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풍자, 성역은 없다
  • 최정민│프랑스 통신원 ()
  • 승인 2015.01.1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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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당한 ‘샤를리 엡도’…분야·국적 가리지 않고 비판

프랑스에서 집회와 시위를 하기 위해서는 경시청에 사전 신고를 해야 한다. 그러나 1월7일 저녁, 프랑스 전역에는 신고하지 않은 시위대와 추모 물결이 가득했다. ‘샤를리 엡도’ 테러가 벌어진 바로 그날이었다. 오전 11시30분쯤 파리 동쪽 11구에 위치한 시사만평 주간지 ‘샤를리 엡도’의 사무실에 이슬람 과격 단체 소속 무장 테러리스트들이 난입했다. 당시 사무실에서는 편집회의가 열리고 있었고, 스테판 샤르니에 편집장과 만화가인 장 카뷔, 조르쥐 볼린스키 등 주요 편집진이 공격당했다. 목격자는 50여 발의 총성과 한 번의 폭발음이 들렸다고 했다. 그 결과 12명의 사망자와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비교적 아랍권과 가까워 테러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프랑스였기에 대낮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진 총격 사건이 주는 충격은 컸다.

‘샤를리 엡도’가 이슬람 과격 단체의 표적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1년 이슬람의 종교적 선지자인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화로 이슬람 사회의 비판을 받으며 수많은 테러 위협을 받아왔다. 2011년 11월2일 새벽에는 날아든 화염병으로 사무실이 전소되었고, 인터넷 사이트 역시 공격을 받았다. 방화 사건 직후, 당시 편집장이었던 실비 코마는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샤를리 엡도’는 자유로운 사상가의 길을 계속 갈 것”이라며 테러에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1월7일 ‘샤를리 엡도’ 테러를 추모하려는 사람들이 모여 희생당한 편집진의 눈 사진을 들고 있다. ⓒ AP 연합
교황·김정은·오바마도 풍자의 대상

‘샤를리 엡도’의 풍자는 이슬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동안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수위 높은 풍자로 각인된 주간지다. 기존 시사 주간지들이 광고 수익에 의존하는 반면, ‘샤를리 엡도’에는 광고가 없다. 편집의 독립성을 보장받기 위한 원칙이었다. 오로지 독자들에게서 들어오는 수익에만 의존해왔다.

독립성을 강하게 추구해왔던 것은 그만큼 성격이 분명한 매체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확연히 호불호가 갈리는 매체이기도 했다. 분야·국적 등 비판과 풍자에 성역을 두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원인이기도 한 이슬람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은 가톨릭에도 똑같이 적용됐었다. 바티칸이 예민해하는 동성애 문제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아랍권만 다룬 게 아니었다. 북한과 미국도 빠지지 않았다.

프랑스의 풍자 언론 매체는 적지 않다. 주간지 ‘샤를리 엡도’를 비롯해 일간지 ‘캬나르 엉세네’가 있다. 민영방송 ‘카날 플뤼스’에서는 인형 풍자극인 <레 기뇰>을 내보내고 있다. 이들이 내놓는 풍자에는 ‘한계’가 없다. 시라크 대통령 시절, 슈퍼맨 복장을 한 시라크 대통령을 ‘super menteur(슈퍼 거짓말쟁이)’라고 풍자하는 것을 보고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질겁한 전례도 있다. 이처럼 강도 높은 풍자 문화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절대적인 신념과 토론과 비평에서 낯 뜨거울 정도의 ‘돌직구’를 날리는 토론 문화에서 비롯됐다. 저널리스트인 미셸 시레트는 프랑스인들의 정서를 설명하며 “프랑스인들은 논쟁이 뜨거울수록 관심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이번 참사의 희생자 중에는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대표적인 삽화가 장 카뷔가 있다. 그는 과거 프랑스의 대표적 문학 대담 프로였던 베르나르 피보의 <아포스트로프>에 초대되기도 했다. 당시 시청자가 600만명에 달했던 이 프로그램의 주요 초대 손님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을 비롯한 세계 문학계의 거장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카뷔 역시 단순한 삽화가가 아닌 한 분야의 거장으로 프랑스에서 인정받은 셈이다. 1980년 이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그의 강도 높은 풍자를 두고 사회자인 피보가 물었다. “너무 못된 것 아니냐.” 카뷔는 “세상엔 나보다 더 못된 사람이 훨씬 많다”고 답했다. 풍자의 한계를 묻는 질문에는 “나는 모든 것을 유머로 만들 수 있다. 유머야말로 사람들을 이어주는 끈이다”라고 말했다. 뉴욕타임스가 이번 ‘샤를리 엡도’ 테러 사건을 추모하는 삽화의 문구를 ‘유머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죽은 것’이라고 뽑은 이유는 바로 카뷔에게 있었다.

‘샤를리 엡도’처럼 프랑스에만 존재하는 특유의 풍자 언론은 정치권력과 그동안 적대 관계를 가져왔다. ‘샤를리 엡도’ 역시 프랑스 정부와 긴장 관계에 있었다. 예를 들어 누드 모습의 무함마드를 여러 차례 그리자 2012년 프랑스 정부가 직접 나서 경고를 했다.

좌우 가리지 않은 샤를리 추모 물결

‘샤를리 엡도’와 같은 풍자 언론의 역사는 매우 길다. 풍자 언론의 전형이었던 주간지가 발행되던 것이 1830년대의 일이다. 프랑스 역사의 격동기였던 당시는 ‘시민왕’ 루이 필립이 들어선 때였는데 대표적 풍자 주간지인 ‘캐리커처’지는 루이 필립 행정부와 적대적 관계에 서며 대표적 비판 언론으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당시 발행인이었던 샤를 필리퐁은 국왕 모욕죄로 6개월형을 살기도 했으며 그가 연루된 소송만 20여 건에 달했다.

그러나 이런 풍자 주간지들이 가진 역량은 무서웠다. 프랑스 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발자크 역시 샤를 필리퐁 같은 풍자 언론 편집인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단어 하나하나에 언어적 유희와 정치적 함의를 녹여내면서 프랑스적 풍자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캐리커처’지 도판을 그렸던 도미에는 미술사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작가로 그의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샤를리 엡도’ 역시 이런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 참사의 희생자들 역시 프랑스에서 예술가로 사랑받던 인물들이었다.

‘샤를리 엡도’가 남긴 유산은 의외로 강고하다. 이번 테러로 인해 이슬람을 비판하는 자유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전 세계의 언론이 연대하고 단합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샤를리 엡도’의 삽화에 대해 비판하던 진영까지도 일제히 추모 물결에 동참하고 있다. 진보 언론 르몽드부터 우파 일간지인 ‘르 피가로’, 심지어 경제 전문지인 ‘레제코’ 등 거의 모든 매체가 홈페이지 상단에 ‘우리 모두 샤를리’라는 문구를 올려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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