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 진흙탕 ‘세탁기 전쟁’
  • 이석 기자 (ls@sisapress.com)
  • 승인 2015.01.06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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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방해·증거 위조 맞고소…“헐뜯지 말자” 신사협정 깨져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세탁기 전쟁’이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4년 9월15일 조성진 LG전자 홈어플라이언스(HA) 사업본부 사장을 명예훼손과 업무 방해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독일의 자툰 슈티글리츠 매장에서 조 사장이 삼성전자 크리스털 블루 세탁기를 고의적으로 부쉈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는 현장에서 확보한 폐쇄회로(CCTV) 영상과 파손된 세탁기를 증거물로 제출했다. 삼성전자 측은 “매장 CCTV를 통해 조 사장이 직접 세탁기를 파손하는 것을 확인했다”며 “소비자들에게 하자 있는 제품으로 보이게 해 이미지를 실추시켰을 뿐 아니라 거짓 해명으로 삼성전자 제품을 교묘히 비하해 임직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밝혔다.

2014년 12월31일 조성진 LG전자 홈어플라이언스사업본부 사장이 ‘삼성전자 세탁기 파손 사건’과 관련해 조사를 받고 서울중앙지검을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조성진 LG전자 사장, 3개월 만에 검찰 출석

LG전자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김영수 HA연구소장(상무)은 지난해 12월12일 성명불상의 삼성전자 직원들을 상대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LG전자 임원이 만진 세탁기를 그대로 보존해 검찰에 제출하지 않았고(증거 위조·변조), 수사 과정에서 문제의 세탁기를 넘겨받고도 곧바로 검찰에 제출하지 않은 혐의(증거 은닉)였다. 고소장에는 주요 방송사에 허위 자료화면을 제공해 보도되게 한 혐의(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도 포함돼 있다. 김 소장은 고소장에서 “삼성전자가 증거로 제시한 동영상에 성명불상의 삼성전자 임직원이 수차례 세탁기에 충격을 가하는 장면이 나온다”며 “이것이 검찰에 제출한 증거물이라면 증거 위조 혐의가 된다”고 지적했다.

사건을 배당받은 서울중앙지검 형사4부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임원들을 불러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조 사장은 업무 일정을 이유로 여러 차례 소환 통보에 응하지 않았다. 검찰은 12월21일 조 사장을 출국금지시켰다. 12월26일에는 서울 여의도 LG전자 본사와 경남 창원 공장을 압수수색했다. 결국 조 사장은 12월31일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조 사장은 검찰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조 사장과 임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검토한 뒤 사법처리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사건의 진실 또한 향후 검찰 조사에서 드러날 전망이다.

주목되는 점은 삼성전자가 경쟁사 CEO를 고소한 배경이다. 조 사장은 공업고등학교 출신으로 LG전자 사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LG전자는 2008년부터 글로벌 세탁기 판매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조 사장은 30년간 세탁기 연구·개발에 전념하면서 LG전자를 현재의 위치에 오르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때문에 재계에서는 “세탁기 파손이 과연 검찰까지 갈 사안인지 의심스럽다”고 말한다. 박갑주 건국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중국 가전업계의 추격으로 삼성과 LG전자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재계에서는 “창업주 때부터 시작된 해묵은 갈등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주는 1959년 금성사를 설립했다. 이후 냉장고(1965년)와 TV(1966년), 에어컨(1968년) 등을 국내 최초로 선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삼성그룹은 전자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다. 구 창업주는 셋째 아들인 자학씨(현 아워홈 회장)를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삼녀 숙희씨와 결혼시켰다. 1964년에는 이 창업주와 구 창업주가 함께 동양방송 전신인 RSB 라디오 서울을 설립할 정도로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1969년 이 창업주가 전자 사업에 진출하면서 두 가문은 소원해졌다. 삼성에서 근무하던 자학씨를 금성사로 돌아오게 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이후 두 사돈 가문은 전자업계 1위 자리를 놓고 자존심 싸움을 벌였고, 갈등 또한 시간이 갈수록 확대됐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와 LG전자 제품군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특허나 디자인 문제로 부딪치는 일도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양측은 네거티브 공방을 벌였다.

삼성과 LG의 홍보 수장들은 2006년 10월 서울 모처에서 회동을 가졌다. “서로 헐뜯지 말자”는 신사협정을 맺기 위해서였다. 2007년 5월에는 ‘8대 상생 협력’에 합의했다. 삼성전자·LG전자·LG필립스LCD·삼성SDI 등 4개 회사가 서로 특허를 공유하자는 것이 요지였다.

삼성-LG 홍보 수장 2006년 신사협정 맺기도

하지만 양사의 화해 무드는 2년도 가지 못했다. 삼성전자 PDP TV의 신기술인 ‘명암비 100만분의 1’의 진위를 놓고 양측은 2008년 또다시 충돌했다. LG전자는 “그 기술은 실제 시연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시대에 맞지 않는 소리”라고 맞받았다. 2009년에는 LED TV의 명칭을 놓고 두 회사가 신경전을 벌였고, 2011년에는 3D TV 기술 방식을 놓고 대립하면서 내용증명이 오갔다.

2012년에는 법적 분쟁이 벌어졌다. 삼성전자는 LG전자의 냉장고 용량이 삼성 제품보다 적다는 취지의 동영상을 유튜브에 게재했다. LG전자는 부당한 비교 광고라면서 법원에 광고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여 삼성전자가 동영상을 삭제했고 LG전자는 10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삼성은 “비교 동영상을 삭제했는데도 LG가 풍자만화와 동영상을 제작해 삼성전자를 부당행위 기업으로 몰아갔다”며 500억원대 맞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법원 권고를 받아들여 양측이 관련 소송을 전부 취하했지만 앙금을 털어내지는 못했다. 최근의 세탁기 분쟁에 대해 재계에서 우려를 표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전업계 라이벌’인 두 회사가 소모적 갈등을 끝내고 글로벌 시장 공략에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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