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16. 태종, 비선<秘線>에 놀아난 세자 쫓아내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4.12.11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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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공적 개념 없었던 양녕대군 폐위, 국가적으로 다행

모든 권력은 내부에 다툼이 있게 마련이다. 권력투쟁 자체를 나쁘게 볼 것은 아니다. 조직이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다툼은 필요하다. 바람직한 미래를 둘러싼 다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권력자의 총애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다툼이다. 특히 비선(秘線)과 공적 라인이 부딪치면 조직 자체가 망가진다. 조선 3대 왕 태종이 세자 이제(李?·양녕대군, 세종의 형)를 교체한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문제였다.

태종은 일찍이 세자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재위 2년(1402년) 세자 교육을 전담하는 경승부(敬承府)를 설치하고 엄격한 인물들을 사부로 삼았다. 재위 7년(1407년)에는 만 13세이던 세자를 숙빈 김씨와 혼인시키며 그 장인 김한로(金漢老)에게 “경은 멀리는 심효생(沈孝生·방석의 장인)을 본받지 말고 가까이는 민씨(원경왕후)를 경계하여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며 “나는 호랑이가 새끼를 키우는 것처럼 세자를 엄하게 키우려 한다”고 당부했다. 태종이 세자 교육을 호랑이 새끼 교육에 비유한 것은 훌륭한 자세였다.

양녕대군은 비선 조직의 잡배들과 어울리며 성색에 빠졌다. 그를 세자에서 폐위시킨 결정적 이유가 된 어리와의 불륜을 다룬 드라마 의 한 장면. ⓒ KBS 제공
양녕, 잘못 지적하는 스승 원수처럼 여겨

그러나 차기 임금 곁에 권력을 좇는 무리들이 몰리지 않을 리 없었다. 양녕대군이 이런 인물들을 받아들이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조선 초기 문신 성현(成俔)은 <용재총화(?齋叢話)>에서 “세자는 성색(聲色·노래와 여자)에 빠져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세자가 학업을 멀리하고 성색에 빠지면서 학업을 담당하는 공적 조직과 성색을 담당하는 비선 조직 간에 갈등 양상이 나타났다. 세자가 거느린 비선은 다양했다. 태종의 처남들인 민무구 형제를 옹호하다 사형당한 이무(李茂)의 인친(姻親) 구종수(具宗秀) 형제처럼 정치적 야심이 있는 인물들도 있었다. 또한 악공(樂工) 이오방(李五方)·박혁인(博奕人, 바둑·장기 명인)·방복생(方福生) 등 세자의 잡기 취향에 따른 인물도 있었고, 초궁장(楚宮粧)·승목단(勝牧丹) 같은 기생도 있었다. 이들은 세자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무엇이든 가져다 바쳤다.

그러나 태종이 심혈을 기울여 선발한 사부들, 즉 공적 조직은 달랐다. 그중에 유명했던 인물이 계성군(鷄城君) 이래(李來)였다. 그는 세자의 스승인 정2품 빈객(賓客)이었는데,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양녕에게 잘못이 있으면 이래가 여러 말로 지극하게 간하므로 양녕이 원수처럼 여겼다”고 말하고 있다. 성현은 또 “양녕이 어느 날 옆 사람에게 ‘계성군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다. 꿈에서라도 보이면 그날은 반드시 감기가 든다’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세자는 이래를 싫어한 만큼 비선 사람들을 좋아했다. 심지어 구종수 형제 등이 “저하께서는 길이 저희를 사반(私伴·사적 수하)으로 삼아주소서”하고 요청하자 허락의 증표로 옷까지 벗어주었다. 구종수 형제는 양녕이 즉위하면 세상이 자기 것이 되리라고 여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세자가 총애하던 기생 초궁장은 한때 상왕 정종과 관계했던 여인이었고, 양녕은 이를 알고서도 계속 쫓아다닐 정도로 자기 절제가 부족했다.

비선 인물들은 양녕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불법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다 발생한 일이 ‘유부녀 어리(於里) 납치’ 사건이었다. 어리는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이었는데, 조선의 사대부는 ‘1처(妻) 1첩(妾)’을 둘 수 있었으므로 어리는 엄연한 유부녀였다. 어리는 전라도 적성(積城·지금의 순창)현에 살다가 친족을 만나러 상경해서 곽선의 양자인 전 판관(判官) 이승(李昇)의 집에 머물렀다. 이오방으로부터 어리의 미모와 재예(才藝)가 뛰어나다는 말을 들은 양녕은 이승의 집으로 쳐들어가 어리를 세자궁으로 납치했다. 양부(養父)의 첩을 빼앗긴 이승이 고소하려 하자 양녕은 사람을 보내 “내가 한 일을 사헌부에 고할 것인가? 형조에 고할 것인가? 어느 곳에 고할 것인가?”라고 힐난했다. 권력의 공적 개념에 대한 이해 자체가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태종이 세자 교체를 결심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양녕이 공적 라인, 즉 사부들의 왕도 교육을 중시했다면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태종은 양녕을 쫓아내기 얼마 전인 재위 15년(1415년) 세자전(世子殿)에 잡인들이 들락거린다는 말을 듣고 이래와 변계량(卞季良) 등을 불러 “경들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을 꺼려 세자를 바른 길로 보도하지 못하는가”라고 꾸짖었다. 그러자 이래는 양녕에게 가서 “전하의 아들이 저하(邸下)뿐인 줄 아십니까?”(<태종실록> 15년 1월28일)라며 흐느꼈다. 양녕은 자신의 부친이 어떤 인물인지 몰랐지만 이래는 자신이 섬기는 국왕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권력에 대한 공적 개념이 부족했던 양녕이 쫓겨난 것은 개인적으로는 불행이었지만 국가적으로는 다행이었다.

공민왕도 비선 조직 ‘자제위’로 몰락 자초

고려의 개혁 군주였던 공민왕은 ‘자제위(子弟衛)’라는 일종의 비선 조직을 총애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자제위는 공민왕 21년(1372년) 10월에 설치한 것인데, <고려사>는 “나이 어린 미남을 뽑아 소속시키고, 대언(代言) 김흥경(金興慶)에게 총괄하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에서 편찬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자제위에 대해 극도의 부정적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부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가 세상을 떠난 후 자제력을 상실한 공민왕이 미소년을 뽑아 각종 황음을 저질렀고, 후사를 얻기 위해 이들에게 자신의 비빈(妃嬪)들을 강간케 했다는 식의 기술이었다. 그러나 이는 조선 개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과장이자 왜곡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이 <동사강목(東史綱目)> ‘고이(考異)’조에서 “공민왕의 성품이 비록 시기하고 강포하기는 했지만 총명하고 결단이 있었으니 한결같이 혼암하고 용렬하고 황음한 군주라고 할 수는 없다”면서 “자제위를 설치해서 궁위(宮?·비빈)를 난행하게 하였다는 등의 설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라고 비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공민왕이 자제위를 설치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공민왕은 재위 5년(1356년) 원나라 순제(順帝)의 제2황후였던 기황후의 오라비 기철(奇轍) 일당을 전격 주살(誅殺·죄를 물어 죽임)하고, 북방 강토 수복 운동을 전개해 원(元)나라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해체시키고 고려 강역으로 편입시켰다. 이때 원나라가 비록 쇠퇴기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대제국 원나라와 정면으로 맞선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더구나 고려 조정 내에는 친원(親元)  부역배들이 득실거리는 상황이었다. <고려사절요> 공민왕 19년(1370년) 8월조에 기철의 아들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가 ‘아버지 기철의 죽음에 원한을 품고 우리나라의 북쪽 변경을 쳐들어와서 원수를 갚으려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처럼 안팎에서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공민왕은 이런 정정에 불안감을 느끼고 공신과 고위직 자제들로 자제위를 설치해 일종의 국왕 경호 기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 ‘홍의초립(紅衣草笠)’조에서 “공민왕 때 자제위를 설치해 미모의 소년을 뽑아 분홍 옷과 검은 석의(?衣·검은 예복 겉옷)를 입고 가까이 모시면서 사역(使役)하게 했으니 이것이 오늘날 대전별감(大殿別監)의 시초다”라고 말했다. 대전별감이란 임금이나 세자가 행차할 때 호위하는 일을 한 관직을 말하니 그도 임금의 경호 조직으로 본 것이다.

고려 말 공민왕의 미소년 친위부대 자제위를 등장시킨 영화 의 한 장면. ⓒ 쇼박스㈜미디어플렉스
비선과 공식 조직 사이 전형적인 궁중 암투

그러나 공적 조직으로 창설한 자제위를 공민왕이 비선 조직처럼 관리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자제위는 항상 금중(禁中·궁궐)에 입직(入直)하느라 1년 내내 휴가를 얻지 못해 모두 왕에 대해 원망을 품었다”고 전하고 있다. 공민왕이 자제위 관리에 실패했고 그 결과 공민왕이 시해당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공민왕의 집권 전반기는 고려 전 시기에 걸쳐 가장 훌륭했다고 봐도 과장이 아닐 만큼 뛰어난 군주였는데, 후반기에 자제위 관리에 실패한 결과 그 자신도 불행하게 되고, 고려도 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종은 세자를 교체한 후 막내아들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신하들이 극구 말리자 “18년 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미 족하다”며 양위를 강행했다. 권력을 호랑이 등에 탄 것으로 여겼기에 태종은 자신과 집안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지난 정권부터 권력의 사유화가 크게 진행되면서 ‘사자방(4대강·자원외교·방위사업)’으로 대표되는 여러 문제가 불거지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시대착오적인 비선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청와대 전 공직기강비서관이 비선의 조종을 받는 문고리 권력을 견제하다 쫓겨났다는 식의 폭로까지 가세하면서 비선 조직과 공식 조직 사이에 벌어지는 전형적인 궁중 암투의 성격으로 드러나고 있다. 국가권력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는 천명(天命) 개념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안할 지경이다. 최소한 권력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권력의 공적 개념 정도는 갖고 운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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