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버는 애국자라 했으면, 병든 우릴 나라가 돌봐야지”
  • 동두천=제희원 인턴기자 ()
  • 승인 2015.02.1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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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위안부 122명, 대한민국 정부 상대 손배 소송

지난 2월5일 오전 10시,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일대 주한미군 캠프 케이시(Camp Casey) 정문 맞은편에 있는 기지촌을 찾았다. 밤새 불야성을 이뤘던  업소들의 네온사인이 다 꺼진 기지촌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 같았다. 미군 병사 모양을 한 안내판이 덩그러니 기지촌 출입구에 서 있고, 가게에는 ‘특수 지역으로 내국인은 출입할 수 없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곳에는 주한미군만 출입할 수 있는 클럽과 성매매 업소가 거미줄처럼 뒤섞여 있다.

 

다른 지역 미군부대 주변 기지촌들은 점점 규모가 작아지거나 형태가 달라졌다. 그런데 동두천 일대는 예전 모습이 비교적 그대로 남아 있는 편이다. 지금은 주로 외국인 여성들이 들어와 영업하고 있다. 기지촌 중심부에는 돈 많은 업주가 운영하는 클럽들이 있고, 클럽 바로 위층 방에서 성매매가 이뤄진다고 한다. 중심부 뒤편으로는 ‘스톨’이라고 부르는 작은 술집과 그 옆으로 ‘포주집’이 즐비하다. 포주집은 대부분 2층 건물인데,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1월5일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에 있는 기지촌과 낙검자 수용소. ⓒ 시사저널 최준필

 

미군 위안부 생활을 다룬 증언집 등에 따르면 1960년대 저녁 무렵, 이 일대 골목은 미군과 기지촌 여성들로 북적였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이 그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모르고 간 기지촌에서 여성들은 진정제인 ‘세코날’(속칭 헬렐레약)을 먹어야 약 기운에 부끄러움을 털어내고 호객행위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좁은 골목에서 술 취한 미군을 만나도 도망갈 수 없었다. 이곳에선 포주와 미군에 의한 폭행이 일상이었다.

 

 

 

기지촌은 한번 발을 들이면 못 나오는 곳이라는 의미로 ‘턱걸이’라고 불렸다. 기지촌으로 통하는 길은 대개 하나뿐이어서 탈출하다가도 곧바로 붙잡혀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경우 포주의 가혹한 폭행이 뒤따랐다. 동두천에는 캠프 케이시 외에도 크고 작은 미군부대가 여러 개 있고 주변엔 기지촌이 속속 들어섰다. 동두천 전체가 거대한 기지촌처럼 보일 정도였다.

 

기지촌으로 흘러가게 된 사정은 여성들마다 달랐다. 하지만 빈곤에 시달리다 어떤 일인지 정확히 모른 채 취직하는 줄로만 알았던 경우가 대다수다. ‘일본군 위안부’처럼 납치를 당하거나 사기를 당해 들어온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양공주’ ‘양색시’ ‘양갈보’라 불렸고, 정부는 행정 문서에 이들을 ‘미군 위안부’로 기록했다. 오랜 세월 이들은 침묵해야만 했다.

 

새움터·기지촌여성인권연대 등 시민단체는 주한미군 위안부 출신들이 연로해 병들고 죽음을 맞는 상황에서 하루빨리 진실 규명과 정부 배상을 요구해야겠다고 판단해 소송을 준비했다. 하지만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은 사회로부터 수십 년 동안 “돈 벌려고 양공주 노릇 한 것 아니었느냐”는 냉소적인 시선을 받아야 했다. 이들을 ‘자발적 양공주’로 규정지어야만 착취를 일삼았던 포주도, 구제하지 않았던 경찰도, 이들을 적극 관리했던 정부도 ‘한국 내 위안부 문제’의 책임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성병 감염자는 ‘몽키하우스’에 갇혀


지난 1월30일 서울 중앙지법에서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 1심 재판이 열렸다. 122명의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10년 이상 기지촌 위안부로 살았던 박영순씨(가명·63)는 “정부가 우리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며 “나라고 과거를 안 숨기고 싶었겠느냐. 그런데 병들어 죽어가는 언니들을 보니까 진실을 밝히고 국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진실을 덮으려는 정부에 맞서 끝까지 증인으로 남아 있겠다고 강조했다. 122명의 원고는 정부를 상대로 미군 기지촌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사실과 피해를 명확히 밝힐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 소송의 쟁점은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미군 기지촌 위안부 여성’을 관리하거나 방조 내지 묵인했느냐는 점이다. 정부 측 변호 대리인단은 ‘기지촌 여성’은 각 지자체에서 관리한 것이며 중앙정부와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는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을 제정해 일반 국민에 대해서는 모든 성매매를 금지했지만 미군부대 반경 2㎞를 ‘특정 지역’으로 설정해 성매매 단속을 면제했다. 대신 전염병예방법 및 식품위생법을 통해 성매매를 적극적으로 관리했다. 보건소로부터 검진증을 발급받은 미군 위안부는 주 1~2회 성병 검진을 받아야 했고, 감염자로 판명되면 낙검자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 치료를 받았다. 검진증을 소지하지 않아 경찰에 의해 ‘토벌’당하거나 미군에게 ‘콘택’(특정 여성에게서 성병이 옮았다고 지목하는 것)당해도 낙검자 수용소로 끌려갔다. 치료 과정에서 페니실린 과다 투약으로 쇼크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미군은 철창이 달린 낙검자 수용소를 ‘몽키하우스’라고 불렀다.

 

박씨는 “거기 안 가려고 정말 애썼다. ‘야매 아줌마’(사이비 의사) 불러다가 검진 전에 성병 유무와 상관없이 주사를 맞기도 했다. 그래도 검진에 떨어져 언덕 위의 하얀 집에 끌려가면 보통 3박 4일에서 일주일까지 있어야 했다. 간호사가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페니실린 맞고 나면 다리가 마비된 것처럼 뻐근해져서 제대로 걷지 못해 질질 끌고 걸어야 했다”고 증언했다.

 

2014년 12월19일 시민단체들이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 소송 관련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뉴스1 ‘미군 위안부’라는 용어가 사용된 정부 공식 문서 ⓒ 시사저널 임준선


박정희 정권, 미군 위안부 ‘애국교육’ 강화


 

박정희 정권 들어 기지촌은 더 철저하게 관리됐다. 1971년 청와대 직속 기지촌정화위원회를 발족하고, 기지촌의 환경 개선과 성병 관리에 대해 논의했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애국교육’도 한층 강화됐다. 군수나 국회의원 후보가 직접 와서 교육하기도 했다. 박영순씨는 미군을 잘 상대해 외화벌이를 잘하면 집도 지어주고 가발공장에도 취직시켜주겠다는 그들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 미군이 성병에 많이 걸리면 애국교육 횟수도 늘어났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은 수많은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아 달러를 벌었다. 하지만 번 돈은 대부분 포주들에게 빼앗겼다. 방값과 식대, 화장품값, 빨래비용, 약값 등으로 포주에게 진 빚도 점차 늘어났다. 기지촌은 제 발로 들어가서 제 발로 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박씨는 “어디 가서 항의를 해. 맞아 죽고, 미군에게 흉기로 죽고, 쉬쉬하기 바빴다. 한마디로 너희는 ‘2등 인간’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겠지. 어리고 예쁜 애들이 참 많았는데…. 내 동료가 죽어 있는 모습이 발견되면 가장 힘들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연구 논문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부터 지금까지 기지촌을 거쳐 간 여성의 수는 적게는 20만명, 많게는 30만명으로 추산된다. 이는 파월 장병 수와 비슷한 규모다. 박씨는 “우리더러 분명히 ‘달러 버는 애국자’라 그랬는데…. 이제라도 병들고 죽어가는 우리를 나라가 돌봐야 해. 언니들하고 서로 의지하며 사는 게 내 꿈이야”라고 말했다.

 

정부 측 소송 대리인은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인 사안이라서 취재 요청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음 재판은 4월10일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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