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24. “‘세’가 날아든다, 온갖 잡세가 날아든다”
  •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
  • 승인 2015.02.05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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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은 면제되고 백성만 부과받는 조세불의 만연

당나라 시인 유종원(773~819년)이 쓴 ‘포사자설(捕蛇者說·뱀을 잡는 사람의 이야기)’이란 글이 있다. 호남성(湖南省) 영주(永州)에 산다는 뱀과 세금에 얽힌 이야기다. ‘영주 들판에 검은 바탕에 흰 무늬가 있는 이상한 뱀이 나타났는데 초목이 닿으면 다 말라 죽었고, 사람을 물면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뱀을 잡아 말려 약으로 쓰면 중풍과 경련, 피부병과 나병 등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태의(太醫·황제의 어의)가 이 뱀을 두 마리 잡아 바치면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준다는 왕명을 얻어서 사람을 구하자 영주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들었는데 장씨(蔣氏)라는 사람이 3대째 그 이익을 독점했다. 그 비결을 묻자 뜻밖에도 “나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이 때문에 돌아가셨고, 내가 이를 이어받은 지 12년째인데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지 모릅니다”면서 크게 근심했다. “차라리 세금을 내는 것이 어떠냐”고 하자 “이 일은 불행한 일이지만 이 일 대신 세금을 낸다면 불행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가혹한 세금은 백성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조세불의가 만연하면서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조정을 돕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사진은 영화 의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조세 형평성과 세금 징수 관리의 부패

동양 사회의 전통적인 조세제도는 조·용·조(租庸調)였다. 조(租)는 농토에 부과하는 토지세이고, 용(庸)은 부역으로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조(調)는 그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것으로 공납(貢納)이라고 한다. 조용조라는 세법은 토지제도인 균전제(均田制)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균전제는 균등할 ‘균(均)자’를 쓰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제도였다. 균전제를 가장 먼저 시작한 왕조는 북위(北魏)였다. 삼국시대 조조(曹操)가 세운 위(魏)나라와 구분하기 위해서 북위라고 표기하는데 북위는 고구려와 같은 동이(東夷)·동호(東胡) 계통이었던 선비족이 세운 나라였다. 북위는 만주 북부의 대흥안령 산맥에서 시작해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을 거쳐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까지 장악했던 강력한 제국이다.

북위에서 시작한 균전제는 수(隋)나라를 거쳐 당(唐)나라에도 계승되는데, 이는 수나라와 당나라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모두 북위 왕실의 후예들, 즉 선비족의 후예들이란 뜻이기도 했다. 당나라 개국 시조인 고조 이연은 619년 균전제와 조용조 제도를 함께 실시했는데 18세 이상의 장정에게 1경(頃), 즉 100무(畝)의 토지를 나누어주고 그 대가로 조용조를 받는 제도였다. 나라에서 토지를 나누어주었으니 그 대가로 세금을 납부하라는 것으로 백성이기 때문에 무조건 세금을 내야 한다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국가와 백성 사이의 쌍무적인 관계였다. 유종원의 ‘포사자설’은 당나라 개국 당시의 쌍무적인 관계가 150~200여 년 후의 인물인 유종원 때에 이르면 국가가 절대적 우위에 있는 일방적 관계로 전락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국가가 백성들 위에 군림하게 되면서 생기는 중요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다. 조세 형평성의 문제와 세금 징수 관리들의 부패 문제다. 조세 형평성 문제란 부자와 빈자 사이의 세금 부과가 형평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즉 부자는 많이 내고 빈자는 적게 내는 조세 정의와는 달리 부자나 빈자가 비슷한 액수의 세금을 내거나, 심지어 부자는 내지 않고 빈자에게만 부과하는 경우를 뜻한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이 1월20일 연말정산과 관련해 긴급 기자회견을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양반 사대부들 병역 의무에서 빠져나가

조선의 세법도 조용조가 기본이었는데 일종의 농지세인 조(租)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농지 소유 면적을 기준으로 부과했기 때문에 농지를 많이 소유한 전주(田主)는 소유 면적만큼 세금을 납부하는 반면 농토가 없는 전호(田戶·소작인)들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지방 특산물을 납부하는 조(調), 즉 공납에서부터 큰 문제가 발생했다. 공납은 그 종류가 무수히 많았지만 부과 단위가 재산이 아니라 가호(家戶) 단위였기 때문이다. 부호(富戶)나 빈호(貧戶)를 막론하고 비슷한 액수의 세금을 부과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부자나 빈자나 똑같은 액수의 세금을 내는 간접세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공납 부과 단위를 가호가 아니라 농지 면적 단위로 바꾸자는 해결책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대동법(大同法)으로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또는 작미법(作米法)이라고도 한다. 가호마다 비슷한 액수의 세금을 부과하던 것을 농지 면적으로 부과 단위를 바꾸고 쌀로 통일해 내게 하자는 것이 대동법이었다. 조세 정의에 부합했지만 농지를 많이 가진 양반 사대부들이 극렬하게 반대했다. 대공수미법을 주장한 정치가들은 조광조·이이·류성룡·김육 등 개혁 정치가였다.

임진왜란 때 작미법이란 이름으로 이 법을 실시했던 류성룡은 남인이었다. 그러나 임란이 끝나자 선조와 양반 사대부들은 류성룡을 실각시키고 이 법을 폐지했다. 그 후 대동법 논쟁이 가장 치열했던 때는 효종 연간이었다. 이때 집권 서인은 대동법을 둘러싸고 분당하는데 이 법의 확대 실시를 주장했던 김육·조익 등은 ‘한당(漢黨)’이 되고 대동법을 결사 반대했던 김집·송시열 등은 ‘산당(山黨)’이 되었다.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이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둘러싸고 분당까지 된다는 것은 진정한 보수주의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두 당의 정책 대결이 치열하자 효종은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부호)들이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가난한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하는데 그 원망의 크기가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여러 신하들은 “소민들의 원망이 더 큽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효종은 “그 대소를 참작해서 시행하라”(<효종실록> 즉위년 11월5일)고 사실상 한당 김육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조정에 가득 찬 벼슬아치 대다수가 광대한 농지를 소유한 양반  사대부들이었기 때문에 대동법의 확대 실시는 쉽지 않았다.

군적수포제 폐해로 임진왜란 위기 자초

노동력을 제공하는 용(庸)도 문제였다. 용 중에서 가장 큰 것은 군역(軍役), 즉 병역 의무였다. 조선은 개국 초 정도전이 입안한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 원칙에 따라 16세부터 60세까지의 정남(丁男)은 모두 병역 의무를 졌다. <경국대전> ‘병전(兵典)’의 ‘군역 면제’ 조항에는 ‘60세 이상과 불치병자, 장애인, 병든 부모와 70세 이상 된 부모를 모시는 아들 한 사람, 90세 이상 된 부모를 모시는 아들들만 군역에서 면제한다’고 나와 있다. 양반 사대부들에게도 당연히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양반 사대부들은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군역을 회피했다. 관직에 종사하는 벼슬아치나 2품 이상을 역임한 고위 관직자는 퇴직 후에도 면제되었다. 그래서 조상들의 음덕으로 벼슬하는 음서(蔭敍)가 병역 회피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고위 관직자의 자손들이 종9품에 지나지 않는 능참봉(陵參奉)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성균관(成均館)·사학(四學)·향교(鄕校)의 학생들을 면제해준 것도 학문 진작을 위한 것이었지만 병역 회피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양반 사대부는 물론 돈 많은 백성들도 담당 아전들과 결탁하거나 노자(奴子·남자 종)에게 대신 시키는 식으로 빠져나갔다. 합법·불법이 뒤섞인 이런 현상들이 광범위하게 퍼진 결과 양반 사대부 중에서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중종 36년(1541년)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를 제정해 병역제도를 크게 바꾸었는데, 실제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대신 병역 의무 대상자들에게 1년에 2필씩의 군포(軍布)를 받는 것이 이 법의 골자였다. 각 지방에서 군포를 징수해 중앙으로 올리면 병조에서 다시 필요한 군사의 숫자에 따라 군포를 지방에 내려보내 군사를 고용하게 하는 제도였다. 군적수포제는 몸으로 수행하던 병역 의무가 세금으로 전환되었음을 뜻하는 것인데, 문제는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합법적으로 면제되었다는 점이다. 수많은 특혜를 누리는 양반 사대부들은 세금에서 면제되고 가난한 백성들만 세금을 부과받는 조세불의(租稅不義)가 합법이 된 것이다. 그만큼 조선이란 나라의 도덕성은 타락했고, 이런 조세불의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군적수포제가 제정된 지 50여 년 후에 발생한 임란에서 일본군에 대거 가담하는 것으로 저항했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편에는 백규(白圭)가 맹자에게 “나는 세금을 20분의 1만 받으려 하는데 어떻겠습니까”라고 묻자 맹자가 “그것은 맥(貊)의 방법이오”라고 답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맹자가 말한 맥은 고조선을 뜻한다. 고조선의 전통 세법은 20분의 1로서 중국보다 크게 낮았다는 것이다. 또한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선공(宣公) 14년조’ 주석에는 “14~15분의 1의 세금은 대맥(大貊)의 도(道)이고, 12~13분의 1은 소맥(小貊)의 도”란 구절도 있다. 대맥·소맥 등은 모두 고조선의 제후국들인데, 이 역시 중국에 비해 아주 가벼운 세금이었다.

한국 사회가 조세 문제 때문에 시끄럽다. 시끄러운 이유는 간단하다. 조세정의와 거꾸로 가는 ‘부자 감세, 빈자 증세’에 대한 반발이 심하기 때문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가 기업의 법인세 25%를 22%로 깎아준 결과 2009~13년 5년간 기업들이 감면받은 세금이 37조원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이 액수의 재원만 있으면 현재 숱한 논란이 이는 세금 문제를 잠재우고 늘어난 복지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증세 없는 복지 같은 말장난으로 현실을 호도하면서 ‘부자 감세, 빈자 증세’를 추진하려니 어찌 국민들의 반발이 없겠는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증세 여력이 있는 부분은 기업의 법인세와 대호(大戶)들에 대한 직접세인 재산세, 그리고 고액 연봉의 직장인들밖에 없다. 이를 외면하고 가난한 직장인들에게 증세하려니 SNS에 “세가 날아든다. 온갖 잡세가 날아든다”는 ‘세금별곡’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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