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
  • 이영종│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
  • 승인 2014.12.0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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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부부장’ 실세 부상한 김여정…오빠 김정은의 절대적 후원 등에 업어

김정일 국방위원장 추도대회가 열린 2011년 12월29일 평양 김일성광장. 우리의 귀빈석에 해당하는 주석단에는 김정은 당시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을 비롯한 당과 군부의 핵심 간부들이 도열했다. 긴 검은색 코트를 입은 김정은도 영하의 날씨 때문인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부동자세를 유지했다. 김정은의 후견인으로 낙점돼 승승장구하던 리영호 군 총참모장(2012년 7월 숙청)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한 20대 초반 여성이 대열에서 이탈해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한참 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김정은이나 핵심 실세 간부들과는 달리 자유분방하게 몸을 움직이는 장면이 관영 조선중앙TV 화면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최고 권력을 거머쥔 김정은이 아주 각별하게 챙기는 여동생 김여정이었기 때문이다.

11월25일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여동생 김여정(빨간색 원)과 함께 대표적인 반미교양시설인 황해남도 신천박물관을 방문했다고 로동신문이 전했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공군 지휘관들의 전투비행기술 경기대회 우승자에게 메달을 걸어주고 있는 가운데 김여정(빨간색 원)이 옆에서 메달을 들고 서 있다.(5월10일 조선중앙TV 보도) ⓒ 조선중앙통신 연합
부모가 생전 즐겨 입던 ‘야전솜옷’ 차림 등장

평양 권력의 중심부에서 김여정이 뜨고 있다. 건강 문제로 40일간 공백을 보였던 김정은 조선노동당 제1비서가 지난 10월 중순 권력 전면에 복귀한 뒤의 변화다. 11월27일 조선중앙통신을 비롯한 북한 관영 매체들은 김여정이 김정은을 따라 4·26만화영화촬영소를 방문한 소식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를 ‘노동당 부부장’으로 호칭했다. 처음으로 공식 직함을 달고 오빠의 통치활동을 수행·보좌하고 나선 것이다. 당 부부장은 우리의 차관급에 해당한다. 대북 정보 부서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김예정’이란 이름을 쓰며 당 선전선동부의 과장 직함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올 들어 직위에 급격한 상승이 이뤄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김여정은 지난 3월 김정은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투표 때 동행하며 ‘노동당 책임일꾼’으로 불렸다. 북한에서 ‘일꾼’은 간부를 의미한다. 그가 당의 핵심 직책을 맡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호칭뿐만이 아니다. 김여정은 처음으로 손에 수첩과 펜을 들고 나왔다. 예전처럼 그저 오빠를 따라다니는 수준이 아니라 지시 사항을 꼼꼼히 기록해 이를 이행하고 점검하는 보좌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최룡해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나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등 실세 간부들도 손에는 늘 수첩이 쥐어져 있다. 그만큼 군부대나 공장·기업소 등 현장을 방문한 김정은의 발언을 받아 적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의미의 ‘적자생존’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정부 당국자는 “수첩을 들고 있다는 건 다른 당과 군부의 핵심 측근들처럼 공식 보좌진에 진입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김여정에게 모종의 역할이 분명하게 주어져 있다는 설명이다.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당내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나 선전선동부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지난 11월19일자 로동신문은 김여정이 오빠의 공개 활동을 다시 수행하기 시작한 소식을 전하며, 그의 권력 전면 진출을 예고했다. 9월3일 평양에서 열린 모란봉악단 공연 관람 이후 77일 만의 김여정 등장에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감지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옷차림 변화에 이목이 집중됐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전에 즐겨 입던 ‘야전솜옷’ 차림이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군부대나 공장 방문 때 늘 연하늘색 겨울 외투인 이 옷을 입었다. 북한 내부 기록영화는 김정은·여정 남매의 생모인 고영희도 이 옷차림으로 부부 동반해 군부대를 방문한 장면을 보여준다. 김여정이 당 부부장 직함을 공개하고 나선 시점에 부모가 생전에 입던 야전솜옷을 걸치고 나온 배경에 정부 당국과 북한 전문가들은 주목한다. 김여정이 자신의 패션을 통해 당 간부와 주민들에게 뭔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평양 핵심층 사이에선 이미 “모든 길은 여정 동지로 통한다”는 입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노동당과 군부의 주요 보직·인사 이동은 물론 사업권 등을 김여정이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부상은 2012년 7월 평양 능라인민유원지 개장 행사 때 이미 예고됐다. 당시 당·정·군의 핵심 간부들이 부동자세로 도열해 김정은·리설주 부부의 도착을 기다릴 때 김여정은 행사장을 뛰어다니는 자유분방함을 드러냈다. 당시 화면을 분석한 대북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북한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김여정”이란 말이 나왔다. 오빠 김정은도 이런저런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김여정의 경우는 다르다는 점에서였다.

이런 절대적 권한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 오빠의 든든한 배경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김여정은 김정은이 10대 시절 스위스 베른국제학교에 유학할 때 함께 체류했다. 부모를 떠나 서방 세계에서 스위스 대사 이철(현 외무상 이수용과 동일 인물)을 후견인 삼아 지내야 했다. 당시 느꼈을 어린 여동생에 대한 애틋함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지난해 12월 고모부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 국가반란 혐의로 전격 처형된 후 김여정에게 더욱 힘이 쏠릴 수밖에 없게 됐다. 남편의 사망으로 충격에 빠진 고모 김경희는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감췄고, 대신 김여정이 그 빈자리를 상당 부분 채우고 있을 것이란 게 정보 당국자들의 분석이다.

올케 리설주보다 막강한 권력 행사할 듯

올케인 리설주와 일정한 역할 분담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은하수관현악단 소속 유명 가수 출신인 리설주는 김정은 집권 첫해인 2012년 ‘부인 리설주 동지’로 불리며 등장한 ‘평양판 신데렐라’다. 25세 동갑내기인 리설주와 김여정 둘 중 누가 더 권력 중심에 가까우냐 하는 것도 관심거리다. 김정은과의 연결 고리가 ‘사랑’이냐 ‘핏줄’이냐 하는 차이를 짚어보면 김여정이 당연히 우위에 설 수밖에 없다는 데 힘이 실린다.

그동안 평양 로열패밀리 여인들은 은둔을 강요받았다. 고영희도 김정일과 28년간 살았지만 단 한 차례도 퍼스트레이디로 공개석상에 서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부인 리설주에 이어 여동생 김여정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일각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여동생 김경희 노동당 비서의 관계와 유사할 수 있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하지만 젊은 시절에도 공개 활동을 자제하고, 남편 장성택에게 힘을 대신 실어줬던 김경희와는 크게 다를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제2의 김경희’ 이상이 될 것이란 얘기다. 지금의 기세대로라면 오빠의 절대 권력을 기반으로 평양 파워엘리트 그룹의 최고 중심 인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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