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20. 쿠데타로 집권한 서인, 살육 정치로 국난 불러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1.08 15:0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해군 몰아낸 ‘인조반정’, 정적 제거 위한 권력욕 분출일 뿐

서인(西人)들은 선조 22년(1589년·기축년)의 ‘기축옥사’, 즉 ‘정여립 옥사’ 사건으로 동인(東人)들을 대거 살육하고 정권을 잡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2년 후인 선조 24년(1591년) 서인 영수였던 좌의정 정철은 동인 계열이었던 영의정 이산해와 함께 광해군을 세자로 주청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산해는 약속한 날 대궐에 나오지 않았고, 정철은 선조의 속마음이 인빈 김씨 소생의 신성군에게 있는 것을 모르고 광해군의 건저(建儲·세자를 세움)를 주청했다가 선조의 미움을 샀다. 이를 계기로 정철에 대한 탄핵 상소가 쏟아지면서 서인들이 쫓겨나고 동인들이 다시 집권했다.

다음 임금 옹립 둘러싸고 당파 격돌

이후 동인은 서인에 대한 강경 처벌을 주장하는 이산해 중심의 북인(北人)과 온건 처벌을 주장하는 류성룡 중심의 남인(南人)으로 분당되었다. 남인은 대체로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 주축인 반면, 북인은 화담 서경덕(徐敬德)과 남명 조식(曹植)의 제자들이 주류를 이뤘다. 조식은 정치에 나서기보다는 학문에 몰두하면서 제자들을 길렀다. 제자들도 이런 스승을 따랐다. 북인들이 현실 정치에 나선 것은 임진왜란 때문이었다. 선조가 도주한 상황에서 대거 의병을 일으킨 인물들이 대부분 북인들이었다.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鄭仁弘)을 필두로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정인홍은 서인의 영수였던 율곡 이이가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청명(淸名)이 있어서 세상에서 중히 여겼는데 장령(掌令)에 제수되니 사람들이 다 그 풍채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한 것처럼, 당파를 막론하고 존경을 받던 선비였다. 정인홍은 임란이 발생하자 57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는데, <선조실록> 26년(1593년) 1월자에서 그 숫자를 3000명이라고 적고 있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북인들은 이런 선명성과 실천성으로 임란 때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영화 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집권한 북인들은 선조의 후사 문제를 둘러싸고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라진다. 선조는 재위 33년(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사망한 후 1602년 인목왕후 김씨와 재혼했는데, 4년 후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가 후궁 소생의 세자 광해군보다 정비(正妃) 소생의 영창대군에게 마음을 두자 북인들 중에서 유영경(柳永慶)처럼 선조의 뜻을 좇은 인물들은 소북이 되고, 광해군을 지지하는 정인홍 등은 대북이 된 것이다. 광해군은 임란 직후에 세자로 책봉돼 전쟁 기간 동안 전선을 누비고 다니면서 많은 공을 세운 만 서른한 살의 장년이었다. 이런 세자를 두고 강보에 싸인 아기에게 마음을 둔 자체가 선조와 소북의 실책이었다. 선조는 재위 41년(1608년) 만 두 살짜리 영창대군을 후사로 세울 수는 없다는 생각에 광해군에게 전위(傳位)한다는 전교를 내리고 사망했고,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즉위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소북 영수 유영경 등 일부는 처벌했지만, 소북을 모두 제거하지는 않았다. 광해군은 또한 즉위 직후 남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아 대북의 단독 정권보다는 각 당파가 연합하는 연립정권 수립에 뜻을 두었다. 광해군은 즉위년 2월25일 내린 ‘비망기(備忘記)’에서 “근래 국가가 불행히도 사론(士論)이 갈라져서 각기 명목(名目·당파)을 만들어 서로 배척하고 싸우니 국가의 복이 아니다”며 “지금은 이 당과 저 당을 막론하고 오직 인재를 천거하고 오직 현자를 등용해 다 함께 어려움을 구제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북, 인목대비 폐비로 서인에 역습 당해

나아가 광해군은 즉위년 5월에는 서인 이항복(李恒福)을 좌의정으로 삼았다. 광해군 즉위년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고, 재위 2년에는 허준(許浚)이 <동의보감(東醫寶鑑)>을 편찬했으며,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기 위해 양전(量田) 사업을 추진했던 광해군의 주요 업적은 연립정권 시기에 집중된 일이었다.

그러나 연립정권은 전란 극복과는 관련 없는 이념 문제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광해군 즉위년 7월 경상도 유생(儒生) 이전(李 ) 등이 제창한 ‘오현(五賢)의 문묘종사’가 그 시발이었다. 공자를 모시는 성균관 문묘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조선의 어진 선비 다섯 사람을 제향하자는 주장이 ‘오현 문묘종사 운동’이었다. 이 문제가 정쟁으로 흐른 것은, 남인의 정신적 지주인 이황과 이언적이 5인에 들어간 반면 북인의 정신적 지주인 서경덕·조식 등은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조식의 수제자 정인홍은 광해군 3년(1611년) 상소를 올려 “이언적과 이황이 지난 을사년(1545년)과 정미년(1547년) 사이에 벼슬이 극도로 높거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했는데 그 뜻이 과연 벼슬할 만한 때라고 여겨서입니까?”라고 명종 때의 이언적과 이황의 처신을 비판하고 나섰다. 명종 즉위년의 ‘양재역 벽서 사건’과 명종 2년의 ‘정미옥사’로 사림들이 주륙을 당할 때 이언적과 이황이 조정에 있었다는 비판이었다.

전란 극복이라는 시대적 과제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오현 문묘종사 운동’은 북인과 남인을 갈라서게 했다. 여기에 대북이 인목대비 폐비 기도 사건을 주도하면서 대북은 점차 고립되어갔다. 광해군 추대에 명운을 걸었던 대북으로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소북 유영경 일파를 처벌한 것은 불가피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광해군 5년(1613년)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이듬해에 죽여버리고, 나아가 인목대비의 부친 김제남(金悌男)도 사사(賜死)시킨 것은 과도한 일이었다. 게다가 광해군 10년(1618년) 인목대비를 서궁(西宮·경운궁, 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킨 것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 즉위 초 영의정에 제수되었던 남인 이원익이 홍천을 거쳐 여주로 유배 간 것이나, 좌의정에 제수되었던 서인 이항복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가서 죽게 된 것도 모두 폐비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대북은 정권을 독차지하게 되었지만 유교 국가에서 자식이 어머니를 폐할 수 있느냐는 윤리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큰 반발을 샀다. 이에 대한 서인들의 집단행동이 인조반정이란 쿠데타였다.

광해군 15년(1623년) 4월 이서(李曙)·이귀(李貴)·김류(金) 등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 이종(李倧)을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은 크게 두 가지를 명분으로 삼았다. 하나는 명나라를 숭배하는 숭명사대(崇明事大)였다. 명과 청 사이에서 균형을 잡았던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명나라에 대한 불충(不忠)이란 주장이었다. 다른 하나는 인목대비 폐비 기도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은 서인들을 제외한 다른 당파는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폐모는 잘한 행위는 아니지만 그 본질은 궁내에 늘 있었던 권력 다툼의 하나였다.

정권 잡은 후 다른 당파  ‘살육 정치’

반정의 일등공신인 이서가 ‘성패가 확실히 정해지지 않은 터에 위세로써 진압할 수도 없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로 인조반정에 대한 반발은 극심했다. 이때 서인들이 난국 타개책으로 제시한 것이 남인 이원익의 영의정 제수였다. <인조실록> 1년(1623년) 3월16일자는 인조가 여주까지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다’면서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고 적고 있다. 쿠데타에 대한 지지가 많지 않자 서인이 남인을 끌어들여 ‘서·남(西·南) 연립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위기를 극복한 것이다.

서·남 연립정권으로 정국이 안정되자 서인들은 대북에 대한 대대적인 정치 보복에 나섰다. 대북 영수 정인홍과 이이첨 및 그의 네 아들 이대엽·이익엽 등도 처형했다. 쿠데타 세력이 작성한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은 백관이 둘러보는 가운데 정형(正刑·능지처참)시킨 16명의 이름을 적고 있는데, 사실상 폐모를 명분으로 삼은 정적 제거에 불과했다. <계해정사록>은 정형당한 16명 외에 복주(伏誅·사형)당한 64명의 명단도 싣고 있다. 한 당파가 쿠데타 등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아 다른 당파의 씨를 말린 살육 정치의 시작이었다. 게다가 쿠데타 9개월 만인 인조 2년(1624년) 정월, 반정 주역이면서도 평안북병사 겸 부원수로 좌천된 이괄(李适)이 선조의 10남 흥안군(興安君) 이제(李)를 추대하면서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 사건도 북인들에 대한 정치 보복으로 이어졌다.

이괄의 군사가 파죽지세로 남하하자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도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직전 옥에 갇힌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을 비롯해 이시언(李時言)·유공량(柳公亮) 등 37명을 죽인 것이었다. 기자헌은 북인이었지만 폐모를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간 인물인데, 그런 이를 죽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폐모란 정권 탈취를 위한 허울에 불과했음이 입증된다. 숭명사대와 폐모를 구실 삼아 정권을 탈취한 서인의 대북에 대한 무자비한 정치 보복이 바로 인조반정의 본질이었다. 이후 서인들은 숭명사대라는 시대착오적인 사대주의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초래하면서 나라와 백성들을 큰 고통에 빠뜨렸다. 아직도 극도의 사대주의와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정당에 대한 가혹한 공격과 탄압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 땅의 정치 현실에 인조반정은 큰 교훈을 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