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황제 맘에 안 들면 대권 주자도 ‘아웃’
  • 김원식│미국 통신원 ()
  • 승인 2015.02.09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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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재벌 머독, 대권 3수 도전 나선 롬니 주저앉혀

3주 전만 해도 “또다시 한 번”을 외치며 호기롭게 나섰다. 2016년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던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다. 롬니가 공화당 대선 후보군에 들어가자 다른 예비후보들의 지지율은 모두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지난해 중반부터 후보군에 등장한 그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런 결과 앞에서 고무되지 않을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대선 3수를 결심하게 된 이유였다. 그런데 불과 20여 일 만에 뜻을 접었다. 1월30일 지지자들과의 콘퍼런스콜에서 밝힌, “난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는 게 출마 포기 이유였다.

롬니가 주저앉게 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으로 시선이 향한다. 월스트리트저널·폭스뉴스 등을 거느린 머독은 1월14일 싱크탱크인 ‘맨해튼 인스티튜트’ 행사에서 롬니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남겼다. “기회를 얻었지만 잘못 다룬 끔찍한 후보”라는 게 롬니에 대한 머독의 평가다. 이제 막 스타트라인에 주자가 들어서기 시작하는 공화당 후보 경선에서 머독이 던진 이 한마디의 파급력은 매우 컸다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했다. 직접적으로 “물러나라”는 말이 없었을 뿐 여론조사 1위를 끌어내린 건 보수 언론의 사주이자 큰손이었다는 해석이다.

대선 3수 도전 뜻을 접은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왼쪽)와 롬니의 뜻을 접게 만든 루퍼트 머독 뉴스코퍼레이션 회장. ⓒ AP 연합
주요 후원자와 참모들 “롬니 아닌 부시”

머독의 부정적인 반응은 공화당 선거판 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상징적인 신호탄이 됐다. 가장 중요한 후원금 모금은 시작부터 어려웠다. 일단 ‘큰손’들이 하나둘 롬니를 떠났다. 롬니와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를 놓고 저울질하던 후원자들은 롬니가 아닌 부시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젭 부시는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1989~1993년)의 아들이자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2001~2009년)의 동생이다. 이전 선거에서 롬니를 지지하는 큰손은 윌리엄 오번도프가 중심이 돼 관리해왔다. 그런데 그 오번도프가 이번에는 롬니가 아닌 부시 쪽에 섰다. 오번도프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연락했던 사람들 중 롬니를 지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고 말했다. 롬니를 그동안 지지해왔던 펀드 운영자도, 부동산업자도 롬니의 행사가 아닌 부시의 행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갈수록 후원금 액수의 제한이 없는 후원자, 이른바 슈퍼팩(SuperPAC)의 중요성이 커지는 미국 선거판에서 이처럼 오번도프와 큰손들의 이탈은 롬니에게 치명타가 됐다.

큰손만 빠진 게 아니다. 수족들도 롬니의 품을 떠났다. 과거 그와 함께 미국 전역을 돌며 선거운동을 도왔던 참모들이 이번에는 부시 캠프로 향했다. 정치적 고문 역할을 했던 존 다운즈와 대니 디애즈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머독의 한마디가 모든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아닐 수 있다. 다만 머독의 한마디가 롬니냐 부시냐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일종의 홀가분함을 제공했을 수는 있다. 머독은 미국 특유의 ‘미디어의 이념적 분열’을 불러온 인물이다. 원래 미국에서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는 신문의 몫이었지 방송의 몫이 아니었다. 신문과 비교해 방송의 보도는 비교적 공정하며 중립적이었고, 그래서 미디어 전체적으로는 균형 있는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머독이 보수성을 강조하면서 시작한 ‘폭스뉴스’는 이런 업계의 전통을 확 바꿔버렸다. 그런 면에서 머독은 미국 언론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심지어 대선 후보를 직접 만드는 일에 뛰어들기도 했다. 2011년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전 CIA 국장은 아프가니스탄 주둔군 사령관 시절, 자신을 찾아온 폭스뉴스 기자와 만났다. 기자는 로저 에일스 폭스뉴스 회장의 이야기를 전달했다. 퍼트레이어스가 2012년 오바마의 대항마로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 본인만 원한다면 폭스뉴스를 통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겠다는 것, 그리고 에일스 회장 자신이 직접 선거 캠프의 책임자로 나설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머독이 선거자금을 지원해주겠다는 것 등이었다.

물론 그의 이런 시도는 좌절됐다. 퍼트레이어스가 “호의는 고맙지만…”이라며 완곡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바마 대통령이 제안할 경우 CIA 국장 자리를 받을 것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퍼트레이어스와 폭스뉴스 기자의 대화는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퓰리처상 등을 받은 봅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가진 녹취록을 통해 공개됐다. 우드워드 기자는 “머독에 관한 이 이야기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선거 제도를 부수려는 시도로 매우 심각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 사건이다”라고 규정했다.

롬니가 직접 ‘킹메이커’ 나설 수도

머독은 롬니에 대해 강한 불신을 가졌다. 특히 이민정책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다. 2012년 결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돼 오바마의 대항마로 선택된 롬니는 뉴욕에서 50명의 큰손 기부자를 모아놓고 “강경한 이민정책을 고수하겠다”고 말했다. 50명 중 한 명이었던 머독은 라틴계 표심을 포기해버리는 그의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선거의 쟁점 중 하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시행하려는 불법 체류 청소년 80만명 추방 유예와 취업 허용 조치의 존속 여부였는데 이는 라틴계 이민자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를 두고 롬니는 “나의 이민정책을 라틴계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말을 자주 바꾸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말했고 머독은 그런 롬니에 대해 답답해했다. 결국 롬니의 출마를 막은 건, 큰손 머독의 오래된 불신인 셈이었다.

어쨌든 롬니 전 지사가 출마 뜻을 접으면서 공화당 잠룡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현재 거론되는 인물만 20여 명이다. 선두 주자가 사라지면서 혼전이 돼버렸다. 일단 롬니 전 지사의 최대 라이벌인 젭 부시 전 플로리다 주지사에게는 순풍이 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렇게 혼전일 때 오히려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는 게 물러난 롬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가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질 수 있어서다. “지명도가 낮은 차세대 공화당 지도자가 나서서 민주당 후보를 깰 것이라 믿는다”는 그의 사퇴 발언을 곱씹어보면 자신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부시 전 지사의 손을 들어줄 리는 없어 보인다.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43)은 비교적 차세대에 속하지만 이미 지명도가 높은 유명 인사다. 그렇다 보니 스캇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47)가 롬니가 말한 ‘차세대 지도자’일 것이라는 견해가 확산되고 있다. 워커 주지사는 최근 대선을 위해 정치활동위원회(PAC)를 설립하면서 출마에 의욕을 보이고 있고 2월1일에는 ABC 방송에 출연해 ‘이슬람국가(IS)’를 향해 “공습뿐만 아니라 지상군 파견 준비도 해야 한다”며 미국의 키잡이 역할에 의욕을 보였다. 킹메이커를 꿈꾸는 머독에 의해 ‘킹’을 향한 꿈이 좌절된 롬니. 이번에는 머독을 넘어서서 자신이 직접 ‘킹메이커’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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