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올해의 인물] “수시로 시간 멈추는 곳… 눈에 밟혀 차마 못 떠나”
  • 전남 진도=이규대 기자 (bluesy@sisapress.com)
  • 승인 2014.12.25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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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자원봉사자

시사저널은 매년 12월 송년호를 통해 ‘올해의 인물’을 발표한다. 본지 편집국 기자들의 내부 추천과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한 독자 온라인 투표 결과를 토대로 후보자를 2~3명으로 압축한 후 내부 토론 과정을 거쳐 최종 선정한다. 각 분야별로 여러 후보들이 치열한 경합을 벌이게 되는데, 2014년 ‘올해의 인물’ 부문만큼은 일찌감치 ‘세월호’로 균형추가 기울었다. 그중에서도 희생자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 세월호 자원봉사자들에게 관심이 쏠렸다. 주로 특정 인물이 선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임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광복 이후 최악의 민간 참사’가 대한민국 사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뜻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지금 이 시점에 묻는다. ‘2014 올해의 인물’ 세월호는 과연 무엇의 이름이었나.

 

너무나 많은 것의 이름이었다. 충격과 혼란, 탐욕과 무능, 거짓, 기만, 무책임. 애간장을 저미는 고통,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슬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 그래서 세상을 찢어놓을 듯 터져 나왔던, 이제는 돌아오지 못할 자들을 향한 고통스러운 절규. 그 모든 것의 이름 ‘세월호’는 2014년을 4월16일 이전과 이후로 쪼개버렸다. 개인과 선사의 탐욕 속에 476명의 탑승자를 태운 배가 침몰했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이들 중 단 한 명도 구조해내지 못했다. 세월호는 그렇게 고통과 눈물의 이름이 됐다. 국민들의 뇌리에서 쉽사리 떨쳐내기 힘든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이후가 비극과 절망으로만 채워지지는 않았다. 국민들은 비탄에 젖으면서도 희생자 가족의 아픔을 위로하려 애썼다. 성금을 모으고, 편지를 전하고, 생업을 제쳐놓고 진도를 찾아 자원봉사에 나서기도 했다. 그래서 세월호는 공감, 연민, 상호 부조와 연대의 이름이기도 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아파하는 마음.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다른 국민의 고통을 감싸 안으려는 이타적인 행동. 생존자 귀환을 염원하며 그토록 간절하게 전국을 뒤덮었던 노란 리본의 물결.

시사저널은 2014년 ‘올해의 인물’로 세월호를 선정하면서 헌신과 희생의 가치를 세월호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붙잡아준 이들에 주목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린 올해, 세월호를 고통과 눈물의 이름에서 희망과 치유의 이름으로 반전시키기 위한 실마리가 바로 이들에게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취재진은 12월18일 진도 팽목항으로 향했다. 여전히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희생자 가족들 곁을 묵묵히 지키는 그들을 만났다. 그들이 경험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해 듣고, 그런 상황 속에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행동하도록 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과연 누가 이 참사를 외면할 수 있겠나”

“정신없이 팽목항으로 달려와서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주저앉아 있을 때였다. 어떤 분이 내게 다가와 커피를 건넸다. 그때 그 커피 한 모금의 따뜻함을, 고마움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희생자 가족 중에는 참사 발생 직후부터 헌신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섰던 한 목회자에 대한 고마움을 말하는 이가 많다. 팽목교회 김성욱 목사(51)다.

김 목사는 그날의 시작을 “제주로 가던 배가 침몰했다”는 전화 한 통으로 기억한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왜 배가 침몰하나 싶었다. 교회를 나와 도보로 수 분 거리에 있는 팽목항에 가보니 취재기자들이 보였다. 뭔가 일이 있구나 생각했지만 곧 ‘전원 구조’라는 보도를 접하고 안도했다. 오래가지 않았다. 해당 보도는 오보로 판명됐고, 그때부터 김 목사의 일상은 참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전남 진도군 임회면 팽목교회에서 만난 김성욱 목사. ⓒ 시사저널 구윤성
김 목사가 소속된 진도군교회연합회는 사고 직후인 4월17일부터 재난 지원 부스를 차렸다. 각종 재난 지원 활동 경험이 있는 조현삼 서울광염교회 목사가 급히 달려왔고, 조 목사가 이끄는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과 진도군교회연합회가 함께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김 목사는 이런 대형 재난을 눈앞에서 경험한 것이 처음이었다. 재난 지역을 자주 다녔던 조 목사의 조언을 바탕으로, 참사 직후 희생자 가족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를 우선 파악했다. 먹고 마실 것은 물론, 사고 소식을 접하고 경황없이 내려온 이들에게 특히 필요한 속옷 및 외투를 급히 조달해 나눠주었다. 서로의 소지품이 섞이지 않도록 플라스틱 보관함도 제공했다.

김 목사는 쏟아지는 구호 물품들을 빠르게 해체·분류해 희생자 가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부분 부스에서 구호물품을 받아 내려놓기에만 급급한 상황이었다. 전반적으로 해체 및 분류가 더딘 상황에서,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부터 우선 공급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실제로 팽목항에서 만난 한 희생자 가족은 “커피·생필품·속옷·간식거리 등 가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잘 이해하고 먼저 제공해주시는 분이었다. 지난 10월 자금 및 인력의 한계로 공식적인 지원 활동을 그만두게 됐을 때, 눈물로 미안함을 호소하는 모습이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며 김 목사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다.

김 목사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은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사고 직후 지원 부스는 24시간 동안 가동돼야 했다. 최소 필요 인력 10여 명이 밤낮없이 대여섯 번씩 교대해야 했다. 특히 지원 물품을 관리·보급하는 중책을 맡았던 김 목사는 단 하루도 쉴 수가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휴식 없이 일하는 날들이 반복됐다. “체력이 고갈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쉴 수가 없었다. 도저히 버틸 수 없을 때는 영양제를 맞으며 일을 했다.”

그럼에도 김 목사에게는 육체적인 고통이 그리 큰일이 아니었다. “몸 힘든 거야 지나가면 금방 괜찮아진다”는 김 목사를 괴롭힌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안타까운 희생’이 발생했을 때를 꼽았다. “진도군교회연합회 회장이었던 문명수 목사(향년 52세)가 지난 10월 세상을 떠났다. 24시간 동안 풀가동되는 팽목항, 진도체육관 부스 2개를 오가며 불철주야 일했던 분이다. 성격이 꼼꼼하고 맡은 일에 책임감이 강한 분이었던 만큼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결국 과로로 쓰러졌다. 조기축구회 공격수로 활동할 정도로 체력이 좋았던 분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나. 지난 6월 상태가 조금 호전됐을 때 계속 쉬었어야 했는데, 무리하게 일어나 일을 하다 일주일도 못 가 다시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고통과 슬픔을 못 이겨 울부짖는 희생자 가족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것 역시 김 목사에게는 괴로운 일이었다. “인터뷰를 할 때마다 정말 힘들다. 그 순간 그 광경들을 다시 기억하고 떠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참사 직후 가족들은 내 자식이 어서 구조되기만을 바랐다. 하나둘씩 시신이 발견되기 시작하자 제발 내 자식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생환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이후에는, 시신이 발견되면 제발 내 자식이길 바라게 됐다. 그 모든 과정을 김 목사는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발견된 희생자의 숫자가 60번째를 넘어섰을 무렵인가, 한 희생자 가족이 기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자녀의 시신을 찾았다는 것이다. 자식을 잃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기쁠 수 있을까. 계속 내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얼마나 애가 달았으면 그렇겠나. 차마 말을 잇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아플 때가 많았다.” 김 목사는 인터뷰 도중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움직이게 한 것일까. 극한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에도 참사 현장을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의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상황이 그렇게 되다 보니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떻게 안 할 수가 있나. 당장 우리 지역에서 발생한 일인데 누가 외면할 수 있겠나.” 그는 자신이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수많은 이의 관심과 지원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금전과 물품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하고 싶어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현장에서 직접 봉사하는 것밖에 없었기에 최선을 다했다.” 지난 10월 부스를 해체한 이후에도 김 목사는 팽목항에 남은 가족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자원봉사자 백순혁씨가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빨래를 하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지금 도망가면 대한민국 버리는 것 같았다”

“당장 눈앞에서 벌어진 참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팽목항 바로 근처에 거주하는 김 목사가 내놓은 대답은 이랬다. 그렇다면 참사 당시 팽목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이들의 경우는 어떨까. 지난 7월부터 현재까지 팽목항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백순혁씨(34)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광주광역시의 한 인테리어업체에서 일하던 백씨는 4월16일 일터에 있었다. 그 역시 ‘전원 구조’ 소식에 안도했고, 곧 이것이 오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뉴스로 진도 현장의 소식을 접할수록 가슴속엔 알 수 없는 죄책감이 쌓여갔다. 장마가 시작되던 7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백씨는 ‘사흘 정도만 봉사하고 오자’는 마음으로 팽목항에 도착했다. 그것이 지금껏 반 년 넘게 이어지는 장기 봉사활동의 시작이었다. ‘조금만 더’를 반복하다 계절이 두 번 바뀌었다. 백씨는 “처음부터 길게 하려고 마음먹고 오는 분은 거의 없다. 와보니 현실이 너무 눈에 밟히고, 당장 할 일이 있는데 사람이 없으니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현재 팽목항에 남은 자원봉사자 수는 10명 남짓이다. 백씨처럼 참사 이후 몇 달간 장기 봉사를 해온 이도 있고 짧게는 한두 달 정도 된 이들도 있다. 팽목항에 머무르는 실종자 가족 및 이곳을 찾는 희생자 가족들을 위해 식당 운영, 세탁, 청소 등을 돕고 있다. “희생자 가족들이 혈육을 찾는 데만 전념하게 해주고 싶다”는 것이 처음 그의 각오였다. 묵묵히 봉사하다 보면 곧 모든 실종자가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길어질 줄 몰랐다. 이미 수색이 중단되고 세월호 인양 여부 역시 불투명한 상황에서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며 곁에 있는 것이 힘이 될 것 같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팽목항은 “수시로 시간이 멈추는 곳”이었다. 실종자 수색을 해야 돌아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기상 여건 등을 이유로 바지선이 항구로 돌아올 때 팽목항의 시계는 덜컥덜컥 멈췄다. 수색이 멈추는 순간 가족들도 봉사자들도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실종자 가족들은 수색을 하지 않으면 거의 넋이 나갈 정도로 힘들어 한다. 이제 아예 수색이 종료되다 보니, 힘든 기다림을 견디지 못해 떠난 실종자 가족도 있다. 그런 모습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다.”

백씨처럼 오랜 기간 생업을 제쳐두고 자원봉사에 뛰어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초 사흘을 생각하고 팽목항을 찾았던 그가 지금까지 봉사를 이어가고 있는 이유를 물었다.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자원봉사자들을 향해 쏟아지는 ‘돈이나 다른 것을 기대하고 저런다’는 시선을 느낄 때 특히 그랬다. 그럴 때면 오히려 희생자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부인해주셨다. 우리를 ‘또 다른 가족’처럼 대해주는 희생자 가족들에게서 많은 것을 느꼈다. 주변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고 걱정도 한다. 하지만 내겐 지금의 시간이 참 값지고 소중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경험, 서로 의지하는 경험을 어디서 해보겠나 싶다.” 세탁물을 개던 백씨는 잠시 숨을 고르다 말을 이어갔다. “세월호를 두고 대한민국 축소판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나. 봉사를 하던 중 눈앞의 현실을 견디기 힘들어 그냥 도망가고 싶었던 적도 솔직히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도망가면 영영 후회할 것 같았다. 대한민국을 버리고 가는 느낌일 것만 같았다.”

안산온마음센터 활동가들이 희생자 가족들의 점심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내 구명조끼 입어’ 우리에게 건넨 마지막 기회”

소설가 박민규씨는 지난 8월 발표한 산문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이렇게 적었다. “기울어가는 그 배에서 심지어 아이들은 이런 말을 했다. 내 구명조끼 입어.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누구도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는 기울어진 배에서. 그랬다. 나는 그 말이 숨져간 아이들이 우리에게 건네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다.” 배가 가라앉는 상황에서 ‘내 구명조끼’를 건네는 것은, 내 안전만큼이나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안전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 가능한 일이다. 배 안의 아이들이 보여준 연대의식은 수많은 시민들을 감동시켰다. 참사의 현장에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활동한 자원봉사자들의 마음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세월호에는 이들이 있었다. 여동생에게 구명조끼를 입혀 탈출시키고 실종된 남자아이가 있었다.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벗어주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려다 사망한 학생이 있었다.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선생님도, 끝까지 승객의 탈출을 돕다 배 밖으로 나가지 못한 선원도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진 참극을 외면하지 못해, 가슴을 죄어오는 부채감을 어쩌지 못해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수많은 국민이 있었다. 이들의 존재야말로 세월호가 희망과 치유의 이름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2014년 ‘올해의 인물’ 세월호가 일깨우는 엄중한 교훈이다. 


지난 11월 범정부사고대책본부가 해체된 시점까지를 기준으로 6900여 개 단체, 5만여 명의 자원봉사자가 진도를 찾았다. 광주광역시에서 인테리어업체를 운영하던 백순혁씨(34)처럼  ‘사흘만 봉사하고 오자’고 시작했다가 아예 생업을 제쳐두고 몇 달간 장기 봉사에 매진하게 된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1박 2일, 2박 3일 등 어렵게 시간을 쪼개 머물렀던 사람이 더 많다. 이들 역시 백씨처럼 막연한 죄책감 및 부채감, 고통을 겪는 희생자 가족에 대한 연대의식에 의해 봉사활동에 나서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팽목항 가족식당에서 만난 안산온마음센터 활동가 김계순씨의 말이다. 안산온마음센터에서는 2명씩 1박 2일 일정으로 팽목항 순환봉사를 진행하고 있다. “양면의 감정이 든다. (팽목항에) 오면 가족들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프면서도, 안산에 있으면 그것대로 불편한 마음이 있다. 팽목항에 오는 것으로 마음의 부채감을 조금 덜지만 그만큼 또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팽목항에 머물렀던 가족들은 자원봉사자들로부터 큰 위로를 얻었다고 말한다. 희생자 고(故) 진윤희양의 삼촌인 김성훈씨는 “정말 감사하다. 희생자 가족들은 또 다른 가족으로 여긴다. 친인척도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맙다는 감정을 자원봉사자들에게 갖고 있다. 일부 희생자 어머니들을 중심으로 ‘국민들로부터 받았던 고마움을 언젠가 되돌려주고 싶다’는 말도 나온다”고 전했다. 참사 이후 세월호 가족대책위 팽목 담당 총무를 맡아 줄곧 팽목항에 머물러 온 김씨는 “이제는 팽목항이 세월호 참사의 교훈, 나아가 희망을 이야기하는 곳이 되길 바란다. 국민들의 뜻을 함께 모아 치유·상생의 공간으로 꾸며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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