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회 문건’과 ‘풍문탄핵’
  • 김재태 | 편집위원 ()
  • 승인 2014.12.11 11:4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건의 문서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공식적으로 아무런 직함도 갖고 있지 않은 한 인물이 화제의 중심으로 떠올랐습니다. 세계일보가 특종 보도한 청와대 내부 감찰 보고서에서 그는 웬만한 권력자 이상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정윤회씨가 주목되는 것은 그가 갖고 있는 남다른 이력 때문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처음 정치에 입문할 당시 비서실장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그입니다. 그런 정씨가 그 당시 자신과 함께 일했던 현직 청와대 비서관들을 통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이 최근 세상을 뒤흔든 기사의 요지입니다.

보도가 나온 후 청와대는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라고 일축하고 나섰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즉각적으로 “이런 근거 없는 일로 나라를 흔드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며 “조금만 확인해보며 금방 사실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을 관련자들에게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비선이니 숨은 실세가 있는 것같이 보도를 하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대통령의 이 말에는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쉽게 흘려버리기 어려운 대목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조금만 확인해보면’이라는 주문입니다. 기자의 취재 과정에서 팩트(사실) 확인은 물론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상 과제’와 같은 과정입니다. 이 과정을 빠뜨리면 기사 자체가 존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확인 과정도 없이 기사를 써서 의혹을 부추겨 문제라는 인식이 대통령의 말 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박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뇌리를 스친 것은 언론의 존재적 본질에 대한 의문입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해도 확인되지 않을 때 기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사건을 취재하고 확인할 때 대다수 사람은 발뺌부터 하기 바쁩니다. 하다못해 작은 기업의 말단도 그에게 해가 될 수도 있는 팩트를 디밀고 확인해달라고 하면 강한 부정으로 일관하기 일쑤입니다. 하물며 그들이 그럴진대 대외 접촉을 극도로 꺼리는 청와대 고위직들은 더더욱 넘기 어려운 벽입니다. 접근조차 안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최상층부라 할 수 있는 청와대에서 나온 문건을 믿지 않을 도리도 없습니다. 또, 박 대통령은 그 ‘조금만이라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서 그토록 빠르게 문건 내용을 근거 없는 사실이라고 단정 지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비위 사실이 발견되면 요즘 회자되고 있는 ‘찌라시’ 같은 정보를 앞세워 고발하는 일도 적지 않았습니다. 성종 때 소문을 바탕으로 자신의 직속상관인 대사헌 양성지를 탄핵한 사헌부 장령 김제신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이른바 ‘풍문탄핵’입니다. 있지도 않은 사실, 있지도 않은 문서를 있는 것처럼 속여 탄핵하거나 보도한다면 죄악이겠지만, 있는 문서를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언론은 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정윤회씨 관련 문건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검찰 조사에서든, 법정 공방에서든 언젠가는 가려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상적인 국가에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의혹이 왜 터져 나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청와대는 자신들의 관심사인 문서 유출 경위를 밝히는 데만 여념이 없지만, 국민들의 관심사는 다른 쪽에 있습니다. 그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국민들은 지금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