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방’ 문건 사실 아니면 그것대로 큰 문제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4.12.1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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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청와대 점검·보고·지시 체계…이런 난맥 있을 수 없는 사태

박재윤 경제수석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지만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충격이 원체 큰 탓이었다.

1993년 8월12일, 청와대에서 벌어진 한 장면이다. 이날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가 열렸다. 긴급 소집이었기에 긴장감이 넘쳤다. 5개월여 전 국방부장관을 아침 일찍 청와대로 불러들인 뒤 당일 육군참모총장·기무사령관을 전격 해임하고, 이를 시발로 하나회 숙청을 단행한 김영삼(YS) 대통령이었기에 또 큰일을 벌일 게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 수석은 바쁘지도, 긴장하지도 않았다. 며칠 뒤의 8·15에 즈음한 대북 제안과 관련된 것이라는 귀띔이 있었고 그렇다면 박 수석의 업무와는 직접 관련이 없어서였다. 그랬는데…. 박 수석을 조용히 부른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의 입에서 ‘금융실명제’가 튀어나왔다. 아무리 ‘철통보안 속의 속전속결’이 YS의 특기라지만 ‘경제 쿠데타’를 감행하면서 경제참모를 따돌린 것이다. “미안하다. 미리 얘기를 못해…. 오늘 회의는 금융실명제 실시와 관련해 대통령 긴급 재정명령 발동을 위한 것이다.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어쩌겠나, 대통령의 엄명이니. 대통령께서도 당신에 대해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실명제에 부정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의 당시 회고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대한민국 권력기관의 총화다. 국정원·검찰·경찰·국세청·금감원·공정위 등 공안·감찰 기관의 엘리트 간부들이 파견 돼 나라 구석구석을 살핀다. 국정 농단·권력형 비리를 막기 위해 감시 대상에 대통령 친인척과 권력자 주변이 포함됨은 물론이다. ⓒ 시사저널 포토
YS는 집권 4개월 만인 1993년 6월 말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부장관을 불러, 금융실명제 극비 추진을 지시했다. 얘기가 새나가면 당신들 목부터 치겠다는 경고와 함께. 이런 대통령의 서슬에 이 부총리는 기획원 사람들을 완전히 따돌린 채 개인이 신임하는 한국개발연구원(KDI) 극소수를, 홍 장관은 금융팀 대신 세제팀(김용민 실장, 김진표 심의관)만 동원했다. 때문에 두 달 가까이 방대한 작업이 진행됐음에도 경제수석실은 까맣게 몰랐고, 국무총리도 어렴풋이 감만 잡았을 따름이다. 그간 박 수석은 시중에 금융실명제 관련 소문이 나돌았지만 ‘찌라시’라며 일축했었다. 자신이 주무 수석이었고,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는 판단 아래 전혀 손대지 않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권력 최상층부의 게임 논리는 이렇게 무섭다. YS 집권 초반을 총연출한 박 실장 자신도 비선 권력 현철을 피해 청와대를 떠났다. 

친인척 관련 등은 ‘찌라시’라도 치밀하게 체크

사실 정보지라는 이름으로 증권가 등에 나도는 찌라시 내용 중에는 ‘정보’는 고사하고 ‘카더라’ 수준이 대다수다. ‘95%’ 정도는 헛소문이다. 하지만 금싸라기 같은 귀한 정보가 이따금 끼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92년 9월의 ‘노태우 대통령 민자당 탈당’도 대표적 사례다. 오늘날에는 거의 관례화된 대통령의 집권 말기 집권당 탈당이지만 당시는 정치판을 뒤흔드는 혁명적 사태였다. 후계 문제로 갈등을 빚던 청와대와 YS 관계는 제2 이동통신 사업권이 노 대통령의 사돈인 최종현 SK 회장에게 넘어가는 단계에서 최고조에 이르렀고, 찌라시에도 유사 정보가 담겼다. 당시 청와대는 중앙일보의 ‘대통령 탈당’ 보도에도 부인으로 일관하다 이틀 뒤에야 탈당을 공식 발표했다. 파다한 소문은 나름의 근거가 있던 것이다. 근자에 철퇴를 맞은 H·L 재벌들을 역추적하면 몇 달 전 찌라시에 그 단초가 일부 실려 있다.

이런 연유로 전부를 쓰레기로 간주해 몽땅 내치기가 망설여지는 게 찌라시다. 때문에 각급 정보기관들은 허접한 것들까지도 추적·검증하는 수고를 들이게 마련이다. 그리고 1단계 ‘정제’ 과정을 거친 ‘정보’들이 청와대 민정팀에서 취합된다. 물론 민정에 파견된 국정원·검찰·경찰·국세청·금융감독원 요원(행정관)들이 찌라시의 소문을 직접 챙기기도 하지만 직접 나서는 것은 대개 대통령 친인척이나 권력 핵심 주변 관련들이다. 또 통치권 비자금 등 ‘주요 정보’는 추적·조사가 아닌 외부의 시선 차단 쪽으로 노력이 경주된다.

이처럼 엄중한 청와대인데 ‘정윤회와 3인방’ 소동과 관련한 김기춘 비서실장 등 청와대 측 행보는 많은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청와대의 입인 대변인이라는 사람은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핵심 비서관들이 외부인과 결탁해, 비서실의 최고 어른인 비서실장을 음해했다는 사실 관련을, 공직기강비서관이 민정 조직을 통해 종합 정리한 공식 문건을, 비서실장이 알지 못한다고 했다가, 구두로 보고받았다고 했다가, 서면 보고를 받았다고 수차례 말을 바꾸었다. 이마저도 스스로가 아니라 공직기강비서관의 증언이 나오자 차례로 번복했다. 국민을 우롱했든지 위증을 한 셈이다. 대통령이 문화체육부 국장·과장 인사에 간여했다는 부분도 그렇다. 당시의 유진룡 장관이 정면으로 반박하자 “각 부처 인사는 장관이 하는 것”이라는 얄궂은 변명으로 얼버무렸다.

박 대통령의 비서관, 장관 출신의 증언으로 더 이상 따질 필요가 없게 됐으나 기실 이들의 증언이 없더라도 청와대의 보고·지시 경로와 의사 결정 행태를 아는 사람들에게 저간의 해명 아닌 해명은 코웃음거리일 뿐이다. 예전만은 못한 오늘의 청와대라지만 권력의 중추로서 청와대 위상은 대단하다. 국정 요로에 그 입김이 직접적으로 닿기에 거의 모든 결정과 주요 보고·지시는 문서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비서실장과 ‘3인방’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핵심 비서관, VIP 측근(정윤회)이 등장하는 정보를 구두로 받았느니 어쩌니 하니 국민이 믿을까 싶다. 구두로만 받았고 찌라시 수준이어서 묵살했다는 변명은 되레 구차하다. 그러면서 언론의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는커녕 곁가지 하자를 꼬집어 소송이나 벌이려는 대처는 딱하다. 빤한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려 드니 박근혜 대통령이 나라를 위해 고뇌하는 순수함과 진정성까지 훼손시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친인척의 발호로 국정 난맥이 우심했던 헌정사를 반면교사 삼아 하나뿐인 남동생과의 만남마저 자제한다는 토로마저 허공에 흩어지게 만든다.

자성 없이 ‘3인방’ 음해 기도로 몰아가면 불행

국민을 예전의 우매한 군중쯤으로 여기면 큰 착각이다. 숱한 총리·장관 후보자들의 무더기 낙마 사태, 벌써 세 번째가 된 잦은 민정수석 교체, 국정원 기조실장 경질 해프닝, 기무사령관 등의 돌연 경질, 그 반대로 주요 직위 인선의 지연 등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대충 짐작한다. 대통령이 나라의 가장 내밀한 구석까지 살피는 기회인 국정원장·기무사령관 등의 정례보고가 왜 사라졌고, 그 부정적 산물이 어떤 것인지를 예리하게 평가하는 국민들이다. ‘3인방’ ‘십상시’가 정부 인사를 주무르고 국정을 농단한다고 걱정하는 사람이 상당수다. 대통령은 이들이 충실한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감싸는데, 실제와 달리 많은 국민이 오해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큰 문제다. 야당의 반정부 선동이 먹혀드는 즈음도 아닌 마당에 국민 다수가 실상과 달리 현실을 진단하고 비판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면 여간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국가가 심각한 동맥경화를 넘어 반신마비의 중증을 앓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40%대 이하로 떨어진 것은 간단한 게 아니다.

‘정윤회와 3인방’에 대한 검찰 수사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박관천 경정이 민정비서실 행정관 시절 작성한 3인방 관련 문건에 적시한 십상시 모임은 허위이고, 결국 헛소문에 나라가 잠시 시끄러웠다는 식으로 적당히 눙칠 기세다. 국민이 ‘대통령의 충직한 시종들을 질시한 패거리들이 헛소문을 끌어모아 음해 차원에서 언론에 문건을 유출했다’는 형태의 발표에 공감할지 의문이다. 이런 문건들이 현 청와대의 핵심 비서관이 공식 작성해 윗선에 보고한 공문서이고, 여타 소문들을 증언한 이가 현 정부의 장관이라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면 국가적 비극이다.

심각한 안보 상황, 경제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 청와대도 그런 국민의 자발적 지원과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성심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국정 난맥에 대한 진솔한 고백과 처절한 개선·개혁 추진이다. 거짓은 난맥과 불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옭아맬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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