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한국의 가벌] #12. “몽구가 장자인데, 자동차회사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
  • 소종섭│편집위원 ()
  • 승인 2015.01.22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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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세영에게 일방 통보…정몽구, 1998년 12월 현대차 회장 취임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아버지 정봉식은 동네에서 소문날 정도로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다. 6남 1녀의 장남으로 동생 여섯 명을 책임져야 했던 정주영 또한 열 살 무렵부터 힘든 농사일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동생들을 책임지고 혼인시켜 분가시키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며 어린 정주영을 새벽 4시면 깨워 10리나 떨어져 있는 농토로 데리고 나갔다. 일등 농사꾼으로 키워내겠다는 부모님으로부터 정주영은 부지런함을 배웠지만 부모님의 뜻은 따르지 않았다. 열네 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한 정주영의 꿈은 공부를 계속해 보통학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짬이 날 때마다 동네 이장 댁에서 보던 동아일보를 얻어 읽던 소년 정주영의 꿈은 서울에 가 독학으로 고시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는 것으로 바뀐다. 훗날 그가 고향인 강원도 통천을 떠나 서울로 왔을 때 노동을 하면서 <법제통신> 등 법 관련 서적을 보고 <육법전서>를 암송해 보통고시까지 치렀던 것은 이런 꿈이 있었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은 시험에 낙방하면서 접었지만 만약 정주영이 시험에 합격했다면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르게 굴러갔을 것이다. 정주영은 그때 공부한 법률 지식이 바탕이 돼 외국에 나가 어떤 계약을 체결할 때 법률고문을 동행하지 않고도 실수 없이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2000년 5월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과 정몽구(가운데)·정몽헌(오른쪽) 부자 ⓒ 시사저널 임준선
소 판 돈 70원 훔쳐 세 번째 가출

얻어 읽은 동아일보에서 청진에 개항공사와 제철장 건설공사가 시작된다는 기사를 보고 칠흑같이 어두운 7월 한밤에 정주영은 첫 번째 가출을 결행했다. 청진으로 가려면 문천과 고원을 지나야 했는데 평양과 고원을 잇는 평원선 철도공사 현장에서 정주영은 막노동꾼으로 일했다. 두 달쯤 지났을까. 손님이 찾아왔다는 전갈을 받고 나간 정주영 앞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정주영은 아버지를 따라 300리 길을 걸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은 포근했으나 정주영의 야망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좁았다. 이듬해 4월 정주영은 이번에는 서울을 향해 집을 나섰다. 두 번째 가출이었다. 그러나 김화에 있는 작은할아버지 댁에 들른 정주영은 작은할아버지와 당숙에게 덜미를 잡혀 다시 고향으로 갔다.

그러나 여기서 절망할 정주영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부기학원에 가기 위해 집 궤짝에 숨겨놓았던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송전역으로 가 서울행 밤차를 타고 가출한다. 세 번째였다. 두 번의 가출 때 몇 십 전을 갖고 나왔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돈을 갖고 집을 나온 것이다. 서울에 와 부기학원에 다니면서 정주영은 <나폴레옹전> <링컨> <삼국지> 등을 읽는다. 특히 <나폴레옹전>은 수십 차례 읽었을 정도로 정주영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버지가 정주영을 찾아왔다. 시골집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온 평양부기학원 안내서를 보고 평양에 갔다가 혹시 서울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관계자의 말을 듣고 서울로 찾아온 것이다. 정주영은 아버지와 덕수궁 대한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대화를 나눴다. 정주영은 지난번과 달리 “돌아가지 않겠다”고 강하게 버텼다. 그러나 결국 “너는 종손이다. 너를 찾아 서울로 오면서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며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에게 굴복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마음을 다잡아 효자 노릇을 하자고 열심히 농사를 지었건만 일찍 서리가 내리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농사가 엉망이 돼버렸다. 다시 회의를 느낀 정주영은 300석지기 지주의 아들을 찾아가 돈을 빌려 함께 가출한다. 네 번째 가출이었다.

정주영은 인천으로 가 부두 노동자로 일하고 다시 서울로 와 안암동 고려대학교 신축공사장에서 목재를 날랐다. 그러다가 복흥상회라는 쌀소매상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주인의 신뢰를 얻어 공짜로 쌀가게를 넘겨받은 정주영은 이름을 ‘경일상회’로 바꾼다. 고향을 등진 지 4년 만이었고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1939년 12월 쌀 배급제가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경일상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번 돈을 갖고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논 2000평을 사줬고 변중석과 결혼도 했다. 다시 서울로 온 정주영은 아현동 고개에 있는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 공장을 인수했다. 자동차와 정주영의 인연은 이때 시작되었다. 그러나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아도서비스는 강제로 합병당했다. 발을 뺀 정주영은 트럭 30대를 사 황해도 수안군에 있는 홀동금광의 광석을 평남 진남포 제련소로 운반하는 일을 한다. 그러다가 해방되기 3개월 전 사업을 전부 정리해 5만원을 찾아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갔다. 천우신조였다. 만약 그대로 있었으면 돈도 못 챙기고 소련군에게 붙잡혀 시베리아로 끌려갔을 것이다. 광복 이후 다시 서울로 온 정주영은 조선제련이라는 적산 회사에 취직했다. 1946년 4월, 서울 중구 초동 106번지 적산 대지를 불하받아 매제 김영주 등과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걸고 자동차 수리 공장을 시작했다. ‘현대’의 시작이었다.

정주영은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신용이 곧 자본이다. (나는) 장사도 기업도 돈이 있으면 더욱 좋고, 돈이 없어도 신용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안 사람이다. 나는 정직과 성실로 주인의 신뢰를 얻어 쌀가게를 물려받았고, 믿을 만한 청년이라는 신용 하나로 자금을 얻어 사업을 시작했으며 상품에 있어서의 신뢰, 모든 금융 거래에 있어서의 신뢰, 공급 계약에 있어서의 신뢰, 공기 약속 이행에 있어서의 신뢰, 공사의 질에 있어서의 신뢰, 그 밖의 모든 부분에 걸친 신뢰의 총합으로 오늘날의 ‘현대’를 이루었다. 부지런함은 자기 인생에 대한 성실성이며, 우리는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은 일단 신용하지 않는다.’

정주영, 번 돈 갖고 귀향해 변중석과 결혼

정주영의 이 말은 ‘현대정신’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정주영가(家)는 오늘날 ‘범(汎)현대가’로 분화했다. ‘범현대가’는 정주영의 아들들이 이끄는 자동차(현대자동차그룹), 유통(현대백화점그룹), 해운·제조(현대그룹), 조선(현대중공업), 금융(현대해상·현대기업금융) 기업들과 형제들이 이끄는 현대산업개발·KCC그룹·성우그룹·한라그룹 등이다.

‘범현대가’의 맏형은 정몽구 회장이 이끄는 현대자동차그룹이다. 정주영의 장자인 정몽구가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으로 취임한 것은 1998년 12월. 하지만 실질적으로 정몽구가 현대·기아자동차 실권을 잡은 것은 1999년 3월이다. 정주영의 동생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저서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에 관련 내용이 나와 있다. ‘1999년 3월3일 큰형님(정주영)이 집무실로 나를 불렀다. 방에는 큰형님의 최고 참모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평소와 달리 표정이 굳은 채 일제히 나를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큰형님이 내게 말했다. “몽구가 장자인데, 몽구에게 자동차회사를 넘겨주는 게 잘못됐어?” 내게 일방적으로 던지는 최후통첩이었다.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잘못된 것 없습니다.” 그러자 큰형님은 “그렇게 해!”라고 말했고 나는 “예!” 하고 대답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이후 정세영은 현대차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났고 정몽구의 현대차 시대가 열렸다.

정몽구가 키를 잡은 현대자동차그룹은 현재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대제철·현대모비스·현대건설·현대글로비스·현대위아·현대로템·현대하이스코·현대비앤지스틸·에이치엠씨투자증권 등 11개 상장 회사와 현대엔지니어링·현대파워텍·현대다이모스·현대카드 등 비상장 회사 45개로 구성돼 있다. 2001년 정몽구가 경영권을 승계했을 당시 36조1360억원이던 현대·기아차그룹의 자산은 2014년 현재 180조9450억원으로 늘어났다.

현대차는 지난 1월6일 2018년까지 총 80조70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집행한다고 밝혀 재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투자액의 76%에 달하는 61조원을 국내에 투자한다는 점이 주목됐다. 지난해 9월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를 10조5000억원에 사들인 데 이은 공격적인 투자가 향후 현대차그룹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놓고 전문가들의 분석이 한창이다.

정몽구의 외아들 정의선 현대·기아차 부회장은 1995년 정도원 강원산업 회장의 딸 정지선과 결혼했다. 일찍 작고한 정몽구의 형 정몽필 전 인천제철 회장의 둘째 딸 정유희는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의 장남 김지용과 결혼했다.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시사저널포토
정주영 “신용이 곧 자본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셋째 아들 정몽근 명예회장의 아들인 정지선 회장이 이끌고 있다. 최근 백화점의 경쟁력이 떨어지자 복합쇼핑몰과 아웃렛 등으로 공격적인 확장에 나서고 있다. 일차로 서울 송파구 장지동의 복합유통단지 가든파이브에 프리미엄 아웃렛을 올가을쯤 개장할 계획이다. 현대백화점그룹은 2014년 9월 현재 자산 규모 11조9605억원을 기록했다. 이것은 2009년에 비해 64.4% 증가한 규모다. 정몽근의 둘째 아들 정교선은 자동차 부품 전문 기업인 대원강업 허재철 회장의 큰딸 허승원과 결혼했다.

최근에는 정주영의 넷째 동생인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아들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이 서울 시내 면세점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해 현대백화점그룹과 유통 경쟁을 벌이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몽규와 정지선은 5촌간이다. 하지만 1월12일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비전 2020’ 기자간담회에서 정몽규는 “정지선 회장과는 사업 문제로든 개인적으로든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사이다. 현대아이파크몰의 유통 사업 강화는 현대백화점그룹과 경쟁하는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정주영의 외동딸인 정경희는 해운·레저를 주력으로 하는 선진종합(주) 회장인 정희영과 결혼했다. 큰딸 정윤미는 이건산업 박승준 대표에게, 둘째 딸 정윤선은 남영비비안 남석우 회장에게 시집갔다. 정주영의 넷째 아들 정몽우는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장남 정일선은 현대비앤지스틸 사장을 맡고 있다. 부인이 구자엽 LS전선 회장의 딸인 구은희다.

현대그룹은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이 이끌고 있다. 현정은 회장은 현영원 전 신한해운 회장의 딸이다. 현대그룹 계열사는 총 20곳이다. 현대글로벌·현대로지스틱스·현대엘리베이터·현대상선 등이 있다. 이 중 상장사는 현대상선·현대엘리베이터·현대증권 등 3곳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정몽준 전 의원이 최대 주주로 있다. 현대오일뱅크·현대미포조선·현대종합상사·현대삼호중공업 등을 계열사로 두고 있다. 지난해 3조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기록하는 등 경영 실적이 나빠지자 최근에는 정몽준이 현장에 머무르며 직접 지휘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주영의 7남 정몽윤은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을 맡고 있다. 김진형 전 부국물산 회장의 딸 김혜영과 결혼했다. 정주영의 8남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은 권영찬 현대파이낸스 회장의 딸 권준희와 결혼해 1남 1녀를 뒀다.

한라그룹은 정주영의 첫째 동생 정인영이 창업했다. 지금은 둘째 아들 정몽원이 이끌고 있다. 상장사인 한라와 만도를 비롯해 한라마이스터·만도헬라일렉트로닉스·한라스택폴 등 23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현대시멘트·성우종합건설 등을 두고 있는 성우그룹은 정주영의 둘째 동생 정순영 일가가 이끌고 있다. 정주영의 유일한 여동생인 정희영의 남편 김영주는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을 지냈다. 정희영·김영주 부부의 첫째 아들 김윤수는 한국프랜지공업 회장으로 있고, 둘째 아들 김근수는 (주)후성·퍼스텍(주)·한국내화(주) 등을 거느린 후성그룹 회장이다. 정주영의 다섯째 동생 정신영의 부인 장정자는 장홍선 전 극동도시가스 회장의 누나다. 아들 정몽혁은 현대종합상사 회장으로 있다. 정주영의 막내 동생 정상영은 KCC 명예회장이다. 둘째 아들 정몽익의 부인 최은정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여동생 신정숙의 딸이다. 최은정의 언니 최은영은 유수홀딩스(전 한진해운홀딩스) 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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