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소년 차돌이> <마린보이> <달려라 승리호> <마징가 Z> <플란다스의 개>…. 19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세대가 추억하는 애니메이션들이다. 이것들이 일본 작품이었음을 나중에 알았을 때 느꼈던 배신감은 또 얼마나 컸던가. 그 이후 세대 역시 작품만 바뀌었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겨울방학에도 <도라에몽> <포켓몬> <코난> <진격의 거인> 극장판이 우리 극장가를 점령하고 어린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 매출도 연 4억 달러에 세계 4위 규모로 성장했지만 아직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자기권에 있다.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은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11%(22억 달러)를 점유하며 미국(66억 달러)과 함께 세계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일본 애니메이션은 왜 힘이 센가
두 번째 힘은 차별화된 스토리텔링 전략이다. <명탐정 코난>
<도라에몽> <신세기 에반게리온> <진격의 거인> 등 대다수 일본 애니메이션은 앞서 언급한 안정적인 생태계의 결과물이다. 그 중심에 스토리텔링 전략이 있다. OSMU를 성공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원천 콘텐츠와의 연관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독립적으로 즐길 수 있는 향유 요소를 확보해야만 한다. 미시 콘텐츠를 활성화해 상품화가 가능해야 하며 핵심 스토리나 공통의 서사 세계를 기반으로 하는 서사 확장이 가능해야 하는데 그것의 기반이자 중추가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독자층이나 소재적인 측면에서 미국 애니메이션의 틈새를 공략해 성공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다분히 미국 중심적인 시각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미국 애니메이션에 대해 차별점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틈새시장 전략이라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시장 환경, 자본, 제작 수준, 문화 등을 고려한 최적화의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이 스토리텔링 전략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활용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뱅크 시스템, 집단 주인공 시스템, 변신 모티브 등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영입된 작가가 다양한 소재의 다층적인 스토리와 결합해 창의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축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선행 콘텐츠를 꼼꼼하게 분석해 창조적으로 계승하면서 장르 간 경계를 허물고 대중적인 충성도가 높은 스토리를 애니메이션 안으로 수렴함으로써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을 보여줬다. 최근 쿨 재팬(Cool Japan)의 첨병으로 각광받고 있는 <요괴워치>가 대표적인 사례다. <요괴워치>는 1)요괴라는 전통문화를 토대로 선행 콘텐츠를 철저히 분석해 2)마네키네코와 헬로 키티를 결합한 지바냥 캐릭터를 만들고 3)<포켓몬스터>의 캐릭터 구도와 <도라에몽>의 세계관을 텍스트 안으로 수렴하면서도 4)요괴와의 대결이나 제압이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차별화 전략을 동시에 보여준다.
보수적 생태계와 차별화된 스토리텔링
지금껏 우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선정성과 폭력성 그리고 왜색에 대한 경계라는 시각에서 이해해왔다. 지나치게 선정적이며 폭력적이고 왜색이 짙은 작품들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다. 다만 그것이 스토리텔링의 극히 일부분이 아닌지도 고민해봐야 한다. 좀 더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향유하고 평가할 수 있다면 그들이 지닌 미덕을 벤치마킹하고 서사의 넓이와 깊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산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애니메이션을 자국의 산업 환경에 최적화함으로써 단점을 특색으로 바꾼 일본 애니메이션의 고군분투도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문화는 자유로운 사고와 다양성을 토대로 한 대화의 장이다. 애니메이션은 다른 장르에 비해 문화적 차이에 의해 뜻이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작다. 그래서 다른 문화권의 접근이 용이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전제로 다양한 담론을 생산할 수 있으며 텍스트 간의 상호 연관성 역시 표면적·이면적으로 활성화된 장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힘은 보수적인 생태계 구조와 차별화된 스토리텔링에 있다.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어릴 때는 ‘열광’, 커서는 ‘부정’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로는 그들의 힘을 제대로 읽어낼 수 없다. 자신들의 산업 환경에 최적화하기 위해 그들이 선택하고 집중했던 전략들을, 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한 한국 애니메이션의 준거가 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마징가 Z>가 <진격의 거인>으로 바뀌고 <도라에몽>이 30년 넘게 장수하는 동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고 비판하고 벤치마킹했는지 냉철하게 돌아볼 때다.
애니메이션 <빅 히어로>의 원제는 <빅 히어로 6>로 동명의 마블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텍스트 곳곳에 드러나는 일본풍 배경과 소품들, 와사비 같은 별명뿐만 아니라 거대 로봇의 메카닉 등을 근거로 일본 애니메이션과의 연관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샌프란쇼코(샌프란시스코+도쿄)라는 공간 설정, 일본풍의 배경과 소품이 서사적 필연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원작이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와사비도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왔다는 점, 거대 로봇의 메카닉은 오히려 창의적인 요소의 비중이 더 크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이 창의적인 상호 수렴 과정을 통해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어떻게 텍스트 안에서 창의적으로 재미있게 활용했느냐, 얼마나 완성도 있게 재창조하고 있느냐를 눈여겨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빅 히어로>의 성취는 주목할 만하다. 더 강한 재질, 차별적인 무기, 파괴 중심의 제압 등과 같은 기존 거대 로봇 문법과는 달리 폭신한 재질의 로봇, 고전적인 스타일의 물리적인 로켓 주먹, 치유와 위로, 자기희생을 통한 문제 해결 등 창의적인 재해석은 로봇 메카닉물에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빅 히어로>는 마블+디즈니+픽사의 어법이 창의적으로 결합하는 스토리텔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디즈니가 40억 달러를 들인 마블 인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와 마블의 5000개 캐릭터 인수에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얼마나 탄력적·선택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베이맥스의 공감각적 자극과 개그 신은 물론 서사의 주요 마디마다 던지는 성찰적 질문은 탁월했다. 베이맥스는 서사의 주요 마디마다 ‘왜 싸움을 배워야 하는지 모르겠어’ ‘이게 진정 테디가 원하는 것일까’와 같은 자기성찰적인 대사를 던진다. 이 대사는 기존의 로봇 메카닉물에서는 볼 수 없는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반복을 통해 히어로의 성장이 견인된다는 점에서 기존 로봇물의 성취를 넘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