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비 왕’이 아니라 ‘뻥튀기 왕’이잖아
  • 김진령 기자 (jy@sisapress.com)
  • 승인 2014.12.0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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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조사에서 연비 과장 확인…수입차 업체들 ‘나 몰라라’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도 국내 자동차업계의 핫이슈는 고연비였다. 같은 기름으로 더 긴 거리를 달리는 고연비는 기술력의 상징이자 현명한 소비자의 선택이었다. 심지어 프리미엄급 차로 분류되는 독일차 3사가 모두 고연비의 디젤 엔진을 앞세운 연비 마케팅으로 시장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고연비’라고 내세운 근거인 ‘공인 연비’가 과장됐다는 국토교통부와 산업통상자원부의 발표가 나오면서 소비자들이 혼란에 빠졌다.

지난 6월26일 국토부는 ‘2013년 자동차 연비 자기인증 적합조사’ 결과 싼타페와 코란도 스포츠 2개 차종의 연비가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산자부는 싼타페와 코란도 스포츠의 신고 연비와 사후 측정 연비가 오차 범위 ±5% 이내에 들어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다. 대신 산자부는 A4(아우디코리아)와 티구안(폭스바겐코리아), 그랜드체로키(크라이슬러), 미니(BMW코리아) 등 4개 차종에 대해 “연비 부적합으로 과태료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토부와 산자부가 서로 다른 사후 연비측정 결과를 내놓자 소비자는 큰 혼란에 빠졌다.

6월26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자동차 연비 관련 관계 부처 합동브리핑에서 정동희 국무조정실 산업통산미래정책관(가운데)이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쌍용차 “국토부 조사 결과 더 알아봐야”

대다수 자동차 소비자는 ‘공인 연비’와 실제 주행 연비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운전 습관이나 도로 사정 등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 문제는 정도의 차이다. 국토부 조사에서 싼타페의 복합연비는 신고치보다 8.3% 떨어지는 것으로 나왔다. 제품 정보에는 리터당 14.4㎞를 달릴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3.2㎞만 달릴 수 있다는 의미다. 코란도 스포츠도 제조사는 리터당 11.2㎞를 달릴 수 있다고 했지만 국토부 조사 결과로는 10.0㎞만 가능했다. 두 차량 모두 리터당 1㎞ 이상 차이가 난 것이다. 국산차 연비가 실제보다 부풀려졌다는 소비자들의 심증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심지어 고연비를 장점으로 내세우던 독일차인 티구안과 A4도 ‘뻥연비’라고 산자부는 발표했다.

문제는 ‘가짜 광고’에 속은 소비자들에 대한 보상 방안이다. 지난 8월 현대차는 문제가 된 싼타페 2.0디젤 2WD AT 모델을 구입한 소비자에게 ‘자발적인 40만원 보상안’(총 14만여 대, 560억원 규모)을 발표했다. 쌍용자동차는 코란도 스포츠 CX7의 연비가 과장됐다는 국토부의 조사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국토부에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토부에선 “조사 결과를 놓고 쌍용차와 청문회를 열었다”고 밝혔다. 그 와중에 한국GM이 11월 초 크루즈 1.8 가솔린 모델의 연비가 부풀려졌다는 사실을 국토부에 자진 신고하고 차량 소유자들에게 1인당 42만원씩 최대 330억원가량을 보상하기로 했다. 국토부의 강화된 연비 검증이 국내 자동차 제조사들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과장 연비 표기를 이유로 차 제조사에 과징금(국토부)이나 과태료(산자부)를 집행했다는 얘기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이번 사태로 인해 국토부와 산자부로 나뉘어 혼선을 빚었던 연비에 대한 관리·감독 권한 기능이 국토부로 통일됐을 뿐이다.

정부는 과장 연비 표시로 적발된 차 제조사에 과징금 부과 외에는 차 제조사로 하여금 소비자에 대한 배상 명령을 강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소비자가 국토부와 산자부의 이번 처분을 바탕으로 사법적인 절차(소송)에 의해 각자 권리를 찾으라는 의미다.

정부 “소비자 배상 명령 강제할 수 없다”

외국차 업체는 한 술 더 뜬다. “본사의 지침이 내려오지 않았다” 또는 “아직 검토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폭스바겐코리아는 “티구안의 표시 연비는 아직 바꾸지 않았다. 정확한 통보가 내려오지 않고 있다. 내부 논의 중”이라고 밝혔다. 이 문제와 관련해 일각에선 “자동차 연비 표시는 통상 마찰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 미묘한 문제”라는 시각을 보이지만 정부가 말로만 과징금 부과를 발표하고 집행에 뜸을 들이며 눈치를 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과장 연비 표시 자동차 소유자들의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이끌고 있는 법무법인 예율의 김웅 변호사는 “정부의 행정 절차가 규정대로 집행된다면 소송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단 국내에 주력 사업장을 두고 국토부를 ‘상전’으로 모시고 있는 현대차와 한국GM은 자발적인 보상안을 발표해 정부의 처분을 존중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폭스바겐코리아·아우디코리아·크라이슬러코리아·BMW코리아 등 세계 자동차 시장의 거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 주목된다.


“그동안 속인 기름 값 토해내라” 


지난 7월 법무법인 예율은 싼타페, 코란도 스포츠, 티구안(폭스바겐코리아), A4(아우디코리아) 등 연비 부적합 판정 차종 소유자 1785명을 대리해 서울 중앙지방법원에 현대차·쌍용차·폭스바겐코리아·아우디코리아 등 6개 자동차업체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위임자 중에는 싼타페 오너가 1517명으로 가장 많았고 총 소송가액은 29억원에 달한다. 이어 8월 초 3946명이 참가한 2차 소송이, 9월에는 878명이 참가한 3차 소송이 각각 접수됐다. 8월에 현대차가 40만원 보상안을 발표하자 소송 제기인 중 500명 정도가 소송을 취하했고 나머지는 진행 중이다.

1인당 소송가액을 보면 그랜드 체로키가 300만원으로 가장 높고 코란도 스포츠 250만원, 싼타페 150만원, 미니컨트리맨 100만원, 티구안 95만원, A4 65만원 등이다. 표시 연비와 사후 측정치의 차이가 심할수록 소송액이 크다.

예율 측은 11월 초 한국GM이 쉐보레 크루즈 가솔린 1.8 모델의 연비를 스스로 정정하자 크루즈 소비자 소송단도 모집하고 있다. 예율 측은 소송 착수금 없이 시작한 싼타페 건과는 다르게 이번 크루즈 건은 소송 참가자 1인당 1만5000원의 착수금을 받고 있다. 예율 측은 “소송 진행 중 개별적으로 합의하고 소송을 취하하는 이탈자를 막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예율의 김웅 변호사는 “제품 하자로 인한 소비자 집단 소송은 이번 건이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최초다. 대기업을 상대로 하는 소송은 기간이 오래 걸린다. 현대차가 자발적으로 보상안을 내놓은 게 소송단에 유리하지만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보상’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정부도 연비 부적합 판정을 받은 차종만 공개했을 뿐 구체적인 후속 절차를 밟고 있지 않아 재판 결과는 내년 말이나 돼야 나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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