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S.E.S 반갑다 90년대의 ‘나’
  • 김영대│대중음악 평론가 ()
  • 승인 2015.01.1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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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대중음악 무대 ‘토토가’ 인기 비결

<무한도전>(이하 무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이하 ‘토토가’)는, <나는 가수다> <히든 싱어> <불후의 명곡> 그리고 가장 가깝게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등을 통해 근 몇 년간 꾸준히 지속돼온 1990년대 음악의 재발견, 그 움직임 중에서도 대중적 파급력에서 하나의 정점을 찍은 사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에서 한 시대의 음악만으로 이처럼 전 방위적인 인기와 파급력을 이끌어낸 사례는 흔치 않다.

누구는 20년 정도를 주기로 늘 되풀이돼온 복고 열풍의 연장선에서 이 흐름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토가’의 성공은 1990년대 음악이 가진 내재적 특별함 때문이라기보다는 대중문화의 역사 속에 늘 비슷하게 되풀이돼온 자연스러운 유행의 순환으로 이해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자리를 잡은 7080 콘서트나 몇 년 전 ‘쎄시봉’의 인기처럼 ‘토토가’와 <응답하라>는 그 특별한 세대적인 경험을 공유하고 교감하는 사람에게만 유효한, 일종의 정교한 추억 팔이가 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도의 전매특허와 같은 ‘진정성’이야말로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음악과 무대는 물론, 심지어 동시대의 톱 MC인 이본마저 상징적으로 불러내는 꼼꼼한 ‘고증’이 예능이라는 유쾌한 포맷에 담기자 그야말로 엄청난 시너지가 만들어졌다. 평론가나 음악 PD는 쉽게 생각하기 힘들었을, 어떤 의미로 오직 무도였음에 가능했던 기획이었으리라.

영미 팝 대체한 한국 아이돌 태동기

하나 ‘토토가’가 음악적으로 흥미로웠던 지점은 따로 있다. 바로 한국 댄스음악의 첫 번째 전성기, 수많은 인기 그룹과 수많은 반짝 히트곡이 <가요톱10>과 <토토즐> 그리고 막 출범한 케이블TV의 VJ에 의해 소개되던 그 시절의 음악에 주목했다는 점이다. 쿨과 터보와 코요테의 음악이 울리면 모든 이가 플로어로 뛰어나가 똑같은 안무를 따라 했던 1990년대, 김태호 PD는 1990년대 안에서도 이 같은 ‘나이트 뽕 댄스’라 불리던 지점에 천착해 예능의 형식을 빌려 펼쳐냈다. 소찬휘·터보·이정현 등 정작 평단이나 마니아에게는 인정받지 못했던, 20년 가까이 어떠한 방식으로도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았던 이 가수들과 그들의 음악이 가장 극적이고, 가장 화려한 방식으로 복권된 셈이다.

이 지점에서 의미 있게 관찰해야 하는 것은 PC와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유통 및 소비, 그리고 1990년대를 기점으로 확립되기 시작한 한국 대중음악, 즉 K팝 산업과의 연결 고리가 그 배경에 있었다는 점이다. 가령 유튜브가 1990년대 음악의 라이브러리로서 그 시절의 음악과 영상을 지금의 세대들에게 꾸준히 공급하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인터넷과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꾸준히 재생산되는 1990년대 음악은 젊은 세대가 지지하는 아이돌 가수의 직속 선배이자 음악적 뿌리로서 쉽게 확인되고 인용된다. 흑인 음악과 댄스 비트에 기반을 둔 주류 가요 역시 호환성이 강하다. 지누션을 만든 양현석, S.E.S를 탄생시킨 이수만, 엄정화의 프로듀서였던 박진영이 오늘날 음악산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파워맨이 된 사실에 주목하자. 그러니까 ‘토토가’는 1990년대 댄스음악을 자양분 삼아 이제는 하나의 거대한 제국을 이뤄낸 K팝 산업의 맥락과 역사를 새롭게 선포하고 있는 셈이다. 1990년대에 대한 복고 움직임이 7080으로 대표되는 성인 취향 가요 시장으로의 분화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것도 이 지점이다. 7080이 장년층의 회고담으로만 추억되는, 잊힌 시대에 대한 명백한 사전적 의미의 ‘복고’ 그 자체라면, 1990년대에 대한 재조명은 여전히 현 세대와의 교감 및 산업적인 연속성 안에서 의미가 새롭게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가요계 황금시대, 1990년대 복고 문화

1990년대 음악의 가장 뚜렷한 성과는 주류 가요 시장에 새로운 모멘텀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듀란듀란, 뉴키즈온더블록 등 영미의 팝 아이돌은 서태지와 아이들, H.O.T 등 새로운 ‘국산’으로 대체됐다. 댄스와 발라드가 중심이 된 주류 가요는 근 반세기를 지켜온 팝음악 전성시대를 마감시켰고, 한편으로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흐름을 이어받은 재능 있는 음악감독이 팝음악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고급스러운 사운드를 가요에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 윤상·김현철·김형석 등이 만든 음악은 ‘가요는 뽕짝일 뿐이야’라는 고정관념을 깼고 클래식과 재즈에 기반을 둔 고급스러운 작법은 아직도 한국 대중음악에서 웰메이드 팝의 교과서처럼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서태지와 아이들, 신해철, 015B 등이 등장해 새로운 조류를 추동했다. 거침없고 과감하되 늘 대중성을 잃지 않았던 이들의 음악적 실험은 한국 대중음악이 다양한 레퍼토리를 확보해 젊은 청자들의 트렌드와 세련미에 대한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그야말로 한국 팝의 새로운 물결이었다.

1990년대에 관한 담론들이 풍성해지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며 이를 촉발시킨 ‘토토가’는 그 자체로 훌륭하고 흥미로운 기획이다. 그럼에도 뭔가 개운치 않은 뒷맛은 남는다. 그 어떤 문화보다도 기억 혹은 추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대중음악이라는 콘텐츠에서 낭만성은 분명 중요한 요소지만 동시에 역사는 객관적으로 기술될 필요가 있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기 이전에 음악을 평론하는 입장에서 1990년대는 종종 어설픈 시도가 실험이라 불리거나 표절에 가까운 모방도 현대적 대중음악의 ‘이식’이라는 핑계로 상대적으로 너그럽게 용인되던 시절로 기억된다. 세련미와 서구성의 추종 속에서 누가 불러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만 같았던 비슷비슷한 음악도 종종 ‘양산’됐다. 아이돌 위주의 댄스음악이 지배한 대중가요계를 바라보는 우려 섞인 시선과 ‘우리 시대가 더 좋았지’하는 푸념은 가요의 황금기였던 1990년대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90년대’라는 말은 10년 단위로 세상을 임의적으로 바라보는, 분석에 용이한 분류 체계의 하나일 따름이다. 그 안에는 한두 마디 키워드로는 갈음할 수 없는 다양한 흐름과 그 흐름에 미처 편입되지 못했던 소소한 움직임이 공존했다. 가령 내가 기억하는 1990년대와 그들이 기억하는 1990년대는 다를 수 있고, 엄밀히 말하면 ‘90년대 음악’이라 부를 수 있는 일관된 실체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1990년대가 가요계의 황금시대이자 복고 문화의 중심, K팝 산업의 전제로 그 의미를 지속적으로 부여받는 한, 1990년대를 ‘장르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재생산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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