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 끝 수첩에서 찾은 ‘그때 그 남자’
  • 김현일 대기자 ()
  • 승인 2015.03.0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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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 전격 발탁…현직 국정원장 차출 이례적

박근혜 대통령 취임 몇 달 뒤인 2013년 5월, ‘주일 대사 이병기’ 발표가 나오자 “대통령이 오랜만에 제대로 한 인사”라는 반응이 뒤따랐다. 잇단 총리·장관 후보들의 낙마 사태로 노이로제에 걸렸던 박근혜정부가 거의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물론 일부 비난도 있었지만, 야당 반응도 보기 드물게 우호적이었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박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국정원 대선 개입 시비로 국정원이 일대 공황 상태에 빠져들자 그를 불러들였다. 당시 이 대사는 위안부·독도 문제로 헝클어진 한·일 관계를 풀어갈 단초가 겨우 마련돼가는 중이라며 거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내 상황이 워낙 급박한 탓이었다.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는 ‘한나라당 선거자금 차떼기’ 사건 당사자라는 비난이 드셌고, 야당도 공세를 가했으나 ‘통과의례’ 수준이었다. 야당은 그를 ‘낙마 대상자’로 공표했지만 으름장 측면이 강했다.

이병기 국정원장이 2월27일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신임 비서실장 소식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비교적 무난하다는 평가다. 여권의 ‘적재적소’라는 평가에는 못 미치지만 야당도 ‘독한’ 비난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던 저간의 정부 인사 발표 때와는 다르다. 야당의 이런 반응은 지난해 7월 국정원장 인사청문회를 거친 것과 함께 이 실장이 청문회 당시 약속한 ‘국정원 정치 불개입’을 어느 정도 지켰다는 판단도 작용한다. 여기에다 어차피 청와대 인사는 국회 청문회 대상도 아닌 마당에 이 실장과 굳이 척을 질 이유가 없다는 현실적 고려도 한몫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병기 신임 청와대 비서실장. 유연한 국정 수행 능력과 함께 ‘의리 중시’가 인선 배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 시사저널 박은숙
‘차떼기’ 사건 때 모든 책임 뒤집어써

청와대는 총리·장관급 인사에는 갖가지 비판·야유가 단골처럼 따라붙었는데 오랜만의 다른 분위기에 반색하고 있다. 사실 박 대통령은 이 원장을 비서실장으로 내정하고서도 한참 망설인 것으로 전해진다. 직전 정보 책임자가 곧바로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된 전례가 없었고, 자칫 공안 정국 조성을 명분으로 한 반대 목소리가 거셀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신임 이 실장에 대한 여파 탓인지 후임 국정원장(이병호 전 국정원 2차장), 청와대 홍보수석(김성우 홍보특보), 정무특보단(주호영·김재원·윤상현 새누리당 의원), 홍보특보(김경재 전 민주당 의원) 인사에 대해서도 아직까지는 큰 잡음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당내 및 야당과의 소통·협조가 중요한 정무특보단 면면이 거슬린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매우 불만스러워 한다.

대통령이 국정원장에 취임한 지 8개월밖에 안 된 인물을 청와대로 불러들인 이유는 분명하다. 이 실장의 경력이 말해주듯 당·정·청, 국내외 정세에 두루 밝은 적임자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용병의 달인’이란 별명을 듣는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람 다루기’를 포함한 최고 권부의 메커니즘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습득했다. 그런 박 대통령에게 비서실장은 국정 수행의 핵심 중 핵심이고, 따라서 무리를 감내하면서 이 실장을 기용한 것이다. 비서실장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의존이 문제가 될 정도이고, 전임 김기춘 비서실장을 둘러싼 각종 시비가 대표적 증거지만 비서실장의 위상·기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시각은 확고하다.

박 대통령의 성향에 비춰볼 때 단순히 업무 추진 능력만이 비서실장 인사 선택의 전부가 아님은 물론이다. 신임 이병기 실장은 이른바 ‘차떼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불이익을 받으면서도 ‘윗선’으로 책임을 돌리지 않았다. 때문에 국회 진출이 좌절되고 정치권 뒷전을 맴도는 찬밥 신세가 됐음에도 탓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도 ‘의리’에 관련된 일화는 숱하다. 1974년 외무고시(8회)에 합격해 외무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1981년 당시 노신영 외무부장관의 천거로 노태우 정무장관과 인연을 맺은 이래 이후 출범한 노태우 정부 청와대의 의전수석비서관에 이르기까지 10년 넘게 같은 길을 걸어왔지만 ‘노 대통령’과 그 주변·관련 인물들에 대한 ‘비밀’은 결코 입에 올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노태우 정부 비자금은 철저히 이현우 경호실장 소관이었고, 그럼에도 이런저런 소리가 나왔지만 ‘이병기’는 함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안기부 2차장, 한나라당 총재 특보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여야 정치인·관료를 상대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런 사정을 아는 야당 인사들도 정파를 떠나 개인적으로는 그를 은근히 감싸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른말 하기로는 누구에 뒤지지 않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공치사를 안 할 따름이지 실제 그에 얽힌 일화는 무수하다. 노태우 대통령 당시 박철언 보좌관은 사실상 ‘소통령’이었다. 대선 당시 전체 선거운동을 기획하고, 월계수회라는 전국 조직을 결성했던 박철언은 대통령의 절대 신임을 받는 실력자였다. 야당과의 합당 추진도 그의 몫이었다. 대통령 후계자로 꼽힐 정도인 2인자의 발호에 모두가 침묵했으나 그 폐해를 정면에서 지적한 내부 인물이 당시 이병기 의전수석이었다. 실세 박철언의 반격에도 살아남은 것은 이 수석에 대한 신뢰를 확인할 여러 증거가 뚜렷했기 때문임은 물론이다.

1987년 6·29 선언과 관련해 여러 인사들이 나름의 역할을 했노라고 자랑하고 있는데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눈총과 견제로 흔들리는 ‘노태우 후보’의 지지대 역할을 해내기도 했다. 누구도 관여하기를 저어하는 운동권 문제에 대해서도 소신을 피력한 장본인이 이병기 신임 실장이다. 그는 노태우 정부 시절, 노 대통령에게 “각하, 김근태는 빨갱이가 아닙니다”라고 정면으로 진언해 전두환 정권 퇴진 운동을 하다 구속된 김근태 민청련 의장(전 국회의원)을 석방토록 하기도 했다.

소탈한 면모를 말해주는 일화도 상당하다. 그는 자신의 가방을 비서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들고 공관에서 관저까지 걸어갔다. 정문 통과 때는 차창을 열어 경비원에게 답례하고 국정원 구내식당을 이용할 때면 반드시 비용을 지불하는 모습 등은 권위주의에 익숙한 국정원 직원들을 당황케 한 것으로 전해졌다. 

2014년 7월 박근혜 대통령이 이병기 국정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불과 8개월 전이다. ⓒ 청와대 제공
신임 비서실장 앞길에 장애물 첩첩산중

그렇다 하더라도 이병기 신임 비서실장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정치 지형, 난국으로 요약되는 심각한 경제 상황 속에 정책 수단도 여의치 않다. 대통령의 임기가 ‘불과 3년’ 남은 상태에서 집권당은 당·청 수평 관계를 강력히 내세우고 있다. ‘비박(非朴)’이 주도하는 새누리당의 김무성-유승민 체제는 경제 회생을 위한 당·정·청 협력을 말하지만 근저에는 대통령의 공약 등 정부 정책의 수정이 깔려 있다. 내년 총선 대비를 위해서도 불가피하다는 논리라서 청와대로서는 곤혹스럽다. 문재인 대표의 새정치민주연합은 2017년까지의 대선을 내다보며 전면전을 이미 선포한 마당이다.     

‘5-2=3’이다. 그러나 정치판에서는 이를 ‘3’이라고 답하면 오답이다. 황당하지만 ‘2 이하’가 정답에 가까울 터다. 정치 산술은 이렇듯 변화무쌍한데 대통령의 권력을 가장 권력답게 하는 임기가 실질적으로는 얼마 되지 않으므로 운신의 폭은 좁다.

지지율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민심의 흐름을 짐작하는 지표로서 의미가 있음은 분명한데, 박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30%에서 턱걸이 중이다. 연말정산 파동의 여진이 계속되는 등 점수를 딸 소재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간신히 국회 인준을 받은 이완구 총리가 내놓은 게 “고작 그것이냐”는 비아냥거림을 자초한 인사혁신추진위원회다. 청와대에 중앙 인사를 총괄하는 인사위원회가 있고 인사수석실이 있다. 또 총리 산하에는 인사혁신처가 신설돼 있는 마당이니 못난 짓거리라고 매도돼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당에서는 ‘저가 담배’도 아이디어라고 내놨다.

역대 대통령들 거의가 임기 초반의 높은 지지율을 지키지 못한 채 무너졌다. 일련의 개혁 정책을 통해 임기 첫해에 자신의 득표율보다 훨씬 높은 지지를 받았으나 두 해를 넘기지 못했다. 임기 3년 차 즈음의 기준에서 보면 박 대통령은 역대 최하위다. 13대 노태우 대통령보다 다소 높다지만 노 대통령의 대선 당시 득표율(36%) 등을 감안하면 51.6%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박 대통령의 현재는 지극히 우려되는 상황이다. 특히 적극적 지지층에서 등을 돌리고 일련의 대국민 유화 조치를 시도했음에도 얼어붙은 민심 때문에 더 심각한 것이다.

‘초고말저(初高末低)’라는 역대 대통령 지지율 추락 ‘법칙’은 박 대통령에게는 끔찍하기까지 하다. 김대중(DJ)·노무현 대통령 등은 시종일관 내리막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모든 대통령이 하나같이 바닥을 기며 임기를 마쳤다. 그저 김영삼(YS)·이명박 대통령 정도가 임기 후반 지지율 반등을 기록했으나, 이마저도 북한 도발과 시위 사태 등 외부적 요인에 따른 반사 효과였다.

임명 당사자에게 직접 통보한 박 대통령

이렇듯 주어진 상황과 지표들은 암울한 것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고 그럴 계제도 아니다. 또 박근혜 대통령은 최악의 여건을 반전시킨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야당 대표 시절의 ‘천막당사’ 감행은 그 백미다. 국정을 책임진 대통령과 야당의 입장이 다르다고 할지 모르나 기본은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청와대 쇄신 요구에 대해 올 초 박 대통령이 보인 태도를 보고 아연했다. 도대체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 2·27 인사에서는 다소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과거 정부 인사 때는 비서실장이 당사자에게 전화로 통보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임명 통보도 김기춘 실장이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비선 논쟁, 국정 농단 사태로 비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박 대통령은 이번에 특보로 임명된 한 인사에게 전화를 직접 걸어 정중히 수락을 요청하고 20여 분간 대화를 나누었다.

청와대는 지난 설 명절 전, 전국에 ‘관계자들’을 직접 보내 민심의 소재를 낱낱이 파악하고 그 적나라한 내용을 가감 없이 직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 대통령이 진정으로 소통에 나서고, 이것이 민심 이반을 확인한 결과에 이은 실천 노력이라면 30%대로 급락한 지지율은 청와대와 여당, 나아가 국가를 위해서는 오히려 다행일 수 있다. 초심으로 돌아가 분발을 기약하는 계기를 찾았다는 점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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