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살리자” 대통령 한마디에 무뎌진 칼
  • 이승욱 기자 (gun@sisapress.com)
  • 승인 2015.01.0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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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대기업 수사, 박근혜정부 코드 맞춰 오락가락

박근혜정부 집권 첫해인 2013년은 재벌 일가에게는 살얼음을 걷는 한 해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표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 광풍에 언제 휩쓸리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재계 전반에 감돌았다. 박 대통령은 2012년 9월,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재벌과 분명한 각을 세웠다. 박 대통령은 당시 “영향력이 큰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과감하고 단호하게 개입하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했다. 일관된 ‘친기업 정책’으로 서민들의 반감을 자초했던 이명박 정권과 차별화된 행보를 통해 표심(票心)을 얻겠다는 전략이었다. 야당보다 앞서 경제민주화 의제를 선점한 박 대통령은, 집권 후 ‘대기업 길들이기’를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됐다.

실제 박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잠시 대기업을 향해 정권 차원의 사정 바람이 불었다. 연일 “대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방안 등 경제민주화 정책을 구체화시키는 듯 보였다. 박근혜정부의 ‘경제민주화 드라이브’는 정책과 제도, 여기에 사정기관까지 총동원됐다. 맨 앞자리에 검찰이 있었다. 박근혜정부 1기 검찰의 ‘채동욱 체제’는 경제민주화를 명분 삼아 대기업을 향해 매서운 칼을 휘둘렀다.

2013년 5월21일 검찰이 해외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은 CJ그룹에 대해 압수수색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진태 체제 출범 후 힘 빠진 대기업 수사

특수통인 채동욱 전 총장의 검찰이 보여준 대기업 수사는 특수수사의 백미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13년 CJ그룹 비자금 수사는 검찰 특수수사의 전형이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이 조세피난처인 버진아일랜드에 세운 페이퍼컴퍼니가 단초가 된 비자금 수사는 이미 한 차례 논란이 일다가 일단락됐던 2008년 CJ 비자금 사건으로 옮겨가며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당시 검찰은 ‘경제 검찰’이라는 국세청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2008년 CJ 비자금 수사 자료까지 손에 쥐었다. 비자금 수사로 CJ그룹 오너를 굴복시킨 검찰은 이후 효성그룹·동양그룹 등 여러 재벌로 전선을 넓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대기업들은 자발적으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축소 등을 추진하며 한껏 몸을 낮췄다.

하지만 재벌들의 부패 구조를 파헤치겠다는 검찰의 의지는 얼마 가지 않아 꺾였다. 그 수사는 검찰의 뜻이 아닌 정치권력의 주문 생산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기업 수사를 진두지휘한 채동욱 전 총장이 ‘혼외자 논란’ 속에 불명예 퇴진하고, 지난해 박 대통령이 신년사를 통해 ‘경제 살리기’ 구호를 외치자 검찰 안팎의 분위기는 180도 바뀌었다.

당시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에서 ‘민생 안정’ ‘경제 살리기’ ‘기업하기 좋은 나라’ 등의 구호가 쏟아져 나왔다. 집권 초기 대기업 길들이기에 성공했다고 판단한 박근혜정부가 경제민주화에서 ‘경제 살리기’로 방향을 급격히 튼 것이다. 이 무렵 검찰의 전 방위 대기업 수사도 기력을 잃은 모습이 역력했다. 2014년 들어 대기업 비리 수사라는 용어 자체가 검찰 주변에서 사라졌다.

청와대와 갈등을 겪다가 낙마한 채동욱 전 총장에 이어 등장한 김진태 검찰총장이 각종 비리를 전 방위로 캐내던 기존의 그물망식 기업 수사 방식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김 총장은 평소 “환부만 도려내는 외과 수술식 수사”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잡한 계열사 내부 거래와 은밀한 비자금 조성 루트 등을 확인하려면 광범위한 특수수사 기법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김 총장이 ‘외과 수술식’ 수사 방식을 유독 강조한 것은 대기업 수사에 부정적인 박 대통령과 청와대 등 정치권력의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박근혜정부 집권 1년 차인 2013년 검찰에 소환된 대기업 총수들. 왼쪽부터 이재현 CJ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 시사저널 포토, ⓒ 시사저널 구윤성
‘하명 수사’ 챙기는 데 급급한 검찰

문제는 김진태 총장 체제의 검찰이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등 정치권력의 이른바 하명(下命) 수사에 치중하면서 성과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호 참사 후 박 대통령의 ‘관(官)피아 척결’ 선언에 발맞춰 시작한 수사도 당초 기대만큼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 대통령이 방위사업 관련 비리 엄단 방침을 내린 후, 검찰을 중심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단의 움직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종북 세력 척결’이라는 구호 아래 현 정부와 코드를 같이하는 공안 사건이나,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연루된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 등 민감한 정치 관련 사건에 유독 강경한 대응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다. 성과에 집착하는 듯한 지금의 검찰에 대해 ‘정치검찰’ 논란이 더욱 커져가는 형국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검찰이 정치권력의 주문 수사에 매달리다 정작 권력형 비리나 대기업 수사 등 검찰 본연의 특수수사는 뒷전으로 밀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형사부가 아닌 특수부에 배당한 것도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본 결과라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의 대기업 수사는 위축될 수밖에 없으리란 전망이다. 검찰이 그동안 축적해온 파일을 활용하기보다는 봉인해둘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공개적으로 기업인에 대한 과도한 수사에 선을 긋고 나섰고, 현 정부 실세로 통하는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기업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며 맞장구를 치고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검찰에 경제계 수사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설정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여권에서 대기업 총수 등 경제인 사면이나 가석방의 군불을 지피고 있는 분위기도 검찰로서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검찰 안팎에서는 “열심히 해봤자 위에서 좋아하지 않을 수사를 누가 하려고 하겠느냐”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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