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부자 1위…부동산에 탁월한 안목
  • 이기진│PD ()
  • 승인 2015.01.15 19:4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후 엔터테인먼트 사업가로…이수만과 엎치락뒤치락

‘연예인 주식 부자 1위에 양현석 YG 대표.’ 연초, 언론에 일제히 보도된 2014년 연예인 주식 부자 순위에서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가 이수만 SM 회장을 제쳤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지난해 말 주식 종가 기준으로 양현석은 1857억7000만원을 기록해 1493억원에 머무른 이수만을 앞섰다. 언론들은 양현석의 승리 요인으로 성공적인 사업 영역 확대를 꼽았다. YG가 루이비통 계열의 사모펀드로부터 8000만 달러(약 827억원)의 투자 유치에 성공한 데 이어, 제일모직과 설립한 패션 합작법인이 지난해 영캐주얼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론칭한 점이 부각됐다. 반면 SM은 지난해 엑소의 중국인 멤버 탈퇴와 소녀시대 멤버 제시카 탈퇴 등이 주가 하락으로 이어져 엔터테인먼트업종 시가총액 1위 자리를 YG에 내준 것으로 분석됐다.

ⓒ 연합뉴스
‘프로듀서가 음악 시장 좌우할 것’ 간파

엔터테인먼트업계 주식 부호 순위는 최근 몇 년 사이 SM 이수만과 YG 양현석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상황이다. 난공불락이던 이수만의 아성에 양현석이 도전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다. 2011년 양현석은 빅뱅과 2NE1 등을 앞세워 직상장에 성공하며 엔터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특히 2012년 새롭게 영입한 싸이의 대성공을 등에 업고 이수만을 제치며 1위에 오르는 이변을 연출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잠시 흔들린 이수만은 2013년 전열을 정비하고 대반격에 나섰다. 새로운 야심작인 한·중 합작 그룹 엑소가 선봉장이었다. 기대대로 엑소는 단숨에 중국 시장을 석권하고 이수만은 그해 말 양현석을 2위로 밀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한 번씩 1위를 주고받은 상황에서 2014년 내내 숨 막히는 경쟁이 펼쳐졌다.

이들의 경쟁은 누가 엔터업계 권력의 맹주가 되는가를 가늠하는 것이어서 큰 관심을 끌었다. 결국 하반기 들어서며 엑소 멤버 탈퇴 등의 불협화음을 겪은 SM의 주가가 크게 하락하면서 2014년은 YG 양 대표의 승리로 끝났다. 참고로 두 사람의 파워가 엔터업계에서 어느 정도 위치인지는 후발 3~4위 주자의 재산 가치를 비교해보면 금세 확인된다. 3위인 배용준의 보유 주식 가치는 548억원, 4위 JYP 박진영의 보유 주식 가치는 233억원에 불과하다. 더욱이 지난해 배용준의 키이스트가 소속 연기자인 김수현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를 통해 중국에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린 점을 감안할 때 양현석의 파워는 상상 그 이상의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이번 발표가 주식 재산에 한정돼 있지만 실제 보유한 전 재산을 대상으로 한다면 격차는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양현석은 대단한 부동산 재력가다. 그는 홍대 인근에 클럽 등 많은 부동산을 확보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주식 부호 1~4위에 오른 면면이다. 이들 모두 국내 엔터 기업 빅4를 이끄는 수장이며 스타 출신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이는 스타권력이 엔터업계의 자본권력마저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양현석이 엔터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타권력의 위치에 오른 원동력은 무엇일까.

첫째, 서태지와의 운명적 만남이다.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멤버로서 한국 엔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하지만 냉정히 돌아보면 그는 당시에는 리더였던 서태지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다. 그룹 활동 당시 그는 이주노와 더불어 서태지의 뒤를 받쳐주는 백댄서·래퍼·뮤지션으로 인식되었다. 이들의 데뷔와 성장, 해체에 이르는 전 과정을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본 필자 입장에서는 양현석이 대중에게 매우 저평가되고 있다는 사실을 늘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중학생 시절 이미 허비 행콕과 마이클 잭슨의 영향을 받아 흑인 음악과 춤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공고를 다닌 그는 건축 관련 기능사 자격을 취득한 것이 인연이 되어 졸업 후 한 지도 회사에서 샐러리맨 생활을 했다. 그러다 TV에 함께 춤추던 동료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직장을 뛰쳐나와 댄스팀 ‘스파크’에 합류했다. 이어 당시 최고의 인기를 모은 가수 박남정의 백댄서인 ‘프렌즈’의 댄서로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엔터테이너의 길에 들어섰다. 

두 번째 요인은 다른 뮤지션과의 차별화를 지속적으로 시도한 점이다. 1996년 1월 느닷없이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선언이 나오면서, 이들은 대중음악 시장에 무장 해제된 채 던져졌다. 더욱이 양현석은 동료인 이주노와의 경쟁에서도 처참한 패배를 맛본다. 그가 준비한 첫 뮤지션인 ‘킵 식스’가 안착하지 못한 데 반해 이주노의 ‘영턱스클럽’은 크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양현석에게는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대한민국 음악사에 음반 프로듀서 시스템을 정착시킨 인물이다. 그는 미래 음악 시장이 가수 개인의 능력보다는 우수한 프로듀서에 의해 좌우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페리, 원타임의 테디, 스토니스컹크의 쿠시, 빅뱅의 지드래곤 등 우수한 프로듀서를 지속적으로 양성했다. 특히 R&B 전문 레이블이던 엠보트와 손잡고 휘성·거미·원티드·빅마마 등을 성공시켰다. 이는 자신에게는 없는 장점을 가진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박경진과 호흡을 맞춘 결과였다.

강남과 홍대 인근의 문화 지형도 바꿔

세 번째 요인은 솔직함이다. 그는 매우 고집 세고 뻣뻣한 제작자다. 제도권 언론을 신뢰하지 않아 늘 언론과의 소통에 미숙하고, 기자나 PD들과 갈등도 많았다. 하지만 재미난 것은 정말 중요한 순간에 그가 위기를 돌파해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솔직함이다. 대표적인 예가 ‘킵 식스’ 실패 후 1997년 여름 ‘서태지와 아이들’ 팬들을 찾아 솔직하게 자신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부탁한 점이다. 당시 한강시민공원 독도나루터에서 열린 ‘서태지와 아이들 기념사업회’ 모임에서 그는 야심 차게 준비한 지누션의 타이틀곡 <가솔린>을 공개했다. 이후 원타임과 YG패밀리의 계속되는 성공으로 스타권력의 핵심으로 성장해간다. 더욱이 비의 대항마로 준비한 세븐, 일본·중국 진출에 성공한 빅뱅과 2NE1 등은 그를 한류 시장의 권력으로 발돋움시켰다. 최근에는 월드스타 싸이와 에픽하이를 영입해 색깔 변화를 시도하면서 글로벌 기업으로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양현석은 부동산 분야에서도 탁월한 안목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그는 클럽문화를 창조해내고 발전시킨 주인공이다. 그로 인해 강남과 홍대 인근의 문화 지형도가 바뀌고 젊은이들의 문화 패턴이 달라졌음은 그가 이 시대 문화권력의 핵심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