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8. 5·16으로 박정희 가문과 애증 싹터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4.12.25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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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재계·법조계·언론계에 뻗어 있는 김무성 대표 일가의 화려한 혼맥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현재 여권 인사들 가운데 차기 대통령 후보 지지도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유력 정치인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밑에서 정치를 시작한 상도동계 출신인 그는 ‘친(親)박근혜계’와 ‘비(非)박근혜계’를 넘어 ‘MS(김무성)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는다. 박근혜 대통령과 끊임없이 애증 관계를 이어온 두 사람 집안은 정치권에서도  대표적인 가벌을 형성하고 있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선보이겠다는 야심 찬 도전의 성공 여부가 그의 대권 가능성을 결정지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부친 김용주, 장면 정권 때 여당 원내총무

김무성 대표의 아버지는 김용주다. 1905년 경남 함양군 함양면 신관리에서 태어났다. 전남방직 창업자인 그는 부산상고를 졸업했고, 대한통운과 대한해운공사를 설립해 초대 사장을 지냈으며, 주일대표부 특명전권공사를 역임했다. 젊은 시절에는 포항영흥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다. 청년 시절 처음 사업에 손댄 것이 해운과 어업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해촌(海村)’이라는 아호를 지었다. 그는 23세 때 경북 포항에서 삼일(3·1)상회를 설립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성공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해 1960년 장면 정권에서 집권당인 민주당 원내총무(현 원내대표)를 지내다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5·16 쿠데타로 의원 직을 잃었다. 김 대표와 박 대통령 집안의 미묘한 인연은 여기서 비롯된다. 김용주는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대한방직협회 회장, 한국경영자총협회 초대 회장, 동해제강 회장 등을 지냈다. 1985년 미국 출장 중 하와이에서 숨졌다. 무궁화대훈장·동탑산업훈장·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집권 여당 원내총무를 지낸 경우는 김용주-김무성(2010년 한나라당 원내대표) 부자가 처음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지낸 것도 김용주(1970년 초대 회장)-김창성(김 대표의 형, 1997년 3대 회장) 부자가 유일하다.

김용주는 회고록 <풍설시대 80년>에서 주일공사로 있을 때인 한국전쟁 시절 미군의 폭격을 받을 뻔했던 서울의 궁궐과 남대문·동대문 등 주요 유적들을 보존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도쿄에 있던 미군사령부로 맥아더 장군을 찾아가 5대 궁궐과 4대문을 포함하는 지역을 작전지도에 표시하면서 폭격 대상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에 맥아더는 “좋은 조언을 해줘 대단히 기쁘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오늘날 5대 궁궐이 남아 있게 된 것과 관련해 미군 포병 관측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인민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덕수궁을 포격하지 않았던 제임스 해밀턴 딜과 함께 김용주를 기억할 만하다. 김용주는 강신팔과의 사이에 4남 1녀를 뒀다. 이 가운데 알려진 인물은 장녀 김문희, 장남 김창성, 삼남 김무성 등이다.

정주영의 적극적 권유로 현대가와 사돈

김무성의 누나인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은 현영원 신한해운 회장과 결혼해 딸 넷을 뒀다. 현영원은 광주서중(광주제일고 전신)과 서울대 영문학과를 나와 대한제철 대표, 신한해운 대표, 한국선주협회 회장, 용문학원 이사장, 현대상선 회장 등을 지냈다. 1960년 당시 자금 사정이 어렵던 현대건설에 대한제철이 철근을 독점 공급하면서 정주영 명예회장과 인연을 맺었다. 정주영이 조선소 건설을 위해 울산을 방문한 자리에 동행해 해외 선주들의 수주를 유도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이런 인연은 현영원의 둘째 딸 현정은과 정주영의 5남 정몽헌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정주영은 1975년 1월 울산에서 열린 현대중공업 선박 명명식에 아버지를 따라온 현정은을 보고 며느리로 삼을 생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얼마 뒤 정주영 쪽에서 “군대 간 아들이 휴가 나왔는데 한번 만나보면 어떻겠느냐”고 연락을 해왔다. 1975년 6월께였다. 정몽헌-현정은은 이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현정은은 언젠가 “군인이라 머리가 짧았는데, 인상은 좀 별로였다. 태릉사격장에 가서 총 쏘는 법을 가르쳐줬는데 사람이 듬직해 보였다”고 정몽헌의 첫인상에 대해 밝힌 바 있다. 정주영은 정몽헌이 데이트를 한 날이면 “오늘은 청혼을 했느냐?”고 물을 정도로 현정은을 마음에 들어 했다. 두 사람은 사귄 지 1년여가 지난 이듬해 7월 현정은이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직후 결혼했다. 현정은은 결혼 후 첫딸을 낳고 정몽헌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올라 페어리 디킨슨 대학원에서 인간개발론을 전공했다.

현영원의 부친은 일제 강점기 때 호남은행을 설립해 운영하다 6·25 때 공산군에 의해 피살된 호남의 갑부 현준호다. 현준호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부친 현기봉과 함께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 있다. 현준호는 현기봉의 둘째 아들인데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나와 1919년 호남은행 설립 발기인 대표를 맡았다. 이듬해 전무를 맡았고 1925년 호남은행장이 되었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때 두 살 아래였던 김성수와 일본 유학 시절 알고 지낸 인연으로 주주로 참여해 감사역을 맡았다. 보성전문(고려대학교 전신) 개교 때도 돈을 내 감사역을 맡았다. 호남은행장 시절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전라남도 도평의원 등을 지낸 경력 때문에 1948년 반민특위에 반민족행위자의 한 사람으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6·25 때 인민군에 의해 광주형무소에 갇힌 뒤 사살당했다.

현준호가 호남은행을 설립해 경영할 때 부사장을 지낸 사람이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외조부인 김신석(1896~1958년)이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법무부장관을 지낸 김두희와 법무부 차관을 지낸 김상희는 김신석의 5촌 조카다.

김무성 장인 최치환도 5선 의원 출신

현정은의 언니 현일선은 유특한 유유산업 창업주의 아들인 유승지 홈텍스타일코리아 회장과 결혼했다. 유승필 유유산업 회장의 친동생이다. 유특한의 형은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다. 동생은 현승혜, 현지선이다. 현승혜는 12~13대 국회의원을 지낸 지연태의 장남 지덕현 덴츠이노벡 대표와 혼인했다.

현정은은 남편의 숙부인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가문과 겹사돈을 맺고 있다. 어머니인 김문희가 정세영의 사돈인 김석성 전 전방 회장과 사촌관계이기 때문이다. 김석성의 장남 김종엽은 정세영의 둘째 딸 정유경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무성의 큰형은 한국경영자총협회장을 지낸 김창성이다. 2003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불법 대선 자금 의혹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을 피하기 위해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차렸다. 이후 서울 염창동에 당사를 마련해 들어갔는데 ‘염창동 당사’ 건물주가 (주)전방이었다. 김창성은 부친의 가업을 이어 (주)전방 회장을 지냈고,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는 오위영의 딸 오덕주와 결혼했는데, 오위영은 장면 정권의 실력자였다. 그는 1950년 울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한 후 자유당 중앙상임위원장을 지냈으나 이후 민주당으로 옮겼다. 민주당 내에서 장면계인 ‘신파’의 실력자로 자리 잡았다. 장면 초대 내각에서 국무원 사무처장을 맡았고, 그 연장선상에서 1961년 무임소장관이 되었다.

김 대표의 둘째 형인 김한성의 장인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검찰총장과 전두환 대통령 시절 법무부장관을 지낸 오탁근이다. 오탁근은 아들 태환·장환, 딸 정혜·상혜·숙혜·성혜 등 2남 4녀를 뒀다. 오탁근의 매형은 재무부장관을 지낸 천병규다.

중동고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온 김무성 대표는 최양옥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와 결혼했다. 당시 중매를 섰던 사람은 김 대표의 큰형 김창성과 경기고 동기였던 이재설 전 체신부장관이었다. 이재설은 체신부 예산을 100% 증액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포항공장에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김무성은 영화를 좋아해 데이트를 할 때마다 영화를 두 편씩 보곤 했다. “모처럼 만나면 이야기도 하고 싶었는데 만나면 영화만 보니 그런 점이 싫었다”는 것이 최양옥의 회고다. 어쨌거나 4~5번의 만남(?) 끝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김 대표의 장인은 국회의원을 지낸 최치환이다. 경남 남해 출신인 그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를 졸업하고 서울시 경찰국장, 대통령 비서관을 지낸 뒤 이승만 정부 막판에 공보실장(문화공보부장관)을 지냈다. 5·16 직전 고향 남해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5·16 이후 조선일보 상담역으로 언론계와 관계를 맺은 뒤 경향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5~7대, 10, 12대 국회의원을 지낸 5선 의원이고 대한축구협회 회장, 삼성그룹 고문, 경기고 총동창회장을 지냈다. 최치환은 송효숙과의 사이에 성배·양일·양미·양옥·양오·순호 등 3남 3녀를 뒀다. 최양옥은 위로 오빠 둘과 언니 한 명,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 각각 한 명이 있다.

5·16 이후 정치적 시련을 겪었던 부친 김용주는 김 대표에게 “정치는 우리 집안사람의 성격과 맞지 않으니 절대 하지 말라”는 유지를 내렸다. 그러나 김 대표가 부친의 뜻과 달리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 데는 어린 시절 부친에게 받은 영향이 컸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민주당 참의원 선거에 출마한 부친을 따라 선거 유세를 다녔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트럭 위에 올라타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밤새도록 접은 전단 나눠주면서 박수치고, 연호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고 측근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위 사진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아래 사진 왼쪽은 김무성 대표의 부친 김용주 전 의원, 오른쪽은 장인 최치환 전 의원. ⓒ 시사저널 임준선·연합뉴스
배우 아들 위해 경상도 쌍욕 가르치기도

1976년 동해제강 상무, 1982년 삼동산업 대표 등 기업인의 길을 걷던 김 대표는 1983년 민추협 창립, 1985년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87년 통일민주당 총무국장을 지냈고 3당 합당 이후 민자당 의원국장을 지낸 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 민정·사정비서관과 내무부 차관을 지냈다. 2004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시절 사무총장을 맡아 인연을 맺으면서 ‘친박 좌장’으로 불렸다. 이 때문에 2008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했다. 이후 독자적인 세종시 수정안 기자회견을 함으로써 박근혜 전 대표와 멀어졌다. 그러나 2012년 총선에서 또다시 낙천이 예상되자 백의종군을 택해 낙천자들의 탈당 행렬 가능성을 차단했다. 그해 12월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 캠프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대선 승리를 이끌었다. 지난해 4월 보궐 선거를 통해 등원한 후 지난 7월 새누리당 대표가 됐다.

김 대표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큰딸 김현진의 결혼식을 2011년 주위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치렀다. 주례는 김수한 전 국회의장이 맡았다. 김현진은 유학을 다녀와서 지인의 소개로 현재의 남편인 박제완을 만났는데 소개팅 자리에 나온 남편은 얼굴만 알고 있던 대학 동기였다. 당시 두 사람은 부산과 서울에서 각각 생활하고 있을 때여서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만남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신뢰를 쌓게 돼 결혼으로 이어졌다. 둘째 딸 김현경은 현재 수원대 교수로 있다. 특채 의혹이 제기됐으나 검찰은 지난 11월 혐의 없음 처분을 내렸다.

김 대표의 아들 김종민은 고윤이라는 예명으로 연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아들이 대학 1학년 때 “정치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김 대표는 극구 반대했다. 방황하던 아들은 군대를 다녀와서 “이번만큼은 반대하지 말아달라”며 “배우를 꼭 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강하게 설득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말을 듣지 않아 “아버지는 너 도와줄 수 없으니 혼자 힘으로 해라. 아버지 아들인 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다”고 말하고 어렵게 허락했다. 하루는 아들이 오디션을 보기 위해 영화 <친구2> 대본을 가지고 와서 김 대표에게 부산 사투리를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대본을 보니 온통 욕투성이였다. 김 대표는 밤늦게까지 아들을 앉혀놓고 쌍욕을 가르쳤는데, 나중에는 “그래도 내가 네 아버지인데 이건 못하겠다”고 말하고 그만뒀다. 아들 고윤은 결국 <친구2> 오디션에 떨어졌다. 고윤은 인기 드라마 <아이리스2> 등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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