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권, ‘보수 본진’에서 외면 받다
  • 엄민우 기자 (mw@sisapress.com)
  • 승인 2015.01.0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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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두·김종인·이상돈·7인회 등 대선 공신들 등 돌려

지난해 7월14일 오후 2시 새누리당 전당대회가 열린 성남시 실내체육관. 빨간 외투를 입은 박근혜 대통령이 행사장으로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당시 행사에는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김용갑 상임고문 등 이른바 ‘7인회’(2012년 대선 때 박 대통령을 지지한 핵심 원로 그룹)로 불리는 당 원로들도 자리해 있었다. 그런데 행사장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원로들과 악수는커녕 눈인사조차 하지 않은 채 지나쳤다. 기존 관례로 볼 때 상당히 낯선 장면이었다. 당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당의 한 원로 인사는 “참나,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있나”라며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날 전당대회는 김무성 의원이 ‘친박(근혜)계’가 내세운 서청원 의원을 압도적인 차로 누르고 당대표에 당선되며 사실상 ‘비박(근혜)계’의 완승으로 마무리됐다.

박근혜 정권을 바라보는 보수 진영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 여태껏 대통령에 대한 보수 진영의 불만은 ‘친박과 비박의 계파 갈등’ 정도로 여겨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박근혜정부의 개국공신이자 ‘보수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보수 본류 인사들의 입에서도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 수위도 강하다. 심지어 “기대할 게 없다”는, 체념에 가까운 말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가진 정치 전문가들은 이런 보수 본류의 ‘등 돌림 현상’을 두고 “2015년 박근혜 정권의 3년 차가 만만치 않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았다. 박 대통령의 불통 리더십과 비선 권력 개입 의혹이 보수까지도 등을 돌리게 했다는 것이다. 황태순 위즈덤센터 수석연구위원은 “지금 여론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보수 진영이 상당히 많이 떠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별로 보면 부산·경남도 (전국 지지율의) 평균적인 수준인데, 대구·경북만 제외하고 민심이 떠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 시사저널 이종현·연합뉴스
“난 이미 떠난 사람, 참여할 생각 없어”

“난 이미 떠난 사람이고, 이런 이야기에 해당되지도 않는 사람이니 그냥 넘어가달라.” 박근혜 정권 탄생을 이뤄낸 7인회 멤버 중 한 명인 안병훈 기파랑 대표(전 조선일보 부사장)는 어지러운 정국 속 현 정권을 위한 조언을 구하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 7인회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강창희 전 국회의장,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김용갑 전 한나라당 의원,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 안병훈 대표, 현경대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으로 구성된 친박 원로 모임이다. 그런데 대선이 끝난 지 3년 만에 박 대통령의 의중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평을 들었던 멤버 중 한 명이 자신을 “이미 떠난 사람”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그는 “정권에 힘을 보탤 생각이 없느냐”는 물음에도 “그럴 능력도 없고 생각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사실상 대통령과 같이할 마음이 없음을 피력한 것이다.

또 다른 7인회 멤버인 최병렬 전 대표는 급기야 지난 연말의 권력 비선 논란에 자신이 휘말리는 것에 대해 폭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최근 청와대 유출 문건에서 자신이 김기춘 실장을 추천한 장본인으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이런 X 같은 경우가 어딨나?”라고 격노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지난해 6월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대통령은 참모가 직언할 분위기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같이 밥 먹고 편안하게 조크도 하며 잘 지냈는데, (박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면서 달라졌다. 무서운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 전 대표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정치) 관련 얘기는 안 하고 싶다”며 입을 닫았다. 

7인회가 본격적으로 불만을 품게 된 시점은 지난해 7월 문창극 총리 내정자 파문의 배후로 7인회가 거론되면서부터로 알려진다. 특히 당시 배후로 지목된 안병훈 대표는 자신이 구설에 오르는 것 자체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또 다른 7인회 멤버인 김용갑 전 의원 역시 문창극 사태에 대해 “누가 그 사람을 믿고 일을 추진하겠느냐. (대통령이) 정치를 쉽게 하면 좋을 텐데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는지 아쉽다”고 쓴소리를 한 바 있다. 이들은 이제 불만을 넘어 ‘포기’ 단계로 접어든 듯한 느낌이다.

현 정권에 불만을 갖는 이들은 7인회뿐만이 아니다. 2012년 대선 캠프에 몸담으며 박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뛰었던 사람들도 일찌감치 등을 돌렸다. 당시 박근혜 후보의 부족한 ‘개혁성’을 높이는 데 큰 공을 세운 김종인 전 국민행복특위 위원장과 이상돈 전 비대위원 등도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다”는 반응이다. 이 전 위원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나처럼 드러난 사람 말고도 이 정권에 실망하고 등 돌린 사람이 많다. 보수는 법치주의와 개인의 자유 및 책임을 존중해야 하는데, (현 정권은) 의혹만 덮다가 2년이 갔다. 이제 이 정부는 잘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자리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 때문이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선 “내가 ‘문고리 3인방’한테 자리라도 부탁하고 다닌 적 있는지 가져와보라고 하면 아무도 말 못할 것이다. 이런 논란 자체가 의미가 없다”며 오히려 함께 일하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이 전 위원처럼, 박 대통령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보수 인사  중 상당수는 이번 정권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합리적 보수의 가치가 더 이상 이뤄지기 힘들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경제민주화’ 등 박 대통령 경제 공약의 틀을 잡은 김종인 전 위원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젠 비판도 하고 싶지 않다”며 아예 선을 그었다(33쪽 상자기사 참조). 박 대통령의 경제교사로 불렸던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역시 최근 한 인터뷰를 통해 “객관적으로 대통령이 못한다고 하고, 내가 봐도 그렇다”고 꼬집었다. 그는 나아가 “금융 당국의 한 인사가 비선 실세를 등에 업고 금융 인사에 개입하고 있다”고 말해 파장을 일으켰다. 직접 정권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를 묻자 단호하게 “난 안 한다”고 밝혔다.

정치 전문가들은 박근혜 정권이 이러한 현상을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정권에 날 선 비판을 하거나 돌아섰음을 표명한 이들은 하나같이 보수 진영으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 진보 진영에서도 이들에 대해선 합리성과 내공을 갖춘 인물들이라고 평가한다. 보수를 자처하며 진보 진영과 대립각을 세워 자신들의 존재를 억지로 부각하는 얄팍하고 어설픈 이들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이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주목받는 이유다.   

7인회는 그야말로 ‘정통 보수 원로’들이고, 김광두 원장과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보수 진영의 대표 학자들이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보수 정권의 정책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온 김종인 전 위원장은 진보 진영에서도 인정하는 ‘합리적 보수주의자’다. 역시 박정희 정권 때 공화당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전두환 정권 때 민정당 정책위의장 등을 지냈고, 지금은 ‘비판적 보수주의자’로 평가받는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 역시 지난주 시사저널과의 신년 인터뷰(본지 2014년 12월30일자 참조)에서 현 정부에 대해 “아이디어 결핍이 심각하다. 사회는 점점 더 양극화되고, 지표는 자꾸 나쁜 것만 나온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지 세력 확장은커녕 오히려 폐쇄적”

한때 50%를 넘나드는 안정적 국정 지지율을 바탕으로 순풍을 타는 듯하던 박근혜정부가 집권 2년 차를 지나며 주춧돌이라 할 수 있는 보수 본류로부터 외면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다수 정치 평론가는 문고리 3인방으로 대표되는 비선 권력 논란과 더불어, 대통령이 극소수 친박 인사들끼리만 뭉치고 있는 모습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인의 장막’에 의해 대통령과 합리적 보수 세력이 분리되고 있다는 것이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여야의 충돌보다 권력 안에서 일어나는 파워맨들 간의 내부 충돌이 레임덕의 지름길이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3인방과 극소수가 구심점이 되고, 굳게 닫힌 리더십이 됐다. 커뮤니케이션을 가질 통로가 없어지니 서운함이 생기고 서운함이 분노로 가는 단계”라고 지적했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보수 지지 세력의 외연이 확장되기는커녕 오히려 폐쇄적으로 되면서 정권 창출에 기여한 이들의 소통 채널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가신들이 문제라고 하지만 결국 대통령 책임”이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보수 진영의 비판은 단순히 이념적 가치 지향의 문제가 아닌, 비선 실세 논란 등 현 정권에 대한 평가가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신과 가까운 일부 인사만 포용하고 범주에 들지 않는 이들을 배척하는 대통령의 리더십이 레임덕을 앞당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황태순 위원은 “옛말에 ‘용장 밑에 약졸 없다’는 말이 있다. 아랫사람이 문제가 있다는 건 쓴 사람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결국 능력 있는 사람을 못 쓰는 리더의 잘못이다. 지금 수석들도 주눅 들어서 진언을 못하는 상황이어서 시간이 지난다고 좋아질 가능성은 작다고 본다”고 분석했다. 최진 소장 역시 “대통령이 연말 모임에 측근 몇 명만 부른 건 다른 이들과 소통을 안 하겠다는 생각을 방증한 것이다. 이대로 가면 물밑에서 끓고 있는 권력 암투 문제가 또다시 터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2012년 2월27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비상대책회의에서 박근혜 위원장과 김종인 위원이 대화하고 있다. ⓒ 뉴시스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의 일등공신으로 꼽히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김종인 전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 곁에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있다면, 2012년 대선 때는 그가 있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 입안에 참여해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고, 4선의 관록까지 지닌 김 전 위원장은 일찌감치 박근혜 후보의 대선 정책을 이끌 인물로 낙점돼 있었다.

그랬던 그가 정작 박근혜정부가 들어서고 난 후 1년도 채 안 돼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박근혜정부의 대표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를 만든 그가 탈당하면서 사실상 경제민주화 공약도 물거품이 됐다. 탈당 후에도 정권의 행보에 대해 애정 어린 비판을 아끼지 않았던 그는 최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충분히 이야기했고, 이젠 할 말도 없다”고 말했다. 짧은 통화였지만 싸늘하게 식어버린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 정부가 집권 3년 차로 넘어가고 있다. 정국이 어지러운 이때, 한때 대통령의 멘토로서 조언을 해준다면.

난 이제 아무 말도 안 하기로 작정을 해서 조언할 게 없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변하는 모습이 없는데 굳이 또 이야기할 것 있겠나. 과거에 충분히 할 만큼 했기에 더 이상 아무것도 이야기할 생각이 없다.

‘초이노믹스’로 대표되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라도 평가한다면.

기본적으로 진단을 잘못했기 때문에 거기서 나오는 처방이 약효가 있을 리 없다고 본다. 경제정책을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지금 대통령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보좌를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박 대통령) 자신이 그런 사람들만 곁에 둬서 그러는 것 아니겠나. 논의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현 정부에 직접 힘을 보태거나 참여할 생각은 없는가.

방금 전에 이야기했지 않나. 대선에서 승리했으면 됐지 그 이후에 내가 뭐 더 할 일이 있겠나. 난 더 이상 그런 것에 미련 자체가 없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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