시절에 다섯 차례나 학교를 옮겼다. 친구를 사귈 겨를이 없었다.

2013년 5월31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제23회 호암상 시상식’에 이건희 삼성 회장과 홍라희 여사가 참석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게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2세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말도 통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는 일본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외로움을 느꼈다. 바로 위 형인 이창희와 함께 자취를 했지만 나이가 아홉 살 차이가 나 같이 어울릴 기회는 많지 않았다. 독서, 영화 감상, 명상에 잠기기 등이 이 시절 이건희의 취미였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건희는 남들 앞에 잘 나서지 않았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그를 일컬어 ‘은둔의 경영자’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이건희가 골프도 혼자 치는 등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데는 어린 시절의 이런 경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집단의 중요성을 느낀 것은 서울사대부고에 다닐 때 레슬링부와 럭비부에 들어가 활동하면서부터였다.

이건희가 홍진기 전 법무부장관의 장녀 홍라희와 결혼한 것은 1967년 5월27일이다. 하지만 홍진기가 이건희를 처음 본 것은 3년 전인 1964년이다. 당시 이건희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병철이 이건희를 홍진기에게 소개했다. 홍진기와 이건희는 첫 만남에서 서로에 대해 호감을 가졌다.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가 쓴 <유민 홍진기 이야기-이 사람아 공부해>에서는 두 사람의 결혼과 관련한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이건희, 1966년 ‘한비 사건’ 때 유학 포기

홍라희는 대학 3학년 때인 1965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했다. 미술애호가였던 이병철은 거의 매년 국전을 관람했다. 홍진기는 홍라희에게 이병철을 안내하라고 했다. 홍라희는 처음에는 이병철 회장을 어려워하여 “제가 어떻게 해요” 하고 거절했지만 결국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홍라희는 이병철의 국전 관람을 안내했다. 이후 이병철의 아들과 홍진기의 딸이 결혼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다음 해 홍라희는 졸업반이 되어 다시 국전 출품작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이건희는 일본에 와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멕시코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가 미국 재입국 비자를 챙기지 못해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잠시 일본에 머물게 된 것이다. 이병철은 홍진기에게 “지금 건희가 일본에 있습니다. 둘이 만나게 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제안했다. 아버지로부터 얘기를 들은 홍라희는 펄쩍 뛰었다. 국전 출품 준비로 바빴고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보고, 아니면 아니라고 결말을 내야 되는 것 아니냐”며 일본에 가지 않겠다는 홍라희를 어머니 김윤남이 겨우 달래 일본행 비행기에 태웠다. 1966년 8월,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에 이병철 내외가 이건희를 데리고 나오고 김윤남은 홍라희를 데리고 나왔다. 이건희와 홍라희의 첫 만남이었다.

홍라희는 헤어지면서 “올 겨울방학 때 뵙겠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이건희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연이 있었던지 9월15일 이른바 ‘한비 사건’이 터지면서 이병철은 이건희에게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일을 도우라고 지시했다. 이건희는 귀국 직후인 10월 동양방송에 이사로 입사했다. 이건희는 홍라희와 서울에서 데이트를 시작했다. 홍라희는 그해 국전에서 ‘센터 캐비닛과 의자’라는 작품으로 공예 부문 특선을 받았다. 두 사람은 1967년 1월 약혼했고 4개월 뒤인 5월에 결혼했다.

이건희와 홍라희의 결혼은 삼성의 발전 과정에서 단순한 결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병철과 홍진기는 사돈 관계를 맺음으로써 말 그대로 ‘동지적인 관계’로 나아갔다. 이병철은 <호암자전>에 이렇게 썼다. “홍진기 사장은 내 사돈이면서 고락을 같이한 동지라고 생각하고 있다.(중략) 홍 사장만큼 나를 이해해주고 협력해주는 사람도 드물다.” 그 말대로 이병철은 삼성그룹 전체의 방향과 진로에 대해 홍진기의 의견을 구했다. 1970년대 반도체 사업 구상이나 삼성중공업 설립에 대해 상의를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홍라희는 김영희 대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은 ‘이병철+홍진기+이건희의 합작품’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사업 진출에 대해 처음 관심을 가진 분은 이병철 회장님이실 겁니다. 이 회장님이 일본에서 반도체에 관한 말을 듣고 아버지에게 한번 검토해보라고 했겠지요. 아버지는 그때부터 반도체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셨어요. 어머니가 한 번씩 불평하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저 연세에 밤 1시까지 반도체 책을 읽는단다.’ 제가 머리맡에 놓인 책을 보니 갈피갈피마다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어요. 그렇게 반도체를 공부한 아버지는 사위인 이건희 회장에게 ‘호암(이병철 회장)이 반도체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자네도 공부해두게’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부진, ‘평범한 회사원’ 임우재와 결혼

홍라희는 “남편은 기업인으로서 행운을 타고났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님으로부터는 천부적인 직관력과 동물적인 경영 감각을 물려받았고, 장인인 우리 아버지로부터는 행정 경험, 법에 대한 개념, 그리고 사회에 대한 총괄적인 개념을 듣고 배웠다”고 말했다. 이건희 또한 홍진기에 대해 “장인어른은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셨다. 그런 사랑은 부모한테도 못 받아봤고, 형제한테도 못 받아봤다. 그런 인격과 능력을 가진 분은 다시 보기 힘들다”라며 애틋한 마음을 토로하곤 했다.

홍라희는 1983년 현대미술관회 이사를 맡으며 대외 활동을 시작했다. 중앙일보 상무를 맡기도 했고 1995년에는 호암미술관 관장, 1996년에는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전공을 살려 2004년 11월, 국내 최고 수준의 미술관인 ‘리움’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승지원’ 옆에 개관해 관장을 맡았다. 엄청난 컬렉션을 자랑하며 ‘미술계 파워리더 1위’ 자리를 놓치지 않는 큰손이기도 하다. 홍라희는 패션디자인과 미술에 관심이 많다. 집안 잔칫날 패션쇼를 하기도 하고, 안양 베네스트 골프장의 캐디 유니폼을 직접 골라주기도 했다. 홍라희는 홍석현(중앙미디어네트워크 회장), 홍석조(BGF리테일 회장), 홍석준(보광창업투자 회장), 홍석규(보광그룹 회장), 홍라영(리움 총괄부관장)을 동생으로 뒀다. 

이건희와 홍라희는 1남 3녀를 뒀다. 외아들 이재용은 삼성전자 부회장, 맏딸 이부진은 호텔신라 사장, 둘째 딸 이서현은 제일모직 사장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구조본 공식 문서에서 ‘이건희 회장’ 등의 표현을 직접 쓰는 경우는 없었다. 이런 표현을 직접 쓰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이었다. 이건희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대문자 ‘A’가 쓰였다. 홍라희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는 A자 옆에 작은 점을 찍은 ‘A'’가 들어갔다. 이재용은 ‘JY’, 이부진은 ‘BJ’, 이서현은 ‘SH’라고 적곤 했다.”

삼성의 후계자 이재용은 경기초-청운중-경복고-서울대 동양사학과-일본 게이오 대학을 나왔다. 하버드 대학 비즈니스스쿨도 졸업했다. 1998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 중이던 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의 딸 임세령과 결혼했다. 홍라희(이재용 모친)와 박현주(임세령 모친)가 불교 모임인 불이회에서 만나 친분을 쌓은 것이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두 사람은 아들 이지호와 딸 이원주를 두었으나 결혼 11년 만인 2009년 이혼했다.

이혼 배경을 이해하는 데 김용철 변호사의 기록이 도움이 될 듯하다. “임창욱은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2005년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년 7개월을 복역한 뒤 사면됐다. 아버지가 감옥살이를 하는 것을 본 임세령의 마음은 괴로웠을 게다. 애초부터 이건희 집안은 임창욱 집안을 한참 내려다보는 태도를 취했다. 자존심 센 성격인 임창욱이 참기 힘든 분위기였다. 임세령의 이혼 소송 소식이 썩 놀랍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다.” 2013년 영훈국제중에 입학했던 이재용의 아들 이지호는 현재 미국 동부에 있는 한 명문 사립중학교에 다니고 있다. 이재용은 창업주 이병철의 추모식을 주관하고 삼성SDS 상장을 통해 상속세 실탄을 마련하는 등 회장직 승계를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임세령은 현재 대상그룹 상무로 있는데 동생 임상민 상무와의 후계 경쟁이 관심을 끌고 있다. 대상그룹 임대홍 창업주의 아들인 임창욱 명예회장은 임세령·임상민 두 딸을 뒀다.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셋째 딸이자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동생인 박현주가 임창욱의 부인이다. 임창욱의 동생인 임성욱 세원그룹 회장은 한국산업은행 부총재보를 지낸 손필영의 외동딸 손성희와 결혼했다.

서울 이태원동에 자리한 삼성미술관 리움. ⓒ 시사저널 포토
이서현, 동아일보 사장 동생과 혼인

경기초-예원학교-대원외고-연세대 아동학과를 졸업한 이부진은 경영 스타일이 이건희와 가장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이부진이 2001년 호텔신라 부장으로 입사했을 때 이건희가 호텔신라에 두 달 가까이 직접 숙박한 것은 이건희의 이부진에 대한 부정(父情)의 깊이를 알게 한다. 이부진은 1995년 평범한 회사원이던 임우재씨를 처음 만나 1999년 결혼해 화제를 뿌렸다. 단국대 전자계산학과를 나온 임우재는 한남동 이건희 회장 자택과 관련 있는 전산망 구축 작업을 하다가 이부진을 만났다고 알려져 있다.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경영에 참가할 야심을 키워온 이부진에게는 배경이 든든한 남편이 부담스러웠을 수 있다”고 썼다.

임우재는 결혼 이후 미국으로 유학 가 MIT에서 MBA를 땄다. 두 사람은 2007년 아들을 낳았으나 2014년 10월8일 이부진이 남편 임우재 삼성전기 부사장을 상대로 수원지법 성남지원에 이혼 및 친권자 지정 소장을 제출해 현재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 이부진이 이혼 소송을 제기하기 전 재계에는 오히려 임우재가 이혼을 원한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그가 ‘삼성가 생활’에 답답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아들 이재용의 이혼에 이어 딸 이부진마저 이혼하게 되면서 삼성가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보는 이도 늘어났다.

이건희의 둘째 딸 이서현은 경기초-예원학교-서울예고-뉴욕 파슨즈 디자인스쿨을 나왔다. 동아일보 김재호 사장의 동생인 김재열과 결혼했다. 이로써 삼성은 중앙일보-동아일보와 혼맥으로 엮였다. 이재용과 청운중학교 동기동창인 김재열은 현재 삼성엔지니어링 사장이다. 이서현-김재열은 딸 셋, 아들 하나를 뒀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서현과 김재열이 결혼할 당시, 김재열의 결혼 예물 시계는 세계 4대 명품 시계 가운데 하나인 바쉐론 콘스탄틴이었다. 입고 다니는 양복은 소매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스티치(바느질) 된 수제 양복이었다”고 했다. 막내 딸 이윤형은 이화여대 불문과를 나왔는데 2005년 뉴욕 대학에서 예술 경영을 공부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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