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면 혼자 가지, 아내와 딸은 왜?
  • 김지영 인턴기자 ()
  • 승인 2015.01.22 14: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0대 가장의 ‘서초동 세 모녀 살인 사건’ 추적

1월6일 오전 3시쯤 서울 서초동의 한 아파트에서 이 아무개씨(44)와 그의 큰딸(14) 및 작은딸(8)이 목 졸려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세 모녀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강 아무개씨(47)로 밝혀졌다. 강씨는 서울의 유명 사립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3년 전까지만 해도 한 기업의 임원을 지냈던 ‘엘리트’로 알려졌다. 강씨는 범행 후 충북 청주에 도착해 “아내와 딸을 죽였고 나도 죽겠다”며 119에 신고했다. 대청호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 강씨는 다시 경북 문경으로 향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사건을 둘러싸고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됐다. 먼저 범행의 계획성 여부다. 사건 전후 피의자 강씨의 행동에서 우발적인 면과 계획적 면모가 동시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음은 범행 동기가 무엇인가다. 이에 대해 강씨는 생활고 때문이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강씨 가족이 놓인 상황이 그리 절망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믿기 어렵다는 말도 나온다. 강씨는 왜 이런 끔찍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을까.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 서초경찰서 관계자 등을 통해 사건의 전말을 추적했다.

1월6일 서울 서초동에서 발생한 ‘서초 세 모녀 살인 사건’ 용의자 강 아무개씨가 같은 날 오후 경북 문경에서 붙잡힌 후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 시사저널 구윤성
가족 합의 ‘동반 자살’ 아닌 ‘독단 범행’

강씨는 범행 후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119에 자신의 범행을 신고했다. 범행 직후의 동선은 충북 청주, 경북 상주와 문경 등이다. 검거 당시에는 자신이 있는 지역이 정확히 어딘지도 몰랐다. 사건 초기 경찰이 우발적 범죄 쪽에 초점을 뒀던 이유다. 가족 간 다툼 과정에서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 등이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정황들을 검토해 볼 때 강씨의 범행은 계획적이었다는 것이 수사 당국 및 범죄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우선 강씨는 사전에 범행을 구상하고 있었다. 강씨가 경찰에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이미 지난해 12월 자신의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판단해 자살을 결심했다. 하지만 자신의 자살 사실이 알려질 경우 남은 가족들에게 쏟아질 차가운 시선, 특히 사춘기인 두 딸이 받게 될 상처가 두려웠다고 한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강씨는 가족들의 숨을 먼저 끊은 다음 자신도 삶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범행 직전 아내와 큰딸에게 수면제를 먹인 것도 계획범죄 쪽에 무게를 두게 한다. 지난 1월11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피해자 시신을 부검한 결과 아내 이씨와 큰딸에게서 수면제로 쓰이는 ‘졸피뎀’이 검출됐다. 양 자체는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었다. 강씨는 불면증을 이유로 최근 한 달간 두 차례에 걸쳐 졸피뎀 10정씩을 처방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강씨는 범행 전 와인과 물에 수면제를 타 각각 아내와 큰딸에게 먹인 후, 목을 졸라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일부 언론은 피해자 시신에 저항한 흔적이 없었다고 보도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경미하지만 반항한 흔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수면제는 마취제와 달리 숨이 넘어갈 때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범행 당일 수면제를 준비해 가족들에게 먹이고 가족이 잠이 든 상태에서 살인을 했던 상황이 순간적인 감정에 의한 살인이 아니라 계획된 범죄라고 볼 수 있는 근거”라며 “목을 조를 때 손으로 밀치거나 손톱으로 할퀴는 등의 저항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가족 간 합의를 바탕으로 한 동반 자살 기도가 아니라 가장 강씨의 독단적·계획적 범행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씨는 왜 이런 계획범죄를 저질렀을까. 사건 직후 경찰에 붙잡힌 그는 가족을 살해한 동기에 대해 ‘생활고’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회사를 그만둔 후 생활비를 마련하려 5억원을 대출받아 주식 투자에 나섰는데 이마저도 실패해 삶의 희망을 잃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강씨가 진술한 범행 동기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고 있다. 강씨의 경제적 상황이 그리 절망적인 수준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강씨는 5억원의 대출 빚이 있으나 이를 갚고도 남을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일대 부동산업자들에 따르면 강씨 가족이 살던 아파트의 현재 매매가는 13억원, 급매로 나와도 12억원은 받을 수 있는 곳이다. 경찰 조사 결과 대출받은 5억원 중 1억3000만원 상당이 남아 있고, 강씨 아내 통장에 3억원 상당의 현금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강씨의 범행 동기가 다른 데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반면 강씨 가족의 처지가 알려진 것보다 좋지 않다는 정황도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강씨에게 재산이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부모 및 장인·장모가 모두 암 투병 중”이라고 밝혔다.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입지가 흔들리는 가운데 거액의 치료비가 필요한 상황이 강씨를 심리적으로 압박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강씨가 범행 현장에 남긴 유서에는 이를 암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강씨는 유서에 ‘통장을 정리하면 얼마간 좀 남을 텐데, 부모님, 장인·장모님 치료비와 요양비로 쓰십시오’라고 적었다.

10여 차례 재취업 시도 좌절

강씨가 애타게 재취업을 시도했으며 그 과정에서 반복적으로 좌절을 겪었던 점도 확인됐다. “10여 차례 이상 이력서를 제출했지만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는 것이다. 명문대 졸업, 기업 임원 경력, 과거 받았던 고액 연봉 등 화려한 ‘스펙’이 재취업 시장에서는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2년 퇴직 후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수입이 없었고, 마지막 희망이던 주식 투자에도 실패하자 강씨는 크게 낙담한 것으로 보인다. 곽대경 교수는 “부모의 병환과 오랜 실업 상태가 정신적 스트레스를 가중시키는 원인이 됐을 것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의 투병 생활을 도와주지 못하는 안타까움,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주지 못하는 미안함으로부터 받는 심리적 압박이 매우 컸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강씨는 사건 발생 일주일 만인 1월13일 현장검증을 마치고 검찰에 송치됐다. 경찰 관계자는 “강씨는 일관되게 범행을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했다. 가족들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했다. 유서에 ‘천국으로 잘 가렴. 아빠는 지옥에서 죗값을 치를게’라고 썼던 강씨는 법정에 서게 됐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