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덩샤오핑 권력과 나란히 하다
  • 모종혁│중국 통신원 ()
  • 승인 2015.01.0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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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지화 등 ‘신4인방’ 제거하고 21세기 시황제 꿈꾸는 시진핑

지난해 12월22일 저녁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링지화 중국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장이 엄중한 기율을 위반한 혐의로 조사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로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주도하는 ‘반부패 전쟁’은 화룡점정을 하게 됐다. 2012년 의기투합해 시 주석 체제를 뒤엎고 정권을 탈취하려 했다는 ‘신4인방’이 일망타진됐기 때문이다.

신4인방은 저우융캉 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쉬차이허우 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보시라이 전 충칭 시 당서기, 그리고 링지화를 가리킨다. 다른 3인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링지화의 정치적 위상은 그들에 못지않다. 링지화는 후진타오 전 국가주석의 복심이었다. 1995년 중앙판공청에 들어간 이래 후 전 주석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해왔다. 중앙판공청은 우리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핵심 권력기관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링지화 중국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장을 체포하면서 1인 권력 체제 확립의 정점을 찍었다. ⓒ AP연합
후 전 주석과 링지화는 같은 ‘퇀파이(團派)’ 출신이지만, 공청단 시절에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1999년 링지화가 중앙판공청 부주임이 되면서 후 전 주석의 입과 귀 노릇을 했다. 베이징 정계에서 “후 전 주석에게는 그림자가 둘 있다. 하나는 링지화, 다른 하나는 천스쥐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천스쥐는 1985년 후 전 주석이 구이저우성 당서기로 일하면서부터 보좌한 수행비서다.

장쩌민·후진타오 전 주석 인맥 제압

후 전 주석과 링지화의 관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끈끈했다. 후 전 주석은 2002년 11월 당 총서기가 된 후 오랫동안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간섭으로 인사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2007년 17차 전당대회부터 전권을 행사했는데, 그 첫 인사가 링지화를 중앙판공청 주임 겸 당 중앙위원에 임명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후 전 주석은 링지화를 18차 전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까지 앉히려 했다.

그러나 2012년 3월 링지화의 아들 링구가 술을 마신 채 베이징에서 페라리를 몰다 다리 난간에 부딪쳐 즉사했다. 놀라운 점은 같은 차에 각각 위구르·티베트 민족인 여대생 2명이 타고 있다 크게 다쳤고, 모두 반나체로 운전 중인 링구와 성행위를 하다 사고가 났다는 사실이다. 쇼킹할 만한 뉴스였으나 언론 공개는 철저히 통제됐다.

링지화와 아내 구리핑은 아들의 사망증명서를 위조해 사건을 덮었다. 사고 처리를 맡은 푸정화 전 베이징 공안국장이 이에 적극 협조했다. 공안 당국의 최고 책임자였던 저우융캉 전 서기가 푸 전 국장에게 사건 은폐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저우 전 서기는 이 사고를 계기로 링지화까지 끌어들여 신4인방을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다른 상무위원들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2012년 9월 링지화는 통일전선공작부장으로 좌천됐고, 상무위원에서 탈락했다.

링지화에 대한 단죄는 다른 신4인방의 제거처럼 수족을 먼저 잘라내는 것부터 시작됐다. 2014년 6월 형 링정처 전 산시성 정협 부주석이 엄중한 기율을 위반한 혐의로 체포됐다. 누나 링팡전과 매형 왕젠캉 산시성 윈청 시 부시장도 비리 혐의로 구금된 채 조사 중이다. 동생 링완청은 후이진리팡 자본관리공사 회장으로 각종 이권에 개입하다 사정 당국이 칼날을 들이대자 미국으로 도피했었다. 지난해 10월 송환돼 조사받고 있는데, 숨겨둔 뇌물이 트럭 6대분이나 발각됐다. 벌써 2년째 종적을 감춘 아내 구리핑과 관련해서는 체포설·정신이상설 등이 나돌고 있다. 측근인 진다오밍 산시성 당위원회 상무위원은 뇌물 수수, 간통 등의 혐의로 쌍개(당적과 공직 박탈) 처분이 내려졌다. 링지화가 혈연과 지연으로 구축한 ‘산시방’이 풍비박산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이 신4인방에 대한 숙청을 직접 주도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을 처벌함으로써 시 주석은 지배 체제를 한층 공고히 다졌다. 신4인방과 그들의 수족만 체포한 것이 아니었다. 저우융캉의 양대 지지 세력이던 ‘석유방’과 ‘쓰촨방’을 초토화시켰다. 쉬차이허우가 뒤를 봐주던 구쥔산 전 총후근부 부부장, 위다칭 제2포병 부정치위원을 비리 혐의로 낙마시켜 군부의 군기를 잡았고, 보시라이와 구카이라이 부부를 사법 처리해 태자당 내 주도권을 장악했다. 링지화를 몰락시켜 후진타오 전 주석이 구축한 퇀파이에 일격을 가했다. 특히 저우융캉은 장쩌민 전 주석의 후원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고, 링지화는 후 전 주석의 최측근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미가 크다. 시 주석이 집권 2년 만에 전임 최고 지도자의 입김에서 완전히 벗어났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당·정·군 실권 잡고 1인 지도 체제 확고히

시 주석의 1인 지도 체제는 최근 진행되는 군부 인사와 내부 감찰 기구 설치에서 잘 드러난다. 2014년 12월 들어 시 주석은 중앙군사위 주석이라는 군 통수권자 신분으로 50명에 달하는 군단장급 장성 인사를 단행했다. 이 중 저우융캉이 통솔했고 66만명의 병력을 지닌 무장경찰 사령관과 정치위원을 모두 교체했다. 사령관에 왕닝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정치위원에 쑨쓰징 총후근부 정치부 주임을 내정해 저우융캉의 그림자를 완전히 떨쳐버렸다.

12월12일에는 중앙판공청·중앙조직부·중앙선전부·국무원판공청·전국인민대표대회·전국정치협상회의 등 핵심 권력기관 7곳에 내부 감찰 부서를 설치키로 했다. 즉, 이들 기관 내에 당의 사정·감찰을 총괄하는 중앙기율위원회의 상주 기구를 만든 것이다. 이로써 시 주석은 중앙기율위를 앞세워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과 행정 및 입법 기관 수장들을 수시로 감찰할 수 있게 됐다. 중국공산당 창당 이래 처음 있는 전무후무한 체제다.

장쩌민 전 주석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로 당 총서기가 되고 1990년 중앙군사위 주석까지 물려받았다. 하지만 수년간 덩샤오핑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92년 공식 직책이 없었던 덩은 경제특구를 둘러본 뒤 남순강화를 발표해 국가정책을 바꿀 정도로 파워가 엄청났다. 1997년 덩이 죽기 전까지 장 전 주석은 군부 인사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었고, 리펑·주룽지 전 총리와 권력을 분점했다.

이는 후진타오 전 주석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 당 총서기에 선출됐지만, 중앙군사위 주석은 1년 10개월이 지나서야 계승했다. 2007년까지 장 전 주석의 간섭과 ‘상하이방’을 이끈 쩡칭훙 전 국가부주석의 견제로 집단지도체제를 엄격히 준수했다. 이런 곤욕을 겪었던 후 전 주석이 2012년 11월 18차 전당대회에서 시 주석에게 당권과 군권을 모두 물려준 것은 뜻밖의 권한 이양이었다.

당·정·군의 실권을 모두 장악했지만, 시진핑 주석으로의 권력 집중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2013년 10월 당 3중전회에서 설립이 결정된 전면개혁심화영도소조와 국가안전위원회뿐만 아니라 뒤이어 출범한 사이버안전영도소조, 국방군대개혁영도소조 등 의사 협조 및 결정 기구의 수장을 시 주석이 모두 맡았다. 심지어 1998년 이래 총리가 맡아왔던 재경영도소조마저 장악했다. 시 주석이 마오쩌둥, 덩샤오핑에 비견될 정도로 막강한 1인 지도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시 주석의 무서운 독주에 권력의 쌍두마차였던 리커창 총리는 실무형 총리로 전락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 서버를 둔 중화권 매체 ‘명경’에서 발행하는 ‘정경’은 “퇀파이인 리 총리가 사퇴 압력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베이징 정계에서도 “리 총리와 국무위원들의 불만이 높아가고 있다”는 소문이 새어나오고 있다. ‘의법치국’을 앞세워 집단지도체제를 유명무실화시킨 시 주석. 지금 그는 21세기형 황제 등극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링지화 통일전선공작부장과 펑줘 CCTV 시정뉴스부 부주임 ⓒ AP연합
지난해 12월28일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운영하는 ‘인민망’에 뜻밖의 뉴스가 떠올랐다. “지난 9월부터 CCTV 시정뉴스부의 펑줘 부주임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기사 제목은 ‘링지화의 애인은 실종 상태’였다. 인민망은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의 기사를 인용해 “펑줘가 링지화와 밀접한 관계였다는 점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고 소개했다.

인민일보는 신화통신·CCTV와 더불어 중국 언론의 3대 핵심 축이다. 인민일보가 정치 지도자의 정부(情婦) 문제를 전면에 보도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더욱이 그 대상이 중국 방송계의 태두인 CCTV 고위 간부였다는 점에서 충격은 컸다. 그동안 저우융캉이 CCTV의 여성 아나운서와 기자를 상대로 엽색 행각을 벌였다는 뉴스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통로는 홍콩·타이완 등 중화권 매체나 해외 언론이었다.

인민일보가 링지화의 섹스 스캔들을 꺼내든 것은 그만큼 CCTV에서 벌어지는 권색(權色) 거래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펑줘는 1998년 대학 졸업 후 CCTV에 입사해 2년 만에 시정뉴스부로 자리를 옮겼다. 시정뉴스부는 CCTV 뉴스센터 시정국의 핵심 부서로, 최고 지도자들의 동태와 중대 외교 사안을 다룬다. 보통 4~5년간 시정국 기자로 일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 현재 시정국에는 300명, 시정뉴스부에는 40~50명의 기자와 직원이 있다. 2008년 펑줘는 시정뉴스부 2인자로 고속 승진했다.

저우융캉의 내연녀 28명 중 하나로 손꼽히는 선빙도 CCTV 아나운서 출신이다. 선빙은 1999년 싱가포르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신문기자로 일하다 2001년 CCTV로 이직했다. 2002년부터 스포츠 및 경제 채널 프로그램 앵커를 맡으면서 승승장구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아나운서팀을 이끈 뒤 갑자기 TV 화면에서 사라졌다가 2012년 8월 중앙정법위윈회 정보센터 부주임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했다. 당시 중앙정법위 서기가 바로 저우융캉이었다.

저우융캉은 선빙 외에도 예잉춘(葉迎春) 등 CCTV 아나운서들을 정부로 거느렸다. 2001년 재혼한 상대는 CCTV 경제 채널 기자였던 자샤오예다. 현재 저우융캉은 28세나 어린 자샤오예와 결혼하려고 전처인 왕수화를 청부 살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렇듯 적지 않은 CCTV 소속 방송인들이 정치 지도자들과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CCTV는 권부의 후궁(央視後宮)>이라는 책까지 홍콩에서 출판돼 중국에서 유통되고 있다. 여기에 남성 고위 간부들도 부패 혐의로 잇따라 체포되면서 CCTV는 안팎으로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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