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 스캔들>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인기를 모은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53). 그가 새 책을 내고 독자의 사랑까지 받고 있다. 2006년 처음 구상했던 내용이 8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고 한다.
그가 “<에디톨로지>는 지금까지 내가 쓴 책 가운데 가장 진지하게 몰입한 책”이라고 했지만 책은 진지하기는커녕 시작부터 자극적이다. 첫 장을 펼치면 모래밭에 누운 나체의 여인 사진이 나온다. 두 팔로 풍만한 가슴을 감싼 여인의 배꼽 아래에 아이팟이 놓여 있는 사진이다. 김 소장은 이 사진을 두고 변태와 창조적 인간을 분류하는 법을 설명한다.
“생식기에 집중하는 것은 동물적 본능을 가진 인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본능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자만이 남과 다른,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시선은 곧 마음이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대상이 정의되고, 세계가 구성된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여태껏 살아온 방식이다. 우리는 익숙한 방식과 타성에 젖어 습관대로 사고하며 일상을 반복한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이 너무 세분화돼 서로 전혀 소통이 안 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나눌 수 있는 최소 단위로 나누고, 각 부분을 자세히 분석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근대의 해석학은 그 한계를 드러낸 지 이미 오래다. 오늘날 통섭·융합을 부르짖는 이유는 이 낡은 해석학으로는 더 이상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에디톨로지인가. 통섭이나 융합은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뭐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구체적 적용도 무척 힘들다. 자연과학자와 인문학자가 그저 마주 보며 폼 잡고 앉아 있다고 통섭과 융합이 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에디톨로지는 인간의 구체적이며 주체적인 편집 행위에 관한 설명이다.”
그의 말대로 <에디톨로지>는 고리타분한 이론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찾아내고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는 ‘창조’ 혹은 ‘편집’ 행위를 설명한다. “PD나 영화감독은 이 시대 최고의 편집자다. ‘제7의 멤버’로 불리는 <무한도전>의 김태호 PD가 만드는 자막은 이제까지 우리가 봐왔던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독자의 호응을 끄는 대목도 꽤 많다. “인간이 가장 창의적일 때는 멍하니 있을 때다. 멍하니 있을 때, 생각은 아주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그러다 ‘아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할 때가 있다. 그러고는 그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거꾸로 짚어나간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찾아냈을 때, 자신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날아다녔던 생각의 범위에 놀라게 된다.”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의 또 다른 편집
김 소장은 스티브 잡스의 말을 빌려 ‘에디톨로지’의 배경을 설명했다. 21세기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꼽히는 그의 능력 역시 따지고 보면 ‘편집 능력’이었다며. 스티브 잡스는 “뉴스를 모으고 편집하는 조직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과거 어느 때보다도 ‘편집자’가 중요한 세상이 됐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편집을 통해 새로움을 창조하는 방법론으로 ‘지식 편집’을 강조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양질의 정보를 선별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분류의 변신과 합체가 언제든 가능하다. 원고를 써야 할 때는 각 노트북과 노트북 안에 들어 있는 각각의 ‘노트’가 편집된다. 검색으로 각 데이터를 불러내 새로운 분류를 만든다. 네트워크적 지식의 생성이다. 내 에버노트에는 현재 수천 개의 노트가 저장돼 있다. 이어령 선생의 에버노트에는 1만4000개의 노트가 저장되어 있단다. 팔십 노인의 데이터베이스다. 정말 많이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